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김정일
icon 제거민족의원수
icon 2005-12-04 10: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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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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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쟁이 국가가 되어 남자 군인의 키가 평균 162cm밖에 안 된단다. 군화는 평균 250mm라고 한다. 이 지구상에서 청년들이 아버지 세대보다 키가 작은 유일한 나라라고 한다.

두만강에는 탈출하다가 죽은 시체가 둥둥 떠다닌다. 이것을 한국의 TV에서 직접 찍어서 전국에 수십 번 방영했다. 한창 재롱을 떨고 장난치며 뛰어 놀 아이들마저 학교도 못 가고 꽃제비가 되어 만주 벌판에서 도둑고양이처럼 살고 있는 것도 한국 TV에서 다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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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 173 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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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참신한 인상을 주었다. 그들은 중국인·일본인과 닮지 않은 반면에 그 두 민족보다 훨씬 잘 생겼다. 한국인의 체격은 일본인보다 훨씬 좋다.…성인 남자의 평균 신장은 163.4c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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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숍 여사의 글이 100년 전에 쓰인 것을 감안하면, 한국 남성의 평균 키는 100년 동안 약 10cm 증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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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최근 북한의 군입대 허용 키가 1m 45cm까지 내려갔다며, 북한의 군대는 육체적, 기술적, 사상적으로 허물어져 가고 있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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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의 서기의 한 사람은 술에 취하여 자기 부인에게 김정일의 난잡한 생활에 대하여 비밀을 누설한 일이 있었다. 양심적이며 문화수준이 높은 서기의 부인은 깜짝 놀라 한나라의 지도자의 생활이 그토록 어지러워서야 어떻게 인민의 행복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하고 고민하던 끝에 김일성이 김정일을 훈계하도록 할 생각으로 김일성에게 편지를 올렸다.

그러나 물론 그의 편지는 김일성이 아니라 김정일의 수중에 들어갔다. 김정일은 자기 서기의 부인을 체포하여 술파티에 끌어오게 한 다음 모든 술파티성원들이 보는데서 서기의 부인을 <반역자>라고 선포하고 총살하도록 하였다. 그는 술파티의 비밀이 나가면 총살한다는 것을 모든 술파티성원들에게 보여 주려고 하였던 것이다. 서기는 자기 부인을 자기 손으로 총살하도록 김정일에게 애걸하였다. 김정일은 서기의 청을 들어주어 그에게 무기를 주어 자기 부인을 총살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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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조는 성적인 유희를 담당하는 만족조, 마사지를 전문으로 하는 행복조, 춤과 노래에 정통한 가무조 등 3가지로 나뉘어 있는데 이번 폭로에서는 성적인 유희를 담당하는 '만족조'의 훈련과정에 대해 다뤘다.

▲술 접대할 때의 복장과 매너 ▲옷 벗기기 ▲관계 후 목욕 시키기 ▲키스하기 ▲오럴섹스 ▲복수 섹스 ▲피임 등 항목별로 나눠 훈련 방법을 세밀하게 소개했다.

김씨의 증언에 따르면 남성을 접대할 때 스타킹 착용은 절대 금물이다. 항상 팬티와 브래지어만 착용하고 그 위에 전통 의상 등을 걸친 채 시중을 든다. ........................

가장 치욕적인 오럴섹스도 실습을 통해 연마한다. 기본적인 테크닉은 물론 오럴섹스할 때의 손과 발의 위치까지 정확하게 훈련을 받는다. 남성 1인, 여성 2인의 복수 섹스 역시 둘의 역할분담에 관한 훈련이 집중적으로 이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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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자상어날개탕(야자열매 속을 파고 상어지느러미 수프로 채운 것), 뱀장어 캐비어,
코야(새끼돼지 통구이), 물고기 용정차(중국산 고급녹차)풍 철판구이, 비둘기 간장찜,
염소고기 샤슬리크(러시아식 바비큐), 라클레트(프랑스산 치즈를 가지와 감자 위에
얹은 것), 자라 찜….

일반인들이라면 들어본 적도 없을 산해진미(山海珍味)로 가득한 이 식단은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저녁식사 차림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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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을 하다 보니 재료는 전세계에서 수입했다. 후지모토씨는 “중국
신장(新疆)성으로부터 멜론과 포도, 태국과 말레이시아로부터 두리안·파파야·
망고 등 열대과일, 체코에서 생맥주, 덴마크에서 돼지고기, 이란과 우즈베키스탄에서
캐비어(철갑상어알), 일본에서 어류를 수입했다”고 회고했다.

한국에서도 한때 화제가 됐던 주석궁의 고급 술에 대해서도 그는 “주석궁에는
1만병의 술을 모아놓은 술 창고가 있다”고 밝혔다. 1990년대 초반에도 위스키,
코냑을 비롯, 일본 청주까지 망라된 술 창고가 있었는데, 김정일 위원장이 즐겨
마시는 술은 위스키로는 ‘조니워커 스윙’, 코냑은 ‘헤네시XO’였다고 그는 전했다.

그러나, 후지모토씨는 이 화려한 식단도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차림표에는 그날의 주 메뉴만 실릴 뿐이고, 실제 식탁에는 ‘반찬’으로 고기와
생선도 나오고 반찬의 양도 많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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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극심한 식량난을 겪고 있던 1993년에
김정일 가족이 유럽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기내에서 먹을 도시락 준비를 위해

모스크바까지 날아가 도시락을 만들었다.

과일사러 싱가포르에,

철갑상어알을 사러 러시아와 이란에,

그리고 요리 재료 구입을 위해 중국, 유럽, 일본 등지를 돌아다니게 한다.

김정일의 전속요리사였던 후지모토씨가 2001년 4월 중순
북한을 탈출하기 위해
일본으로 성게알 요리 재료를 사러 나갈 때는 김정일이 1만5000달러를 주었다고 한다.

해외에서 요리 재료를 사러 갈 때 재료비가 200만~300만 엔 정도 된다한다.

일본의 직장인들이 매달 30만엔 정도 받는다고 할 때
그 열배정도니....

1991년 다랑어를 사올 때는 400만 엔을 들인 적도 있다 한다.

북한주민들과 어린 아이들이 다 죽어가고 있는 마당에.....
돼지 만도 못한 사악한 지도자 같지 않은 지도자.....
해외에서나 한국에서 보낸 쌀들은 다 군량미로 축적해 놓고....
악독한 독재자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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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희는 만수대 예술단원 시절인 1974년 김정일의 눈에 띄었다.
김정일은 자신의 별장 중 하나인 창광산 관저에 고영희를 들어 앉혔다.

김정일이 고영희를 사귈 무렵, 김정일 관저에 살았던 처는 영화배우
출신 성혜림이다.

미모의 성혜림은 1960년대 후반 북한 청년들의 우상이었다.
성혜림은 작가 이기영의 장남과 혼인한 유뷰녀였다.

유뷰녀 성혜림을 지 부인으로 공사주의식 사고로 처로 만들어 버리는
사이비 교주 김정일은 도대체 어떤 인간인가?

성혜림은 1971년 김정일과의 사이에 아들 김정남을 낳았다.
하지만 김정일이 고영희를 총애하면서
신경쇠약 증세가 악화돼 1974년 부터 병치료를 한다면서 언니 성혜랑 식구들과
함께 모스크바에 나가 살았다.

