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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교훈 따라 평택을 사수하자!
icon 원효탄
icon 2006-03-22 00:5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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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교훈 따라 평택을 사수하자!!!

3월 8일 세계반전평화대회에서 미제의 악랄한 침략정책이 전 세계민중들의 항의에 심판을 받았다. 이로 인해 미제의 세계제패야망은 깊숙이 궁지에 빠져들어가고 있다. 미국경제 또한 하향 길을 가고 있음이 세계적 경제전문가에 의해 간헐적으로 이야기 되고 있다.

이와 맞물려 국내에선 평택미군기지확대반대라는 평택주민투쟁을 시작으로 하여 전 국민적 저항으로 발전하여가고 있다. 바야흐로 지난 100년간 억눌려 온 우리 민중이 갑오농민군, 항일의병, 만주 항일무장투쟁의 전통을 새롭게 가다듬고 외세의 만행에 항거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모든 것은 스스로 풀어가야 한다는 천부경 원리의 요구이며, 민중을 하늘같이 모셔야 한다는 신선도의 가르침이니 조상님들이 이어 온 [홍익사상]으로 신자유주의의 만행에 대항해 싸워나감은 승리를 이미 잉태한 것이다.
때문에 민족·민중진영은 바위 같은 승리의 확신을 갖고 국민들에게 이러한 원리를 옳게 풀어 알리며, 실천을 통해 스스로 함께 하게 하여 미군기지확대반대투쟁과 아울러 미군완전철수투쟁을 승리로 점철해 나가야 한다.

이러한 과제를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풀어가는데 우리 조상님들이 싸워온 흔적을 살펴보고 그것에서 오늘의 사회문제를 풀어가는 지혜를 찾아보기 위한 마음에서 몇 자 생각되는 것을 적어 본다.

1. 정부군, 민족자주 그리고·민중
나라의 주권이 외세의 손에 얽매여 있으면 나라의 자주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박해를 양면에서 받게 된다. 그런 예를 우리 역사 속에서 찾아보고 오늘의 어려움을 풀어가는데 지혜를 모아 볼 필요가 있다.

가. 고려시대
먼저 고려시대에서부터 알아보자.
고려 조정은 몽골의 침입으로 도읍을 강화도로 피난 가고, 백성들은 몽골 침략자들에 항전을 하던 단기 3565년(서기 1232년), 고려 고종 19년, 몽골은 두 번째로 침입해 왔다. 그러나 고려군의 항전에 의해 처인성(處仁城)(오늘의 용인,龍仁)전투에서 살리타이(撒禮塔)가 사살되자 철수하고 말았다.
그 이후 몽골은 계속 고려를 침입, 1236년에는 평택과 용인까지 침입했으나 민중들은 이에 맞서 끝까지 항전하였다. 그 동안 집권층은 육지의 백성들에 대한 가혹한 징세를 받으며 피난지인 강화도 임시수도에서 호사스런 생활을 하며 특권유지에만 급급하였다. 따라서 일반백성들은 집권층의 수탈과 외적의 침입이라는 이중적 고통과 시련을 당하면서도 항전의 주체가 되어 나라를 지키기 위한 힘겹고 피나는 싸움을 계속했다. 특히 농민들과 천민들의 항쟁은 눈물겨운 것이었다.
그런 과정에 고종 45년(단기 3591년, 서기 1258년) 강화에서 정변이 일어났다. 무신정권에 불만을 갖고 있던 김인준(金仁俊), 유경(柳儆) 일파가 최의(崔誼)를 죽이고 최씨 무신정권을 엎었다. 이를 계기로 왕권이 복권되어 국왕의 지위가 회복되었다. 고종의 뒤를 이은 원종은 몽골과 굴욕적인 강화를 체결하여 오랜 전쟁의 막을 내렸다. 그러나 개경환도를 놓고 조정에서는 찬반으로 의견이 갈리어 피비린내 나는 암투가 있었다. 결국 개경환도파가 실권을 잡게 되면서 무신정권이 완전히 종식되었고, 고려는 몽골의 지배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최우(崔瑀)가 설치한 이래 무신정권의 무력기반이었던 삼별초군이 몽골의 침략과 왕실조정의 굴욕적인 태도에 반대하여 나섰다. 삼별초군은 몽골군에 대한 지속적 항전을 유리하게 펴기 위하여 근거지를 강화도에서 진도로 옮기었다. 그리고 남부지방의 항몽농민군(抗蒙農民軍)을 규합하여 크게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몽골군과 고려조정의 관군이 연합하여 대군으로 공격해 옴으로 배중손(裵仲孫)의 삼별초군은 진도에서 큰 타격을 입고 제주도로 진지를 옮기어 안팎으로 두 성을 쌓고 항전을 계속했다. 그러나 결국 삼별초군은 김방경(金方慶)이 이끄는 여몽연합군(麗蒙聯合軍)에 진압됨으로써 4년간에 걸친 민족자주권을 지키려던 항쟁은 끝나게 되었다. 이 때가 원종 14년, 단기 3606년(서기 1273년), 지금으로부터 733년 전이었다.
이처럼 삼별초군의 항쟁은 농민군으로부터 적극적인 협력과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고려조정의 관군은 몽골에 굴복하여 민족자주권을 지키려는 자기 백성을 공격하는 반민족행위를 하였다.
삼별초군은 끝까지 항쟁하여 나라를 보위하고 민족자주권을 지키려는 우리 민족의 의지를 실천으로 보여준 예이다.
이 시대에도 지배층 남성들이 나라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여 여자가 굴욕의 삶을 살아야 했으니 원나라로 여자를 뽑아 올려야 하는 민족적 수모를 당했던 것이다.
그 외에 군사면에서 일본정벌을 위한 전방지휘사령부로서 몽골의 정동행성(征東行省)이 우리땅에 몽골의 강요에 의해 설치되었는데 이는 2차 일본정벌이 있기 한 해 전인 단기 3613년(서기 1280년)이었다.

