길만 닦는 동포들(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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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만 닦는 동포들(I)
  • 코리아나뉴스
  • 승인 2005.08.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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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 나자 분쟁난다

미주로 진출한 본국기업들의 직판제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가운데 한국 국순당의 백세주가 미주 총판권을 놓고 이곳 LA현지 업체인 KM 머천트와 법정에서 맞붙게 됐다.

백세주 미주 총판권을 갖고 그동안 백세주를 수입, 배급, 판매해왔던 이곳 LA 현지 주류전문 수입업체인 KM 머천트가 한국 본사인 국순당과 국순당이 새로 미주 총판으로 내세운 백세주 USA를 상대로 지난 7월 22일 LA 지방법원에 민사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그동안 총판을 맡아온 KM 머천트는 당시 보유하고 있던 진로 총판권을 이용해 판로를 개척, 지난 95년부터 10년동안 미주에 백세주를 알리기 위해 시간과 돈을 투자했는데 결국 이용만 당하고 버림을 받았다는 주장이다.

반면 국순당측은 KM 머천트와 계약만료 후 계약조건의 변경을 제안했지만 아무런 답을 듣지 못해 부득이 하게 새로운 유통망을 만들었을 뿐이라는 주장과 함께 역시 법적으로 대응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와 관련 한인동포들의 반응은 "어려울 때는 손내밀고 세월 좋아지니까 헌신짝처럼 버리는 행위는 정말 얌체짓이다. 초기 투자에 인색한 본국 기업들이 투자의 위험을 감안해 LA현지 업체들을 통해 미 시장에 들어와 놓고 어느 정도 시장이 형성되면 본사 직영 형태의 지사설립으로 이익을 독점하려하는 것은 비윤리적 상행위라며"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에 본지는 이번 소송은 단순한 판매권 분쟁으로만 볼 수가 없고 LA에 거주하는 초기 개척자와 상품공급권을 가지고 있는 한국의 기업과의 전반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이를 거울로 삼아 다시는 이런 추한 분쟁이 없어야겠기에 자세한 내용을 취재 보도한다

<편집자주>


◎ 술도 세월 따라 변했다

경제규모가 커지고 국민소득이 증대됨에 따라 기호품인 술도 많이 변했다.

60년대엔 막걸리가 주종을 이루었다. 곳곳엔 대폿집이 있었고 어떤 집은 왕대포라하여 아주 큰 사발에 막걸리를 넘치게 담아주면 서민들은 그 술을 단숨에 다 마시곤 트림을 하여 배고픔과 술고픔을 한꺼번에 해결하기도 했다. 당시의 막걸리는 쌀로 빚었기 때문에 곡기가 있어서인지 충분히 끼니가 되었다. 그 후 쌀이 모자라자 박정희 정권은 쌀로 막걸리를 담그지 못하도록 금지조치를 내렸다. 따라서 막걸리는 옥수수나 밀로 만들어져 맛도 없어지고 인공감미료를 사용하여 마신 뒷날 머리가 아프기도 했다.

이 시절 가장 아쉬운 것은 부산 동래의 금정산 깊은 계곡에 위치한 '산성마을'이 없어진 것이다. '산성마을'은 막걸리만 전통적으로 담가오든 마을이었는데 누룩을 제조하지 못하게 하자 자연 밀주(密酒)를 만들어 생계를 이어나갔는데 김현옥 부산시장이 이들 부락 전체를 아예 쑥대밭으로 만들고 다 쫓아내고 말았다.

물론 이들에게 부산 시내의 기업에 취업알선을 해주긴 했지만 산 속에서 술을 빚고 살던 사람들이 도시생활을 적응할 수도 없었지만 전통기법으로 막걸리를 담던 솜씨와 명주(銘酒)가 없어진 것이다.

그 후 1977년 막걸리는 쌀의 풍작으로 다시 부활의 기회를 맞았지만 이미 입맛은 소주에 길들어져 있었다. 산업화 시대로 접어들면서 희석식 소주가 나왔고 지금도 소주업계의 대명사로 알려진 '진로'소주가 한 시대를 석권하였다.

이 때만해도 맥주는 귀한 술로 대접받았지만 얼마 후 통기타와 청바지와 생맥주로 청년문화가 태동하면서 맥주는 대중화되었다. 그러다가 다시 국산양주가 기세 높게 등장하여 베리나인 골드, 캡틴 큐 등이 나와 입맛을 상향조정하게 되었다. 수입양주도 애주가들이 선호하였는데 1979년 10.26 사건 당시 궁정동에서 박정희가 마시고 있던 술이 '시바스 리갈'이라고 하여 이 술도 한 시절을 풍미했다.

그 후 국민소득 1만 불을 상회하고 웰빙이 화두로 등장하는 시점에 술도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선두주자가 바로 국순당에서 제조한 '백세주'이다. 백세주(百歲酒)는 소주의 도수가 점차 낮아지고 독한 술 보다 순하고 맛이 부드러운 술을 선호하는 젊은층과 건강을 먼저 생각하는 장년층 모두에게 적당한 술이 되었다. 특히 외국 여행을 자주 하던 사람들은 외국의 와인에 입맛이 익어 더욱 좋아하게 되었고 소주보다는 고급이고 양주보다는 도수도 낮고 가격도 저렴하여 소비자의 기호에 맞아떨어진 것이다.