성혜림은 언니 성혜랑이 1996년 모스크바를 탈출 , 서방으로 망명할 때
스위스까지 따라갔으나 그 후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모스크바로 되돌아 갔다.
모스크바를 탈출한 성혜랑은 프랑스 정보 기관의 보호 속에 있으며,
성헤림은 작년 7월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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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의 소생들은 모두 몇 명인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서른세 살인 김정남이 장남이고, 그 아래로 10여명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거의가 스위스,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지에서 유학중이라고 한다.
이들은 현지에서 별장 스타일의 호화 주택을 구입해서
살고 있는데 어머니가 다른 관계로 떨어져 산다.

김정일 일가의 행동 반경은 비공산권 국가의 비자금이 많이 투자된 나라로
한정되어 있다.

이 나라들의 정보기관과 금융기관이 뒤를 보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성혜림의 소생 김정남은 1980년 스위스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김정일은 김정남을 위해 제네바 교외 레만 호숫가의 고급주택가에 있는
빌라 한채를 구입했다.

대지 2500평에 건평이 500평쯤 되는 단독주택이었다.

1980년 당시 200만 달러를 주고 구입했다고 한다.

이 빌라에는 김정남의 수행원과 경호원, 전속 요리사,
그리고 정남이를 보살피는 아주머니 두 명이 거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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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4월 중순쯤이면 정남이의 생일선물을 사러 선물구매단이 출발한다. 金日成(김일성) 父子(부자)의 집무실 및 공관에서 쓰는 모든 물품을 조달하는 호위사령부 2국9부 부부장 강상춘 상좌가 구매 책임자다. 강부부장은 일본을 시발로 홍콩 싱가포르를 거쳐 독일과 오스트리아까지 들러온다. 선물은 해마다 100만 달러어치를 사온다. 이 금액은 강부부장에게서 직접 들은 액수다.

생일선물에는 정남이의 옷이나 신발류 등은 물론, 새롭게 등장한 모든 놀이기구가 포함된다. 특히 아이들의 관심을 끄는 전자오락 기구는 값의 고하에 관계없이 모두 다 구입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선물에는 다이아몬드가 박힌 시계가 있고, 도금한 장난감 권총도 있다.각종 놀이기구와 장난감은 나이 먹은 내가 봐도 현란할 정도였다. 정남이 놀이방(오락실)은 규모가 300평쯤 된다. 오락실은 매년 생일을 기준으로 완전히 새롭게 바뀐다.

선물이 도착하면 5월9일경 진열된다. 이튿날까지 안 보여준다. 정남이는 5월10일 원수복을 입고 명예위병대를 사열한 뒤 김정일의 손을 잡고 오락실에 들어간다. 오락실에 들어가서 선물을 둘러보는데 金正日은 대충 돌아보지만 정남이는 하나하나 만져보고 움직여본다.

정남이의 생일 5월10일이 되면 관저의 모든 관리원들과 근무자들에게 정남이 이름으로 선물을 하사한다. 조그만 트렁크에 인삼주나 각종 통조림, 양복지 한 벌, 고급 인삼비누 등을 넣어준다. 이 하사품은 생일 선물 비용 100만 달러와는 상관없이 아버지 金正日이 따로 준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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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남이 누구인가. 김정남은 북한 주민들이 그 존재 자체를 ‘알면 안 되는’ 김정일의 숨겨진 사생아일 뿐이다. 김정남은 젊은 시절의 김정일이 멀쩡히 잘살고 있는 유부녀를 가로채 몰래 데리고 살다 낳은 아들이다. 김일성마저도 처음에는 그 사실을 전혀 몰랐다는 것이 통설이다.

이 비운의 유부녀는 모스크바에서 홀로 쓸쓸히 살다 지난해 사망한, 왕년의 명배우 성혜림이다. 김정일은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가 다른 사람의 부인을, 그것도 전 북한인민의 사랑을 독차지한 명배우 성혜림을 가로채 자기 관저에 숨겨놓고 산다는 사실이 알려질까봐 이 일을 극비에 부쳤다. 또 소문을 발설하는 자는 가차없이 제거했다. 성혜림의 언니 성혜랑은 성혜림이 김정일 관저에 들어갈 때 따라 들어간 인물. 그녀는 1994년 서방탈출 후 관저에서의 ‘비밀생활’을 수기 ‘등나무집’에 이렇게 묘사했다.


“김정일 비서와 내 동생이 함께 산다는 것은 북조선 최대의 극비사건으로 간주되었다. 나의 아버지(성유경)에게도 말씀드리지 않았다. 아버지에게는 처음 혜림이 ‘3호 청사’(대남정보공작기구) 공작원으로 뽑혀갔다고 말했다. 이런 거북한 사정 때문에 어머니는 6년 동안 관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설마 그런 일이 한 가정에서 어떻게 지속되었는지 의문시 할 수 있으나 온 사방에서 보위원이 우리 식구들의 언행을 탐지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입을 다물고 살 수밖에 없었다.


명배우 성혜림이 잠적한 데 대해 유언비어가 돌았고 문화예술계, 특히 촬영소 주변에서는 지도자가 채어가 데리고 살고 있다는 소문이 속살속살 퍼졌다. 가계(수령과 지도자의 직계)에 대한 여론을 엄단하던 보위부와 당 조직에서 아무리 강권을 써도 사람들은 말하고 싶어하는 동물이다. 촬영소에서도 나의 직장에서도 사람들이 말질을 하다가 없어지는 수가 있었다.”

이 무렵 이른바 ‘남반부 출신’ 영화배우들이 숱하게 숙청됐다. 성혜림이 남한 출신이어서 성혜림과 김정일의 동거 소문이 남한 출신 영화배우들 사이에서 먼저 퍼져나갔고, 이 때문에 애꿎게도 남한출신 배우들이 처형되거나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것이다. 남한 출신 명배우 심영도 이 무렵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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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사상을 우선시하면서 경제에는 관심을 돌리지 않은 결과 인민생활이 급격히 하락하자 주민들 속에 외국물신숭배열이 걷잡을 수 없이 일었다. 그것은 극단적 일제잔재청산의 반작용 효과에 국내각지로 투입된 ‘부유한 북송동포’의 시각적 효과까지 겹쳐져 일본숭배주의로 곧 연결되었다.

그의 가장 모범적인 사례가 김정일이었다. 그는 김일성이 결혼시켜준 국내인 김영숙에게 애초부터 흥미가 없었다. 한국에서 엘리트교육을 받은 성혜림에게는 현대미가 있었다. 그녀도 일본에서 일찍부터 자본주의 교육을 받은 일본출신 고영희에 비하면 또 아니었다. 결국 김정일의 마지막 아내역할을 해 준 여성은 북한이 계급적 성격상 허용할 수 없는 적대국출신 여성이었다. 북한에서 일반인은 북송동포출신 여성을 아내로 삼는 경우 기자직조차 허용해주지 않아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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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국토 전역에 3만 5000개에 달하는 동상, 석고상, 대리석상들을
세워놓고 주민들로 하여금 그 앞에
머리숙여 배례케 하고 있다.