나. 이조시대
다음은 이조시대의 예를 들어보자.
단기 4237년(서기 1894년) 2월 15일 고부에서 시작한 농민전쟁은 전주를 함락하고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민중에 의한 행정기구로서 집강소를 설치하고 아래로부터의 개혁을 실행하고 있었다. 이 때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동양침략이라는 긴박한 국제정세 속에서 일제가 침략을 해 오리라는 것을 간파한 농민군 지도층은 나라의 자주권과 겨레의 안위를 위해 “보국안민”, “척양척왜”의 깃발을 내걸고 이조 정부에 힘을 합해 외세의 침입을 막아내자고 제안했다. 이는 민중이 자기 힘으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지배층에게 제안한 우리 역사상 첫 민족통일전선제안이었다. 그 결과 “전주화약”이 맺어졌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일제의 총칼 앞에 무력했던 지배층은 일제와 손을 잡고 민족자주세력인 농민군을 적으로 몰아 소탕전을 벌렸다. 8월 1일 일제 침략군은 우리 나라에 들어와 있던 청군에 선전포고를 하고 청일전쟁을 우리 강토에서 자행하여 청을 우리 나라에서 물러가게 한 후 이조 관군과 합류하여 갑오농민군에게 대규모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러한 조정의 이중적이고 매국배족행위에 분노한 농민군 지도층은 각지방에 창의문을 보냈다. 그 후 삼례에 다시 집결하여 동학남북 접(接)이 토론한 결과 침략세력과 무장으로 싸울 것이 결정되자 전주에서 서울로 진격할 것을 확정하였다.
1894년 10원 16일 논산에 집결한 농민군을 주력으로 전국에서 집결한 농민군 약 10만 명은 공주를 향해 진군하였다. 일제침략군과 민족을 배반한 이조 정부군은 공주를 중심으로 포진을 완료하고 서울로 진군하는 농민군을 대기하고 있었다. 10월 22일부터 11월 10일까지 농민군은 적들과 맞서 우금치(牛金歭)에서 4~50차례에 걸쳐 피나는 공방전을 치르며 격렬하게 싸웠다. 그러나 농민군은 아쉽게도 근대적 화력으로 무장된 적을 제압하지 못하고 말았다. 이 후 농민군은 각지에서 산발적으로 계속 항전하였으나 집강소 활동시기에 수모를 당했던 향촌의 부패한 양반과 이속(吏屬) 그리고 상당수의 부자들이 조직한 민보군(民保軍)에 의하여 철저히 좌절 당했다.

군사면에 있어서 이조 후기엔 일제에게 대륙침략을 위한 발판으로 용산에 조선주둔군자리를 만들어 주었으며, 오늘날 대한민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중국을 견제/정벌하겠다는 미제의 새 아시아 전략에 따라 용산미군기지를 옮겨 평택 옥토를 미군기지로 확장하고자 하는 것이다.

