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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도전 선생 (봉화정씨 시조편)
icon 파발마
icon 2008-12-27 16:3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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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 정씨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생활하라!! 전체공개|수정|삭제 기본카테고리|2008/05/12 06:45 http://blog.paran.com/jbg1219/25932223 ) 기본카테고리 전체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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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 정씨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생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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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러운 봉화정씨 시조 삼봉 정 도전선생 (봉화정씨 편)




곧은 품성과 예민한 선견지명의 통찰력을 소유한 학자풍의 선비

고려 말 조선 초 문신·학자·개국공신.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峰). 본관은 봉화(奉化).




형부상서 정운경(鄭云敬)의 아들이다. 어려서 경상북도 영주에서 살다가, 개경에 와서 이색(李檣)의 문하에서 수학, 정몽주·이숭인·이존오·김구용 등과 교유했는데, 이들 중에서도 특히 문장과 성리학에 뛰어났다. 1362년(공민왕 11) 진사가 되고 전교주부·태상박사 등을 지냈다. 1375년(우왕 1) 친원배명정책에 반대하다가 회진현(會津縣)에 귀양갔으나 1377년 풀려나서 학자들과 경학(經學)을 강의하다가 1383년 이성계(李成桂)의 휘하로 들어갔다. 1384년 정몽주(鄭夢周)의 서장관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와서 다음해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




1388년 위화도(威化島)회군으로 이성계 일파가 실권을 잡게 되자 조준(趙浚) 등과 함께 토지개혁을 건의하였으며, 1389년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하였다. 1392년(공양왕 4)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왕조를 개국하고, 개국1등공신이 되어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郎贊成事)·지경연예문춘추관사(知經筵藝文春秋館事) 등의 요직을 겸임하여 새나라의 문물제도와 국책의 대부분을 결정하였다.




1393년(태조 2) <문덕곡(文德曲)> <몽금척(蒙金尺)> <수보록> 등의 악사(樂詞)를 지어 이성계의 창업을 찬송하였다. 1394년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가 되어 재정 및 지방병권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였고, 같은 해 한양천도(漢陽遷都)를 계획, 실행하였다.




1395년 정총(鄭摠) 등과 함께 《고려국사(전37권)》을 편찬하였다. 1396년 표전문(表箋文) 문제로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이 정도전을 잡아 보내라고 하자, 이에 분개한 그는 랴오둥정벌[遼東征伐(요동정벌)]을 계획하고 군량미 확보·진법훈련(陣法訓鍊) 등을 행하던 중 1398년 제1차왕자의 난 때 이방원(李芳遠;太宗)에게 참수되었다.




그는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1394)》 《경제문감(經濟文鑑, 1395)》 《경제문감별집(經濟文鑑別集, 1397)》 등을 지어 경세론(經世論)을 제시했고, 《학자지남도(學者指南圖)》 《심문천답(心問天答, 1375)》 《심기리(心氣理, 1394)》 《불씨잡변(佛氏雜辨, 1398)》 등의 철학서를 저술하여 불교가 가지는 철학적 비합리성과 사회적 폐단을 지적, 비판하면서 성리학을 이론적으로 정립하여 유학의 발전을 기하고, 유교입국의 사상적 기초를 다졌다.




또한 많은 악사를 지어 <정동방곡(靖東方曲)> <납씨곡(納氏曲)> <신도가(新都歌)> 등을 남겼다. 시호는 문헌(文憲).




조선전기에 가장 뛰어난 경륜은 삼봉 정도전이다. 정도전이 세상에 태어날 당시 고려는 몽골족의 사나운 간섭정치에 나라가 어지러웠지만 정도전의 아버지인 정운경은 지조를 꿋꿋하게 지키면서 청렴결백한 관직생활을 했다. 고려사는 고려왕조의 청백리 다섯 명을 꼽고 있는데, 바로 정운경이 그 중의 한명으로 기술되고 있다. 그래서 정도전의 집안은 가난하고 정도전은 어린시절을 어렵게 보냈다. 정도전의 아버지는 세 아들의 이름을 청백리답게 도(道)를 전하고, 도를 간직하며 도를 회복하라는 뜻에서 도전(道傳), 도존(道存), 도복(道復)이라고 지었다.