또한 김일성을 전설적 인물로 우상화하기위해
혁명 전적지, 혁명사적지, 혁명사적물, 혁명박물관,혁명사상연구실,
기념비, 헌시비 등을 세워놓고 주민들을
교육시키고 있다.

이와같은 김일성의 신격화는 지금 김정일에게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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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김정일 체제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가?



"북한주민들의 김정일에 대한 반감은 매우 높다. 반란이 가끔 발생하지만 발각 즉시 제거되고 만다. 청진 6군단 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관련자 모두 처형되었으며 부대도 해산되었다. 체제유지를 위한 철저한 감시가 이루어 지고 정치범으로 걸리면 즉시 수용소로 보내지거나 처형된다. 북한에서 김정일 체제에 반대한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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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본인도 감시와 통제에 대해서는 자랑하듯 인정했다. 김정일은 80년대 중반 자신의 요리사인 후지모토 겐지씨에게 “우리 공화국에는 사람들이 쫙 깔려 있어도 100중 두 명은 감시자들이야. 걱정 마”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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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日成 사망 후 金正日이 평소에 예견했던 대로 이복동생 김평일이 「넘어야 할 산」으로 접근했다. 黨 정치국 일부에서는 후계자로 성격이 표독하고 오만불손한 金正日보다는 인간성도 원만하고 외모도 준수한 김평일을 옹립하자는 주장이 있었고, 특히 중앙당에서 金正日 거부 분위기가 싹트기 시작하자 그런 바람을 적극적으로 차단한 사람이 金容淳이다. 金正日은 당황하여 재빨리 군부와 손을 잡고 黨의 세력을 제압할 만한 先軍정치의 구도를 시작했다. 金日成 사망 후 金正日과 金容淳이 밀착된 이유도 이 때문이다.


金正日, 교통사고로 南一 부총리 암살

1954년生인 이복동생 김평일은 아버지를 닮아서 미남이고 준수하며 성품도 원만하고 숙부 金英柱(김영주)를 비롯하여 혁명 1세대 원로들의 호감을 샀으며 심심치 않게 권력후계자로 거론되었다. 그들은 김평일을 보면 金日成의 젊었을 때를 보는 것 같다고 아주 좋아했다.

김평일이 평양 남산고급중학교(고등학교)에 다닐 때 그의 성적은 같은 학교 출신인 형 金正日보다 도덕, 일반 학과, 예술, 체육 등 모든 면에서 월등하게 높았다. 그래서 그 학교 졸업생들과 교사들은 언제나 김평일을 金正日보다 높이 평가하고 金日成 후계자로 믿고 있었다.

이 사실을 감지한 金正日은 남산학교의 모든 학사기록을 소멸하기 위해 하수인을 시켜서 그 학교를 폭파한 일은 너무나 유명한 얘기다. 金正日이 후계자로 黨의 공식 인정을 받은 이후에도 계모 김성애와 이복동생 김평일, 김영일, 김경진을 「곁가지」라고 하며 철저히 고립시키고 국내에서의 권력기반 구축 기회를 차단하기 위해 늘 해외로 내몰았다.

김평일은 현재 駐폴란드 대사로 있으면서 숨을 죽이고 보이지 않는 많은 눈의 감시를 받으며 살고 있다. 金正日의 살생부 첫 페이지에는 南一과 오진우도 끼어 있었다. 南一은 金日成보다 두 살 아래인 1914년생으로 타슈켄트 사범대를 나와 소련군 장교로 임관되고 1942년에는 육군 대위가 되었다.

1945년에 스탈린의 밀명을 받고 金日成을 돕기 위해 평양에 왔다. 건국 초기에 외무상을 지냈고 1953년 휴전협정에서 인민군 대장으로 북한 측을 대표하여 휴전협정에 조인한 사람이다. 그는 그 후 黨 정치국 위원, 부수상 등 요직을 거쳐 1972년에는 부총리 겸 경공업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그도 金正日의 권력승계를 강력히 반대한 사람 중의 하나였으나 그가 소련의 시민권자인 이중 국적 때문에 모스크바를 인식하여 함부로 다룰 수 없었다.

1976년 3월 초 南一 부총리가 평남 안주에 있는 석유화학공장 건설을 시찰하기 위하여 갔을 때 그 시골 비포장도로 좁은 길에 공장건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대형 트럭이 갑자기 나타나 南一이 탄 승용차를 받아 南一이 卽死(즉사), 1976년 3월7일 노동신문에 「남일 부총리 뜻밖의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짧은 기사를 남기고 金正日의 살생부에서 그의 이름이 지워졌다.

이 사건 바로 직후 金正日은 당시 절대추종자의 한 사람인 인민군 총정치국장 이용무 대장에게 지시하여 인민무력부 총참모장 오진우를 감시하며 비리를 적발하여 『南一과 같은 운명을 맞게 하자』고 했다. 金正日이 오진우를 특별히 경계한 이유는 그가 아버지 金日成의 신임을 받는 혁명 1세대 중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며, 자신을 늘 어린애 취급했기 때문에 항상 자기 앞에 「거대한 장애물」로 여겼다.

더욱 그를 불안하게 한 것은 오진우가 김성애와 그녀의 동생 김성갑과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그를 김평일의 강력한 배경으로 생각한 것이다.


오진우 제거를 위해 여러 차례 압박


金正日은 아버지의 이미지를 존중해야 하므로 혁명 1세대를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없어 고민했다. 1976년 5월 오진우가 인민무력부장으로 승진하자 金正日은 이용무를 앞세워 오진우 압박공작을 서둘렀다.

이용무는 총정치국장의 권한으로 全軍의 막사와 사무실에 金日成 사진 바로 옆에 金正日의 사진을 걸게 하였고, 金正日 관계 출판물을 대대적으로 보급해 全軍이 학습하게 했다. 그 功(공)으로 이용무는 1974년 6월에 당 정치국 위원이 되었다. 기고만장한 이용무가 군부 내에서 월권 행동을 많이 하자 오진우의 진언으로 金日成이 그를 해직했다. 바로 후에 金正日은 또 박충국을 인민무력부 부부장으로 밀어 넣었다. 박충국은 金正日과 張性澤의 술친구였다. 박충국은 오진우 집무실에 도청장치를 했다가 발각되어 해직되었으나 곧 쿠바 특명전권대사로 나갔다.

오진우와의 싸움은 만만치 않았다. 1976년 6월 黨 정치위원회에서 혁명 1세대들이 金正日의 정책을 공개비판했고 黨의 질서와 규율을 파괴하고 자신들을 일선에서 퇴진시키려는 그의 공략을 비판했다. 이때 비판을 주도한 김동규는 결국 정치범 수용소에 갔고, 金正日은 자기의 권력기반 구축작업을 계속했다.

그는 자기를 추종하는 젊은 세대에서 60만 명을 새로 입당시켰다. 그는 1979년에 오진우의 동의 없이 48세의 젊은 오극렬을 인민군 총참모장의 자리에 앉혔다. 오극렬은 金正日의 만경대 혁명유자녀학원 동기이며 혁명 2세대를 대표하는 군인이다. 그는 공군 출신으로 소련 공군대학을 우등생으로 졸업했고, 영어·러시아어·중국어에 능하며 탁월한 군사이론가이기도 하다. 그는 매사를 상관인 오진우보다 金正日에게 먼저 보고했다. 그래서 金正日과 오진우 사이의 갈등은 날이 갈수록 심했다.