2. 역사의 교훈
지배층에게는 나라의 자주권이나 민중들의 생존권보다는 자기들의 호사스런 생활유지가 우선이며, 자기들의 이권을 약속하는 외세가 더 중요하게 되는 것이다. 이 자체가 그들에게는 정통성의 근본이다.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외세에 목덜미를 잡힌 지배층으로 구성된 정부는 구조적으로 어쩔 수 없이 백성의 의사를 저버리고 외세의 요구에 순종하는 수 밖에 없다.
고려 때와 이조 때는 전시작전권이라도 정부가 갖고 있었던 것같다. 그런 조건에서도 외세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지금 우리 정부는 어떤 처지에 있는가? 전시작전권도 아직 찾지 못한 처지에서 전략적 유연성까지 합의한 상황이다.
마치 ‘통일시대’를 자주적으로 열어가는 것처럼 국민들에게 떠들썩 하게 선전하며 겨우 한 것이 있다면 ‘남북경제협력’이라는 명색아래 중소기업 몇 개 들어가서 생산하는 개성공단정도다. 그것도 남과 북이 합작으로 열어 놓은 것이 아닌가.
개성공단이 통일분위기조성에 미친 영향은 크다. 그리고 이를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미제의 허락이 없으면 그곳에서 생산된 생산품의 판로가 걱정이 된다니 국가의 주권이 국민의 삶에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예라하겠다.
민족전체의 차원에서 본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한 것이다. 이러한 처지에서 통일의 상대방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목 조르는 한미공동군사훈련을 한다는 것은 고려 때나 이조 때의 정부와 다름이 없음을 노골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오늘과 같이 온 세상을 미제가 좌지우지 하는 신자유주의 세계질서 속에서는 자주권수호도, 민족 해방운동도, 인권주장도, 민중생존권투쟁도 모두 불법이고 테러일로 일컬어지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이고 현실적이며 객관적인 상황을 염두에 둘 때 민족·민중진영은 대대로 민족정기를 지키고, 민족의 자주권과 존엄을 위해 싸워 온 민중의 피 어린 투쟁사 속에서 큰 지혜를 묶어 내고, 그를 바탕으로 하여 오늘의 긴박한 사회문제를 조직적으로 풀어가는 과정을 -비생산적인 논쟁을 극복하고- 실천을 통해 국민들에게 보여줘야 한다.

때문에 민족·민중진영은 민족자주사상으로 통일단결하여 1) 정부가 잘못된 정책을 펴야 하는 이중적 성격을 옳게 밝히고, 2) 무엇이 민족과 민중에 복무하는 것인가를 실천으로 분명히 보여야 하며, 3) 온 국민과 머리와 마음으로 하나가 되어 평택(平澤)을 이름 그대로 평화를 택한 땅이 되게 사수해야 한다. 평택사수는 민족·민중진영에게 우리의 단군님들이 내려주신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이제 평택은 대한민국에 위치한 좁은 공간으로서의 평택이 아니다. 세계를 제패하려는 미제의 신자유주의를 무너뜨리는 세계민중투쟁의 중요한 최 전방의 하나가 되어었다. 불의와 싸우는 이것이 세계 민중들이 살아가는 보편적 진리이고, 이것이 평택수호투쟁이 갖는 세계사적 의미이다.

오직 이러한 역사인식하에서 신중하고 무게 있는 실천으로서만 겨레와 조국을 전쟁의 참화로부터 구하고, 동북아의 균형자로서 우뚝 서게되는 것이며, 나아가 개천이래 만대를 이어 온 모든 인간에게 크게 이롭게 한다는 [홍익사상]으로 미제의 신자유주의를 타도하여 정의의 세기를 열어 세계 인류평화에도 기여하게 되는 것이다.

2006년 3월 20일
원효탄


★★★ 민족정기를 되살리기 위한 [민족정기구현회] 인터넷 홈페이지소개:
www.koreakjh.com
민족의 앞날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많은 방문을 기대합니다.

★★★ 겨레의 기둥 얼을 되세우는 데 권하고 싶은 책 소개:
1. 권태훈 옹저: 천부경의 비밀과 백두산족문화, 정신세계사, 서울, 4322(1989)년
2. 안창범: 우리 민족의 고유사상, 제 정신차리기 시민운동준비모임, 개천 5894년(1997)
3. 박기문: 백이, 정신세계사, 서울, 4325(1992)년
4. 고준환: 하나되는 한국사, 범우사, 서울, 1992(4325)년
2006-03-22 00:5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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