정도전은 장성한 뒤 아버지의 친구이며 대유학자였던 이색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다. 이때 정도전은 정몽주, 이숭인 등과 동문이다.




정도전은 20세가 되던 해에 진사시에 급제하였으나 당시 임명되었던 그의 관직은 통례문이라는 벼슬이다. 통례문은 단지 조회때 예식을 맡아보는 한직이다. 벼슬을 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부친상을 당해서 낙향을 했고 3년간 상복을 입었다. 정도전은 이때 정몽주가 준 맹자를 정독하였다. 맹자는 덕을 잃은 군주는 그 신하가 역성혁명을 할 수 있다는, 그 당시로서는 아주 놀라운 주장이 담겨있는 책이다.




탈상 후 정도전은 정 4품의 지제교로 임명되어 공민왕과 우왕에게 대학을 강의하고 정치현안에 대한 의견을 개진하였다.




1375년, 날로 국세가 기울어 가던 원나라는 주원장이 세운 신흥 명나라를 협공하는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고려를 방문하고자 하였다. 그러자 정몽주와 정도전 그리고 이숭인과 권근 등 신진 유학자들이 들고 일어나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하지만 당시 실권자이며 친원파였던 이인임 일파는 그 의견들을 묵살하고 끝내 원나라 사신을 불러들였다. 이에 정도전 등은 아예 업무를 보지 않으면서까지 크게 반발하였다. 이인임은 당장 보복에 나서 주동자인 정몽주와 정도전을 따로따로 유배시켜 버렸다.




정도전이 유배된 곳은 멀리 전라도 나주의 회진현에 있는 천민부락이었다. 정도전은 그곳에서 3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다. 봉화정씨의 정치적 몰락 쇠퇴시기




고려 말 백성들에게 신진사대부였던 이성계를 부각시킨 전제(田制)개혁안을 만든 것도 그였다. 이성계의 막료에서 조선건국의 주역이 되고 통치법전인 조선경국전을 편찬하였다. 이는 조선의 개국이념이자 강령이며 정도전의 정치철학이기도 하였다.




여기에는 조선왕조의 합당성과 왕업의 지침을 명시하였으며, 전통적 관제에 따라 관할 사무를 분장하였으니 비로소 이(吏), 호(戶), 예(禮), 병(兵), 형(刑), 공(工)의 육조를 확정하게 되었다. 또한 한양천도의 기본계획은 물론 근정전, 경복궁, 교태전 등의 이름을 지어 왕권교체의 타당성을 부여하였다.




태조는 즉위 초 정도전에게 팔도사람을 평하라고 한 일이 있다. 정도전은 경기도는 경중미인(鏡中美人), 강원도는 암하노불(巖下老佛), 충청도는 청풍명월(淸風明月), 전라도는 풍전세류(風前細柳), 경상도는 송죽대절(松竹大節), 황해도는 춘파투석(春波投石), 평안도는 산림맹호(山林猛虎)이라고 평하였다. 비교적 좋은 말인 듯 하나 지역약점을 부각시킨 평가였다.




정도전은 이상하게도 태조의 출신지인 함경도에 대해서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태조는 아무런 말이라도 괜찮으니 해보라고 재촉했다. 정도전은 함경도는 "이전투구(泥田鬪狗)"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태조의 안색이 변했는데 이를 눈치 챈 정도전이 "그러하오나 함경도는 또한 석전경우(石田耕牛)입니다"라고 하자 낯빛을 고쳤다고 한다. 함경도 사람은 진창에 뒤엉켜 싸우는 개와 같은 면도 있지만, 자갈밭을 가는 소처럼 강인한 면도 있다는 말이다.