오진우 교통사고로 장기간 외국에서 치료


金正日은 오진우와의 싸움에서 전략을 바꿨다. 『머지 않아 오극렬이 오진우를 밀어내고 인민무력부장이 될 것』이란 풍문을 군부 내에 유포시켜 오진우로 하여금 극도로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하루는 그가 퇴근해 집에 와 보니까 부인이 반갑게 맞이하며 마당에 전에 없던 차 두 대를 보여 주었다. 광택이 번쩍번쩍 나는 미제 포드와 독일제 벤츠 450이었다.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께서 불철주야 수고하시는 당신을 위로하기 위해 보내 주신 선물입니다』

너무나 놀라운 일이었다. 그 후에 金正日은 오진우에게 호화주택을 지어 주었고 기쁨조 비밀파티에 꼬박꼬박 초대했다. 이렇게 해서 오진우는 「어린 목동이 고삐를 끌고 가는 한 마리의 늙은 소」가 됐다. 기쁨조 파티에서는 오진우가 가장 나이 많은 손님이며 여러 사람이 권하는 술에 항상 만취하여 집에 돌아갔다.

1987년 봄, 밤늦게까지 비밀파티에서 술을 마셔 만취한 오진우가 직접 차를 몰고 집에 가다가 가로등을 받고 중상을 입었다. 새벽에 그를 발견하여 병원으로 옮겼으나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했고 두개골이 깨지고 여러 대의 갈비뼈가 부러졌다. 국내에서 치료가 가능한지 아닌지 여부를 떠나서 金日成은 자기 전용기로 오진우를 마취상태로 모스크바에 보냈다. 모스크바에서는 東獨으로 보내어 수개월간 치료 끝에 그를 회복시켰다.

만취한 71세의 노인에게 차를 직접 운전하게 하고 밤길에 경호원도 없이 집에 보냈다는 일은 이해가 안 된다. 이 교통사고의 저변에 그를 해치기 위한 고의성이 있었는지는 따질 길이 없으며 그때의 사정을 더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986년부터 金正日은 자기 측근들에게 별도로 벤츠 280형 한 대씩을 지급하였다. 차의 번호판은 일률적으로 동일하였다. 자기 생일을 의미하는 216-9999, 후에 216-5555로 바뀌었다. 그러나 꼭 지켜야 하는 두 가지 조건이 있었다. 金正日이 사적으로 모이라고 부를 때는 반드시 이 차를 이용할 것, 그리고 이 차는 반드시 본인이 직접 운전할 것이며 다른 사람은 아무도 태우지 말 것 등이다. 아마도 그들의 난잡하고 방종한 사생활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 그랬던 것 같다.

오진우가 없는 동안 金正日은 오극렬에게 인민무력부장과 총정치국장 직무대행을 하게 하였다. 이 짧은 기간에 오극렬의 리더십이 인민군內에서 대단한 인기를 얻었고 작전 지휘관들의 사기가 충천하였으며 모두 그가 계속해서 인민무력부장이 되기를 원했다. 그의 주장은 군대는 전투지휘관이 지휘해야지 정치군관이 좌지우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재기불능으로 믿었던 오진우가 목발을 짚고 평양에 돌아왔을 때 인민군 내부의 상황이 많이 변해 있음을 발견하고 오극렬의 실책을 金日成에게 보고했다. 그는 黨의 권위와 정책을 무시하고 정치군관들의 활동을 제한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金正日의 의도와는 달리 오진우가 다시 인민무력부장의 자리에 복귀하고 오극렬은 한직인 민방위사령관으로 좌천됐다.


승진인사로 군부 장악과 對南공작 강화


1991년 12월24일 金正日이 인민군 최고사령관이 되고, 1992년 4월21일에 원수 계급을 받아 그는 명실 공히 군부를 완전 장악하게 된다. 金正日이 인민군 최고사령관이 된 지 4개월 만인 1992년 4월에 그는 창군 이래 최대 규모의 장성급 승진 인사를 단행했다. 차수 오진우를 원수로, 최광을 포함한 8명이 대장에서 차수로, 상장에서 대장으로 16명, 중장에서 상장으로 96명, 대좌에서 소장으로 524명이나 진급했다.

金正日은 만경대 구역에 거대한 장성급전용 병원을 건설했고 국경일에는 장성들을 대동강 구역 능라 초대소에 초청하여 대연회를 베풀었으며, 군단장급 이상 군 간부들에게는 金日成의 이름이 새겨진 은색 「백두산 권총」과 고급 혁대 등을 주고 무력통일을 위한 軍의 단결과 金正日에 대한 충성을 맹세케 했다.

그는 아버지를 의식해 혁명 1세대 오진우가 1995년 2월25일 간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상징적으로 인민무력부장의 직위에 두고 그 외의 군부 실세는 모두 金正日 심복으로 포진했다. 공군 사령관 조명록, 해군 사령관 김일철, 인민무력부 부부장 이병욱, 총정치국 부국장 이봉원 등이 대표적인 예다. 후에 김일철은 인민무력상이 되고 조명록은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겸 총정치국장이 된다. 金日成 사망 후에 金正日은 先軍정치로 자기의 위치를 확고하게 다지고 자기와 軍 지도부와의 관계를 옹벽으로 둘러싼 운명의 공동체로 만들었다.

그는 조국통일의 주력은 역시 군대라고 생각하고 전쟁준비에 박차를 가할 뿐 아니라 그와 병행해서 對南공작을 강화해 남한內 혁명역량(좌익 親北세력)을 구축하고 때가 오면 자기가 통일대통령이 된다는 꿈을 누누이 軍 지휘관들 앞에서 피력했다. 그래서 그는 군부를 장악한 다음에 對南공작 활동을 본격적으로 강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2년 12월에 그동안 공석으로 있던 노동당 對南사업담당비서에 金容淳을 발탁했다. 중앙당 산하에는 4개의 방대한 對南공작기구가 있으며 金容淳은 담당비서일 뿐만 아니라 그중에 가장 중요하고 규모가 큰 통일전선부(약칭 통전부)를 직접 지휘했다.