이렇게 백세주가 성공하자 각종 과실주가 나오기 시작했다. 복분자주, 산사춘, 머루주 등이 그런 유행에 따른 술들이다. 술 소비도 많이 늘었다. 60년대 1인당 1.7리터가 최근엔 약 8.5리터까지 된다고 하니 말이다.


◎ LA 술 소비도 많이 변했다

술도 음식이기 때문에 기존의 입맛을 바꾸기가 쉽지 않다. 한국에선 고급 양주를 그렇게 부러워하였지만 막상 미국에 도착하면 오히려 한국에서 먹던 술집 분위기와 한국 술이 더 그리워진다. 특히 한국음식인 갈비나 돼지 삼겹살, 빈대떡, 생선찌게 등을 먹는 경우 맥주도 어울리지 않고 양주도 그렇다. 작은 소주잔에 소주 한잔하며 '커∼'하던 생각이 절로 나곤 했다. 80년대 중반엔 이런 소비자의 심정을 이해하여 몇 몇 식당에선 선원들이 자신들이 마시기 위해 가져온 한국산 진로소주를 사들여 몰래 팔기도 했다. 일단 그런 식당은 한국의 진로소주가 있다는 평판으로 장사가 잘 된 것이다.

그러다가 KM 머천트에서 진로소주를 정식으로 수입하게 되어 동포들은 갈증을 풀게 되었다. 수입 초창기에는 이마저도 쉽진 않았다. 우선 일반식당에서 소주를 팔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미국은 주류 판매를 한국에서처럼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이 허가가 그렇게 쉽게 나오지 않는다.

주류 허가도 마켓 등에서 팔 수 있는 오프 세일과 식당에서 파는 온 세일이 있고 가벼운 음료의 대상인 '비어 앤 와인'과 아예 술집에서 파는 하드 리쿼 라이선스가 있는 것이다. 한국식당엔 대부분 하드 리쿼 라이선스가 없어 소주를 팔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랜 노력 끝에 결실을 보아 소주는 이제 '비어 앤 와인 라이선스'가 있으면 팔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도 KM 머천트의 노력과 로비가 절대적으로 작용하였다.


◎ 소주가 성공했으니 백세주도

진로소주가 성공하지 다른 소주들도 잇따라 들어왔지만 시장공략에 성공하지 못했다. 국순당은 이 때부터 KM 머천트와 제휴하여 미국진출을 시도한 것이다.

KM 머천트의 이건만 사장은 이번 사건에 대해 "저는 1995년부터 백세주를 팔기 위한 준비작업에 들어갔고, 97년부터 판매를 시작하였으며, 2000년도부터 겨우 손익분기점에 다달았습니다.

그동안 판촉비 등으로 초기 투자한 비용만도 수십만 달러에 이르지요. 국순당의 배중호 사장은 백세주를 미국 시장에 들여오기 위해 저에게 6개월에 무려 3번이나 찾아와 손을 부여잡고 부탁하곤 했습니다.

사실 그동안 계약서란 것도 없이 구두계약으로 신의성실의 원칙에 의한 비즈니스를 서로 해왔습니다. 한 달에 한 컨테이너만 팔면 계속 관계가 유지되는 그런 상태였지요. 그러다가 2000년도에 국순당에서 최정관 씨가 파견되어 나와 저희 사무실 한켠에서 함께 있었지요.

이때 처음으로 2001년부터 2003년까지 유효한 계약서가 작성되었고, 2004년도에 다시 1년 짜리 계약서가 날아왔어요. 그래서 파견 나와 있는 최정관 지사장에게 물었습니다. 그 때 최정관 지사장은 저한테 아무 걱정 할 것 없고 그저 형식적인 것이다. 국순당과 KM 머천트와의 계약은 변함이 없이 이어진다고 하기에 별 의심 없이 서명을 해서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KM 머천트 이 사장이 국순당을 정착시켜 놓았는데 누가 계약을 취소하겠습니까?' 라며 안심도 시키더군요. 그러다가 2004년 11월 23일 계약종료 통지가 날아온 것입니다.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11월에 계약 종료 편지를 보낸 다음 12월에 수입 L/C를 오픈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저는 L/C를 오픈하라고 했으니 계약종료는 없던 일로 넘어가는가 보다하고 12월에 L/C를 오픈하고 1월에 2차례 백세주를 수입하였습니다. 그런데 지난 4월에 미 서부를 제외한 동부와 하와이 총판권을 지사가 직접 운영하겠다며 재계약조건을 보내온 것입니다. 백세주는 판매 당시 진로와는 상당히 달랐습니다.

진로는 동포들이 기다렸던 술이고 백세주는 새로 시장을 창출한 것입니다. 그만큼 모든 정력을 쏟아부었고 경비도 많이 들어갔습니다.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는 일입니다"라며 또 다른 한인동포가 똑같은 피해를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끝까지 싸워나갈 뜻을 밝혔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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