정도전이 지은 전각과 문루의 이름 중에서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종묘의 대문을 창엽문(蒼葉門)이라고 한 것이다. 한자는 표의문자로 글자를 풀어서 해석하는 경우가 많은데 창엽문의 창(蒼)자를 풀어보면 ++, 八, 君의 합자로 스물여덟 임금이라는 뜻이 된다. 또 엽(葉)자를 풀면 ++, 世, 十, 八로 이십팔 세(世)의 뜻이 된다.




조선왕조의 마지막 세자빈 이방자 여사의 위패가 봉안됨으로서 28위의 임금(왕위에는 오르지 않았지만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이은을 포함)으로, 28세로 조선왕조의 세계(世系)는 끝난 셈이다. 그렇다면 정도전은 6백여 년 전에 이를 예측하였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정도전은 뛰어난 식견에도 불구하고 태자책봉 문제로 천수를 누리지 못했다. 태조 5년 신덕왕후의 장례식이 끝나고 열흘 뒤 이방원은 입궐하여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다. 물론 태자를 도왔던 정도전, 남은, 심효생도 희생된다. 정도전이 어린 태자의 편에 섰던 이유는 태조가 아직 강건하고 굳세어 아무도 그의 뜻을 거역하지 못할 것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실학의 최고봉인 다산 정약용 또한 정치, 경제, 의학, 법률 등을 망라한 조선최고의 경륜이었다. 천주교에 잠시 입문한 죄 밖에 없는 그가 18년 동안 유배된 것은 뛰어난 재주 탓이었다. 명민한 임금 정조조차 탄복하였던 해박한 지식으로 인해 해배(解配)는 자꾸 늦춰졌다. 다산의 장점인 총명과 강직은 그의 앞길에 오히려 걸림돌이었던 셈이다.




정도전과 정약용이 없었다면 조선 5백년의 역사에서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우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처럼 경륜은 위아래와 시작과 끝을 아우르는 통찰의 힘이다. 일에 대한 전체적인 향방을 가늠하는 자(尺)인 것이다.




또 통찰의 힘은 현장이 요청하는 힘이다. 날마다 변화무쌍하게 돌아가는 현장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며 매순간 활로를 모색하는 바쁜 현장에서 가장 요구되는 것이 통찰의 힘이다. 특히 뭔가 결정하고 책임져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이번 대선에서 국민은 진보를 버리고 경제발전과 실용주의를 선택하였다. 대통령 주변에는 국민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높은 안목과 주민을 주인으로 섬기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그의 민본정치론은 정치하는 사람들과 피치자들에게 백성을 마치 물건처럼 마구 다루는 무식한 통치를 극복하게 하는 인식을 심어줌으로써 정치를 한 단계 더 높은 진보적 차원으로 끌어올린 의의를 갖지만, 당시는 인간에 대한 분명한 차별과 불평등이 정치ㆍ경제ㆍ문화적 차원에서 고착화되었던 시대였기 때문에 적용에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한계 속에서도 정도전은 유교 정치론에서 찾을 수 있는 최대한의 평등주의적 제도를 추구했고, 백성을 가장 편하고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정치를 추구했고, "의(義)를 위해 죽어야 할 땐 죽어야 한다."고 확신했던 정통 유학자였으며, 조선 제일급의 영웅호걸이었다.




정도전 선생처럼 정치철학을 가지고 소신있게 임하여 모든 주민이 근심 없이 삶을 살며 즐겁게 생업에 매진케 하려는 정치이념으로 무장해야 할 것이다.




자료정리자 : 정 도전 봉화정씨 시조의 24대 손/ 정 용선의 증손자/ 정병기




시조 (봉화정씨) 정 도전의 22대 손인 정용선 선생은 1886년생으로 항일독립운동을 하시다가 투옥되어 1928년 경성형무소에서 일생을 마치신 분이시지만 아직도 독립운동에 관한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호적에 일제 수형기록이 있다면 마땅히 정부는 그에 상응하는 조치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본다.

미발굴독립유공자 후손/정병기 (jbg1219) 2008-01-07 오전 8:13




http://www.uljintimes.co.kr/
2008-12-27 16:34:50
121.130.6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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