金正日은 對南공작을 위해 39호실의 비자금 중에서 막대한 돈을 풀고 남한 내부와 해외교포들을 포섭하여 공작금을 주고 親北활동과 反美운동을 전개하도록 통일전선부의 기본 활동지침을 직접 지시한 바도 있다. 남한에서 소위 해외 민주인사라고 부르는 사람들 중에는 일본이나 유럽에서 평양에서 파송된 통일전선부 간부들과 수시로 은밀히 만나 공작지령과 공작금을 받는 사람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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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에서 본 김정일

정창현 지음 | 김영사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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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의 성향


... 노래김정일은 말 타는 것을 좋아한다. 머리도 좋은 편이다. 다만 성격이 아주 괴팍하고 급하다. 또 김정일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히틀러다.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베고 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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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순자 강명도씨의 증언에 의하면 김정일은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베고 잘 정도로 히틀러 통치술을 흠모하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북한의 정치囚 수용소가 히틀러의 아우슈비츠 제도를 본받아 유지, 운영되고 있음을 시사하는 단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안명철씨도 月刊朝鮮과의 인터뷰에서 북한 수용소가 나치의 유태인 수용소 체제를 모방 혹은 참고하여 운영되고 있음을 증언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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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퍼 부소장은 북한 당국의 정치범 독가스 살해행위를 2차 대전 때 나치정권의 독일이 유태인 600만 명을 독가스로 학살했던 ‘유태인 대학살’에 비유하며 당시 미국 언론들이 유태인 대학살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처럼 지금도 미국 등 국제사회는 북한의 인권탄압을 외면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쿠퍼 부소장은 최근 서울에서 만난 탈북자들의 증언을 소개하며 북한 당국이 정치범 등을 독가스로 살해하고 생화학무기 개발을 위해 이들에 대한 생체실험도 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올해 55세로 화학자 출신의 한 탈북자는 자신이 지난 1979년 북한에 있을 당시 지하 실험실에서 독극물 개발실험에 참여했으며 이 과정에서 두 명의 정치범을 독가스로 살해하는 현장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실험을 성공적으로 마친 데 대한 공으로 메달과 승진 등 보상을 받았다고 증언했습니다.

.... 쿠퍼 부소장은 미국에서 열리는 한 인권회의에 이 탈북자를 초청하려 했으나 남한 당국이 비자를 내주지 않아 무산됐다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탈북자는 31세의 젊은이로 북한에 있을 당시 8년 동안 북한 전역의 여러 정치범수용소들을 옮겨 다니며 죄수들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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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0월 국방위원회 명령이라는 것에서 밝힌 대로, 金正日은 중국을 비롯한 국경지역에서 渡江(도강)하는 자는 예고 없이 사격하며, 국경지역에서 사상이 변한 자들은 백만이고 이백만이고 용서 없이 쓸어버리겠다고 호언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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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사 평론`의 피에르리굴로(Pierre Rigoulot)편집국장은 “오늘날 2300만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북한땅에서 지난 50년 동안 공산체제로 인해 희생된 사람(기근자 및 아사자 제외)은 대략 200만명에서 300만명 이상이 된다”고 기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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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이산가족이 천만 명이 된다고 하지만 북한에 실제로 살아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들은 이러저러한 계기에 다 희생되고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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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처에서 사람의 고기를 판다는 말을 들었고 평양에서 있은 한 건은 직접 확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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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지도부 책임간부의 말에 의하면 1995년에 당원 5만 명을 포함하여 50만 명 이상이 아사하였으며 1996년에는 11월 중순 현재 벌써 100만 명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는 1996년의 양곡생산은 210만 톤밖에 안 된다고 하면서 이대로 나간다면 1997년에는 200만 명이 아사할 수 있다고 하였다. 조직지도부 책임일군이 중앙당 비서에게 무책임한 말을 할 수도 없고 할 리도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1995년부터 96년 말까지 150만 명 이상이 굶어죽었다는 것은 틀림없는 자료이다. 1997년과 98년 사정은 똑똑히 알 수 없으나 식량사정이 크게 개선된 것 같지 않기 때문에 적어도 매년 100만명정도 굶어죽은 것으로 추측된다. 1998년초에 중국신화사통신이 북한의 농업위원회 간부가 제공한 자료라고 하며 보도한데 의하면 97년 말까지 280만 명이 아사하였다고 한다. 1996년 말까지 150만 명 이상이 아사한 것이 틀림없는 것으로 보면 97년에는 130만 명이 아사하여 도합 280만 명이라는 아사자 숫자가 나온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1995년부터 1996년 말까지 아사한 것으로 추측된다고 하였지 사태를 과장하여 말한 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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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조(深化調)’로 불렸던 당시 숙청작업은 1998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돼 2001년 말까지 공식적으로만 총 2만여 명의 당간부 및 핵심요원들을 고문 또는 총살하거나 정치범수용소에 보냈던 사건으로 평양 지도급사회에서는 ‘원자탄’에 비견되는 큰 공포와 충격을 줬던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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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총련 학생들은 남한 민족과 북한 민족이 하나가 되는 것을 통일이라 생 각하는데
北에서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북한은 金日成의 지침으로 「남 한 주민중 30%는 같
은 민족이 아니다」고 정해 놓았습니다. 군인, 경찰, 고 급 공무원, 재벌 등 북한에서
소위 말하는 反動 관료, 매판자본가, 악덕 지 주 계급입니다. 對南 전략 내부 文件에 기
록돼 있습니다. 통일은 남한 주민 30%를 제거한 상태에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통일
후, 2단계 사회주의혁명 단계에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만이 유일한 민족으로 남게 되
고 다시 40%를 숙정하는데 한총련 대학생들은 중산층이므로 역시 숙청 대상입니다.
본인 이야 괜찮을지 몰라도 그들의 부모는 숙청대상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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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은 미제국주의 식민지이고 남한정권은 괴뢰정권이며 남한 사람은 모두 지주, 자본가들과 그들의 후손이기에 계급적 원수라고 설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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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은 미제국주의 식민지이고 남한정권은 괴뢰정권이며 남한 사람은 모두 지주, 자본가들과 그들의 후손이기에 계급적 원수라고 설교한다. 이런 관점에서 김일성은 6.25전쟁때 남한의 계급적 원수를 소탕한다는 깃발을 내걸고 무자비한 동족상잔을 감행하였다.

그리고 오늘날 김정일은 남한을 약화시키고 남한을 지배하기 위하여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는 남한의 경제성장에 대하여 극도로 질투하고 있으며 남한 사람들이 아무리 평화적 공존을 요구하여도 남한이 혼자서 평화롭게 잘 사는 것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는다는 입장에 서 있다. 그는 남한에게 불리한 것은 자연재해까지 포함하여 다 좋아하고 오직 남한을 망하게 하는 방법만을 생각하고 있다.........

특히 군대에는 오직 남한에 대한 적개심, 복수심으로만 교양하여 명령만 내리면 남한을 언제나 불바다로 만들고 남한 인민들을 몰살하고서라도 남한을 점령하여 김정일을 승리의 광장에 모셔야 한다는 단 한가지 사상만 가지게 하고 있다. 김정일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미얀마에서 아웅산폭파사건을 일으켰으며 대한항공기폭파를 지시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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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선의 1967년 8월 29일 일기를 살펴보자.

"16차 전원에서 김영주 동지가 제안한 '당의 유일사상체계확립의 10대 원칙'이 채택된 뒤 전국 곳곳에 김일성 수상 동지의 동상이 건립되고 있다. … 중략 … 유일사상이란 말 자체가 얼마나 사회주의로부터 벗어나 있는가. 굳이 따지자면 한낱 정책노선에 지나지 않는 것을 일러 사상, 그것도 유일이라는 이름으로 당 전체에 확립하려는 모습은 아무래도 납득하기 어렵다. 개인 숭배의 극한적 형태가 아닌가. … 중략 … 혈연으로 후계자를 정하려는 움직임이 드러나고 있는 오늘을 도대체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231페이지)

이어서 한달 후 그는 "공화국 도시와 농촌 곳곳에서 지난 10여년 동안 인민들을 위해 출판되어온 모든 서양 문학들을 반복고주의와 반수정주의라는 구호아래 단속해가는 공화국의 현실이 믿어지지 않았다"라고 쓰여 있다. 성혜랑의 수기 <등나무집>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수기에서 성혜랑은 "전쟁때 나는 미국 비행기가 손바닥만한 도시에 하루에 수백 개의 폭탄을 던진 때도 이런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공포를 느껴본 일이 없었다"라고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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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당국이 그동안 발견된 4개외에 20여개 남침용 땅굴이 더 있는 것으로 파악, 추가확인작업을 벌이고 있다.
김동진 국방장관은 24일 국회 통일.외교.안보분야 대정부질의에서 추가땅굴확인작업과 관련, 이같이 밝히고 "땅굴 출구로 예상되는 곳에 대해서는 24시간 경계하는 등 방어태세를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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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선거 불참은 정치적 범죄로 여기므로 공포 속에 무조건 참가해야 한다. .......

....선거 당일까지도 어떤 사람을 선거해야 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고 또 알아도 아무 소용이 없다. 이미 당에서 선정한 것은 선정된 것이다. 따라서 선거장에 가면 김부자 초상화 앞에 허리굽혀 절하고 투표함에 투표하면 된다.

.....반대하려면 놓여진 연필로 유일하게 정해진 입후보자의 이름을 그으라고(X) 하지만 그러면서도 뒤에서는 인민 반장을 비롯한 요원이 지켜보고 있다.

그러니 누가 반대를 하며 또 반대를 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무엇인가. 오직 반대자는 가혹한 처벌만이 존재할 뿐이다....................


백성의 선거보다 위에 있는 당 임명권

그러면 당에서 모든 입후보자를 선정해서 인민이 기계적으로 투표한 당선자는 실세(권력자)가 있는가.

사실 그 자체도 실세가 없는 입법 당선자이다. 당에서 선정해서 선거된 입법 선거, 즉 형식적으로 인민이 참여하여 선거된 군, 도의원과 최고 인민 회의 대의원(국회의원)은 명색뿐이고 실제 실세는 당 간부이다.

그러면 당 간부는 누가 선거하는가. 당 간부는 선거하는 것이 아니라 상급 당에서 임명한다. 전체적으로는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정치적 배려와 신임에 의해서 임명한다'는 것이다.

간부의 임명권은 김부자 비준급인 중앙당 비준급, 도당 비준급, 군당 비준급 등으로 나뉘어진다. 북한 입법 기관은 당의 결정을 받아들여 재확인 결정하는 들러리 역할만 할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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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귀의 십계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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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는 ‘유일사상체계 확립 10대 원칙’이라는 것이 있다. 노동당 중앙위원회가 1974년에 내놓은 이 ‘10대 원칙’은 북한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직접적으로 규제하는 생활 규칙이며 규범이다.

탈북 외교관 현성일 씨는 논문 ‘북한사회에 대한 노동당의 통치체계’에서, 북한사회에서는 헌법은 몰라도 이 원칙을 완전히 통달하지 않고서는 하루도 살아갈 수 없다’고 밝혔다.

모든 회의와 ‘생활총화’ 모임에서는 첫머리에 이 원칙을 낭독하고 토론자들은 토론문 머리에 이 원칙을 반드시 인용해야 한다. 노동당 입당을 위한 자격 심사에서는 물론 수도 없이 많은 각종 문답식 학습경연도 이 원칙의 내용이 주를 이룬다.

이 ‘원칙’의 3번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권위를 절대화하여야 한다’의 세부항 5번에는 ‘수령 동지의 권위와 위신을 훼손시키려는 자그마한 요소도 비상사건화하여 그와 비타협적인 투쟁을 벌여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

미녀 응원단이 보여준 행위는 바로 이 조항에 따른 것이다. 만약 북한 대표단이 그와 같은 상황을 보고도 그냥 지나쳤다면 그들 자신이 ‘비타협적 투쟁’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을 비웃거나 나무랄 수 없다. 문제는 그러한 행위를 강요하는 현 북한 체제의 본질인 것이다.



북한의 현 체제가 개인독재체제이며 유일사상체제라는 것은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이 10대 원칙의 내용을 보면 그 실상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수령을 충심으로 높이 우러러 모셔야 하며(원칙 2), 이를 위해 ‘한 순간을 살아도 수령을 위해서 살고, 수령을 위하여서는 청춘도 생명도 기꺼이 바쳐야’ 하며(같은 원칙 2항), 수령의 권위를 절대화하기 위해 ‘수령의 혁명 역사와 투쟁 업적이 깃들어 있는 혁명전적지, 사적지, 사적관과 혁명 사상 연구실을 정중히 꾸리고 잘 관리하며 철저히 보위하여야 한다.’(원칙3의 7항)

‘수령의 혁명 사상을 신념으로 삼고 교시를 신조화해야 하며’(원칙4), 수령의 교시를 무조건 접수하고, 수령의 사상 의지대로만 사고하고 행동하여야 한다.(같은 원칙3항)

수령의 혁명 사상을 매일 2시간 이상 학습하는 것을 생활화하고, 이를 게을리 하거나 방해하는 현상을 반대하여 적극 투쟁해야 하며(같은 원칙 3항), 보고·토론·강연을 하거나 출판물에 글을 쓸 때는 수령의 교시를 인용하고, 그와 어긋나게 말하거나 글을 쓰는 일이 없어야 한다.(같은 원칙 7항)

또 수령의 교시와 당 정책에 대해 시비 중상하거나 반대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추호도 묵과하지 말고 견결(堅決)히 투쟁하여야 하며(같은 원칙 9항), 반당적·반혁명적 사상 조류를 반대하여 날카롭게 투쟁해야 한다.(같은 원칙 10항)

수령을 중심으로 하는 전 당의 사상 의지적 통일과 혁명적 단결을 강화하여야 하며(원칙6) 이를 위해 수령에 대한 충실성을 척도로 모든 사람들을 평가하고 수령에게 불충실하고 당의 유일사상체계와 어긋나게 행동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직위와 공로에 관계 없이 날카로운 투쟁을 벌여야 한다.(같은 원칙 3항)

개별 간부들이 회의를 소집하거나 회의에서 자의대로 결론을 내리는 것을 허용하지 말아야 하며(원칙 9의 5항), 수령에 대한 충실성을 기본 척도로 간부들을 평가하고 선발 배치해야 하고, 개별 간부들이 제멋대로 간부들을 떼고 등용하는 행동에 대해서는 묵과하지 말고 강하게 투쟁해야 한다.(같은 원칙 7항)


열번째는 ‘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계승 완성해야 한다’는 원칙인데, 이는 김정일의 후계 문제를 규정한 것이다. 이 원칙이 발표될 당시에는 김정일이 아직 공식적으로 후계자로 대두되기 이전으로 ‘당중앙’이라고 위장호칭으로 불리던 시기다.

이 원칙에서는 ‘당중앙의 유일적 지도 체계를 확고히 세울 것’을 명시하고, ‘이 유일적 지도체계와 어긋나는 사소한 현상과 요소에 대해서도 묵과하지 말고 비타협적으로 투쟁할 것’ ‘당중앙의 권위를 백방으로 보장하며 당중앙을 목숨으로 사수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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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초 김정일이 후계자로 대두하면서 "수령의 유일적 령도체계"를 체계화시키게 됩니다.

- 1973년 당 조직지도 및 선전선동 담당 비서
- 1974년 당 정치국 위원
- 1974년 2월 "유일사상체계 확립 10대원칙" 제정
- "당중앙"이라는 이름으로 국가사무에 관여하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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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사람들은 요사이 김정일에 대한 비난을 사석에서 많이 한다. 워낙 김정일이 인기가 없어 그렇게 욕해도 신고하는 사람들도 없어졌다고 한다. 처음 만나 친해지려면 일단 김정일 욕부터 하고 시작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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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모 국가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 국가를 방문한 북한의 한 엘리트인사는 해외교포들을 만나 대화하는 과정에서 불쑥 "왜 미국이 김정일이를 그냥 두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고 이 자리에 있던 해외교포가 전했다. 이 인사는 "외국이긴 하지만 그런 얘기를 하다 단속이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그러느냐"고 다른 참석자들이 주의를 주자 "조선에서도 우리끼리 모이면 김정일 욕도 하고 다들 이런 얘기들을 한다. 김일성 때는 그래도 먹고는 살았는데, 지금은 당이 먹는 문제도 해결해주지 못하니까 인심도 각박해지고 당을 욕한다"고 태연스럽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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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은 북한사람 3백만을 굶어죽이고 27만을 정치범 수용소에 구금하고 2만여 명을 처형했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김정일정권은 극도로 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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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북한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나 근 50년을 북한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주님의 은총으로 96년 아들을 데리고 남한으로 올 수 있었습니다.
저는 북한에서 태어나 북한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하느님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제가 영문도 모른 채 지하 감옥에서 모진 고문과 사형선고까지 받고 사형집행날
극적으로 사형을 취소한다는 통지와 함께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 졌을 때
수용소 안에서 겪은 북한 신자들의 모습입니다.

저는 김일성 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했기 때문에 정치범 수용소에서 죄수의 신분으로 유일하게
6,000 여명이 수용된 그 곳의 모든 사람들에게 일을 시킬 수 있는
생산지휘와 모든 재정업무를 맡아서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저는 많은 사람들이 일하는 작업장들을 이곳저곳 마음대로 갈수있었습니다.
어느 날 저를 담당하고 있던 재정부장 교도관이 저를 불러놓고는 단단히 교육을 시켰습니다.

“너는 오늘부터 매일 어떤 공장으로 나가야 하는데
그 공장에는 미친 정신병자 놈들만 모여 있다.
그 미친 정신병자 놈들은 당과 수령님을 믿지 않고 하늘을 믿는 미친 자들이니
너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 곳에 가야 된다.
그리고 그 미친 자들하고는 절대 눈 길 한 번 마주치지 말아라.
그렇지 않고 네가 그자들이 믿는 하늘을 믿게 되면 네 목숨은 여기서 끝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거기 가서 그 사람들을 보는 순간 나는 너무 놀랐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무리 같지 않았습니다.
1,500도 이상 시뻘겋게 타오르는 용광로의 고열 노동 작업장이었는데
그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는 걸 보았을 때,
무슨 짐승의 무리 같기도 하고 외계인 같기도 하고
도무지 사람의 모습을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머리에 머리카락이 붙어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얼굴은 해골 같고 이빨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키기 다 줄어들어서 120센티 30센티 요렇게 땅에 딱 붙은 난쟁이들만 움직였습니다.

나는 가까이 가서 그들을 보았습니다.
전 너무나 놀랐습니다.
잡혀 올 때는 정상인들이 잡혀 왔는데 거기 와서 하루 열 여섯 시간,
열 여덟 시간씩 먹지도 못하고 그 고열 노동 속에서 일을 하다 보니
그 사람들은 척추가 녹아 내려서 뒷잔등에 혹이 되어 있었고 몸이 다 휘어져서
앞가슴하고 배가 마주 붙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한결같이 모두 그렇게 육체가 망가져 기형이 되어 있었습니다.
아마 프레스로 찍어도 한 판에 그렇게 똑 같은 모습으로 찍기는 힘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들이 일하는 작업장에는 교도관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는데 교도관들은
말로 일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소가죽 채찍을 윙윙 휘두르고 다니면서 묵묵히 일하는 사람들을 사정없이 내리쳤습니다.
예수를 믿는 그 사람들의 몸에는 옷이 입혀져 있지 않습니다.
저는 처음에 멀리서 그 사람들을 보았을 때 모두 다 꺼먼 옷을 입고 있는가 했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서 찬찬히 보니
그 사람들은 맨 살가죽에다 앞에 시커먼 고무 앞치마 하나만 걸치고 있었습니다.
용광로의 뜨거운 불꽃이 앙상하게 말라붙은 살가죽에 튀고 또 튀어 딱지가 앉고
그 자리에 쇳물이 또 떨어지고, 타버리고 해서
그 사람들의 피부는 한 곳도 성한 곳이 없었고 마치 짐승의 가죽과 같았습니다.

어느 날 저는 그 곳에서 정말 말로 전하기 힘든 너무나 끔찍하고 참혹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오후, 제가 공장문을 열고 들어섰는데, 공장안이 쥐 죽은 듯 고요했습니다.

작업장 한 가운데 수 백 명의 그 죄수 아닌 죄수를 모아놓고 담당 교도관 두 명이
눈에 핏발을 세우고 미친 듯이 고함을 치며 날 뛰고 있었습니다.
저는 너무나 무서워서 문 옆 한쪽에 비켜 서 있었습니다.
교도관들은 수령님을 믿지 않고 하늘을 믿는 미친 정신병자 놈들이라고,
소리 소리지르며 그 사람들을 차고, 때리고 하면서 인간이하의 취급을 하고 있었
습니다.
교도관들은

“너희들 가운데서 단 한 사람이라도 좋으니 대열 앞에 나서라.
하늘을 믿지 않고 수령님을 믿겠다고 하면 자유세상으로 내보내서 잘 살 수
있게 만들어 주겠다.”하면서 그 사람들을 윽박지르며 하늘을 거부하라고
그렇게 채찍으로 때리고 발로 차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너무나도 이상했습니다.수 백 명의 그 사람들은 왜 그런지 아무
대답도 없이 그렇게 매를 맞으면서도 침묵으로 맞섰습니다.
저는 너무나 무서워서 빨리 한 사람이라도 나서야 되는데 그래야 오늘 누가
맞아죽지 않을 텐데 왜 계속 저렇게 입을 다물고 있나. 저러고 있으면 또
누구를 끌어내다가 밟아 죽일지 모르는데 빨리 한 사람이라도 나서야 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마음속으로 다급하게 생각하며 문 옆에 서서 무서움과
공포 속에서 떨고 있는데
예수를 믿는 그 사람들은 계속 침묵으로 대응했습니다.
그 때 독이 오른 교도관이 그 사람들에게 달려가서 닥치는 대로
아무나 여덟 명을 끌어 내다가 땅바닥에 엎어놓았습니다.
그리고는 구둣발로 내리밟고 짓이겼습니다.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되고 허리며 팔 다리뼈가 부러졌습니다.
그 사람들은 고통 중에서도 몸을 뒤틀면서, 짓밟힐 때마다 신음소리를 냈는데

그 신음소리가 너무나도 이상하게 들렸습니다.
저는 그때, 주님이 누군지,하느님이 누군지도 전혀 몰랐습니다.
뒤에 알고 보니 그 사람들이 구둣발로 짓밟혀 뼈가 부러지고 머리통이
부서져 나가면서 신음소리처럼 애타게 불렀던 것은 바로 주님의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 사람들이 당했던 고통의 천만 분의 일도 제대로 여러분에게 전해
줄 수가 없습니다.
미쳐 날 뛰던 교도관 두 명은 “수령님과 당을 믿는 우리가 사는가 아니면
하느님을 믿는 너희가 사는가 보자” 면서 달려 가더니 용광로의 펄펄 끓는
쇳물통을 끌어왔습니다.
그리고는 그 쇳물을 피투성이가 된 그 신자들 위에 부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순식간에 살이 녹고 뼈가 타면서 숯덩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저는 난생 처음으로 내 눈앞에서 사람이 숯덩이로 변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그 충격이 컸던지, 그 곳을 어떻게 튀어나왔는지 기억에도 없습니다.
그리고 얼마동안 도무지 눈을 감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정신적 충격으로 눈만 감으면 눈앞에 숯덩이가 된 사람이 어른거려서
도무지 눈을 감을 수 없고, 잠도 제대로 잘 수가 없었고, 일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으며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고 정신이 들어갔다 나갔다 했습니다.
저는 그 일을 목격하기 전까지는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 실오라기만큼이라도
수령님과 당에 대해서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때 깨달았습니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를 말입니다.
인간은 주님을 꽉 잡아야 된다는 것을 저는 그때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다시, 우리 어머니가 평생을 하늘에 기도했다는 그 하늘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너무나도 간절하게 하늘을 찾았습니다.

“저 사람들이 저렇게 불에 타 죽으면서까지도 저렇게 거부하지 않고, 저렇게
믿는 하늘이, 진짜로 그 하늘이 어디에 계시다면 나를 좀 살려달라고...
그리고 저렇게 무서운 짓을 하는 저 자들에게 하늘에서 정말 벌을 내려줘야
되지 않겠느냐”고 그렇게 마음속으로 부르짖으며 자나깨나 꿈속에서도
하늘을 찾고 또 찾고 기원했습니다.
그런데 진짜로 주님께서 그 간절한 저의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한 달이 멀다 하고 공개처형이 있었는데 어느 날 누구를 또 공개처형시키려
는지 6천명이나 되는 수용소 사람들을 한 자리에 다 모이게 했습니다.
공개처형 때는 언제나 하늘을 믿는 사람들을 맨 앞 줄에 앉힙니다.
그런데 하늘을 믿는 자들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하늘을 xx 못하게 하라는
김일성의 특별지시와 규정이 있어서 하늘을 믿는 그 사람들을 앉힐 때에는
무릎사이에 목을 끼우고 땅에 얼굴을 대고 엎드리게 했습니다.
심지어 죽어서도 하늘을 xx 못하게 해야 한다면서 죽은 시체도 목을 꺾어
거적에 말아서 어두컴컴한 산골짜기 나무 밑에 파묻게 규정이 그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 날도 신자들은 하늘을 조금도 못 보도록 목을 무릎사이에 끼우고 맨
앞줄에 앉아 있었고, 그 뒤쪽으로 다른 사람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습니다.
누구를 또 공개처형하려는가?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너무 놀라 쇠몽둥이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정신이 아찔하여
대답도 할 수가 없었고 일어 설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자 간수들이 나를 끌어내다 앞에 세웠습니다.
내가 군중들 앞에 섰을 때, 수용소 소장이 나에게

“고마운 수령님과
당의 은덕으로 너는 이 시각에 석방이다”라고 통보를 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목을 무릎에다 끼우고 맨 앞줄에 엎드려 있던 신자들이 내가
석방된다는 소리에 약속이나 한 듯이 동시에 고개를 번쩍들었습니다.
그 때 저는 그분들의 눈빛을 보았습니다.
그 분들은 눈빛으로 간절히 말했습니다.
‘밖에 나가거든 자기들의 실상을 세상에 알려 달라’고.. 지금도
제 가슴에는 그분들의 그 간절한 눈빛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어머니가 평생을 빌고 또 빌은 그 하늘이, 한 번 들어가면 살아
나올 수 없는 그 악명높은 정치범 수용소에서 저를 살려 주었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저희 모자를 살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북한의 수용소에 갇혀있는 그 신자들의 눈빛을 절대로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분들이 이 시대의 순교자라고 봅니다.

저의 증언으로 인해 북한 신자들의 인권문제가 150 여개 나라에 나갔고
세계가 떠들었습니다.
유럽의 지식인 100 여명이 프랑스에 모여 북한 신자들의 인권을 위한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자유롭게 신앙생활 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북한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탈북자 이순옥씨의 증언 중 일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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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덕 수용소는 가족세대구역과 독신중대구역 및 완전통제구역으로 분리되어 있다. 가족세대구역은 "범죄자"의 가족들이 수용되며 북한주민이 9천3백여명, 북송교포 5천9백여명 등 1만6천여명있다. 독신중대구역에는 범죄자 장본인 1천3백여명이 수용되어 있으며, 살아서는 나올 수가 없다는 완전통제구역에는 3만4천여명이 수용되어 있다.

◆ 일과

저녁 11시에 취침하여 5시에 일어난다. 새벽 5시반에 인원점검이 있고, 5인조 별로 저녁 8시까지 작업을 한다. 작업이 미달되면 연장작업을 하고, 저녁 10시부터 11시까지는 김일성 덕담, 김부자 찬양노래 등을 반복 교양한다.
집합시간에 늦을 경우 그 자리에서 죽도록 구타를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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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멩이로 被수용자를 때려죽인 분주소장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은 인간이라기보다 짐 승이라 표현해야 맞을 것이다. 아니 짐승도 낯을 붉힐 정도의 학대 속에서 날마다 시 들어 가고 있다.

수용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작업에 내몰릴 때면 모두 기운이 없어 무릎걸음으로 벌벌 기어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인분을 퍼 나 를 때도 인분 바가지를 들고 무릎걸음으로 날라야 했고, 밭의 풀을 잡아 뽑을 때에도 돌밭을 무릎걸음으로 다녀야 했다. 그래서 모두의 무릎은 항상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고, 군살이 들어앉아 있다. 모두 피골이 앙상해 사람다운 모습이라고는 찾 아볼 수 없었다. 수용소에 들어가기 전에 내 몸무게가 70㎏ 정도였는데 수용소에 들 어간 후부터는 40㎏ 정도밖에 안되는 상태 를 항상 유지했다. 그야말로 뼈에 가죽을 씌워놓은 해골이나 같았다. 그러니 어디에 서 힘이 나
2005-12-04 10:16:02
221.149.2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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