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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 둥지(연재4)
icon 까마귀
icon 2005-11-17 17:3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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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 둥지> 연재4:


어머니는 이야기를 참 잘 하셨습니다.

어릴 때, 먼 옛날이지만, 우리 집은 시골에 있었습니다. 태어난 곳도 시골이었지만, 원숭이에서 인간이 되기까지 시골에서 살았습니다. 시골에서 말을 배웠고, 시골에서 최초의 인간을 구경했습니다.

사실 그 보다 멋진 시골은 없었습니다. 자주 시골 생각을 하는데, 지금은 찾고 싶어도 없습니다. 땅도, 집도, 사람도 모두 옛날 모습이 아닙니다.

나의 기억이 깨졌는가.

재가 5살 때까지 마을에는 전기가 없었습니다. 대신 등잔불을 썼습니다. 등잔불은 나에게는 너무나도 소중한 기억입니다. 어머니는 등잔불 밑에서 세 남매를 앉쳐놓고 도레미를 가르쳤줬고, 재미나는 이야기도 참 많이 들려줬습니다.

그 중에 <서울아가씨와 시골노총각>의 이야기는 지금도 깊이 인상에 남아있습니다. 왜 다른 이야기는 모두 깨여지고, 지금도 그 이야기만은 머리에 고스란히 남아있는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철 없는 어린 저에게도 아주 인상적이었나 봅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서울에 사는 어느 대단한 부잣집에 곱게 자란 예쁜 아가씨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가씨는 친구들과 시골로 산놀이 갔다가 길을 잃고 호나 산속에서 헤메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어떤 외딴 농가집을 만나 찾아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어험..

농가집에는 멋 지고, 점잖은 늙은 총각이 혼자 살고 있었습니다. 심심산골에 갈데도 없고 해서 아가씨는 하루밤만 재워달라고 노총각에게 부탁합니다. 원래 점잖은 분이신지, 총각은 두말없이 응낙했습니다.

- 보다 싶이 남자 혼자 사는 집입니다. 아가씨가 괜찮다면 하루 밤 묵어 가도 됩니다만...

사실 갈데도 없고 호랑이라도 만나면 어쩔까, 너무 무서웠던터라 부잣집 아가씨는 한시름 덜었습니다. 요즘 세상과 달리, 인간보다 호랑이가 더 무서웠던 시절이니 그럴만도 합니다.

해가 지고 저녁이 찾아왔습니다. 아가씨는 감사의 뜻으로, 아니 남자 혼자인 집이니 응당히 자기가 저녁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부자집에서 자랐지만, 본성이 착한가 봅니다.

저녁 밥을 지을려고 쌀독에서 하얀 쌀을 바가지로 퍼내는 아가씨는 신기하기 그지 없습니다. 부자집에서 곱게 자란 그녀는 지금까지 주는 밥만 먹다나니, 자기집 쌀독이 어디 있느니도 모릅니다.

다음은...

앞마당에서 새파란 야채를 뜯으며 아가씨는 너무 너무 신기합니다. 야채란 이렇게 자라는거구나. 오이를 따면서도 신기했고, 고추를 따면서도 신기했고, 무우를 뽑으면서도 신기했습니다. 처음 하는 일에 아가씨는 그만 홀딱 반하고 말았습니다.

처음이란...ㅎㅎㅎ...

고추를 따다 머리를 쳐드니, 해저문 서산에 비낀 노을이 너무 멋있습니다. 마음껏 신선한 공기를 가슴깊이 들이키니 막 정신이 납니다. 서울이 좋다하지만, 그건 소문이었습니다. 아가씨는 그만 시골의 풍경에 푹 취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처음이란...ㅋㅋㅋ...

그럭 저럭 저녁 준비가 되었습니다. 심산 속의 인적없는 외딴 오막집에서 아가씨와 늙은 총각은 마주앉아 식사를 합니다. 그러고 보니 시집 안간 처녀가 처음으로 외간 남자에게 해주는 밥이었고, 장가 못간 노총각이 난생 처음 먹어보는 정체 모를 처녀가 받쳐올린 저녁상이었습니다.

밥 맛이 어땠느니 알 수 없지만, 총각은 참 묘한 기분이었고, 처녀도 이상한 기분이었습니다.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그 기분, 두 사람 모두 싫지는 않았나 봅니다. 그저 총각에게도 처녀에게도 이런 일이 처음이였을 뿐입니다.

처음이란... 쿄쿄쿄...

그런 이상야릇한 분위기 속에서 시작한 저녁식사입니다만, 조금 후 어색한 기분이 살아지고, 남자와 여자는 자연스럽게 이 얘기 저 얘기 나누기 시작합니다. 남자는 남자의 이야기를, 여자는 여자의 이야기를...^^

알고 보니 늙은 총각은 공부를 많이 한 사랑이였습니다. 과거 시험을 봤는데, 매 번마다 운수가 사누어 미끌어지기만 했답니다. 크게 실망한 나머지, 총각은 출세 생각을 단념하고 혼자 농사를 지으며 일생을 보내기로 결정한 거였습니다.

들어보니 참 안되었습니다. 이렇게 멋진 인물에, 인격도 대단해 보였지만, 학식도 만만아 보이지 않습니다. 아가씨는 마음 속으로 참 안됐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지금도 대한민국에는 사법고시니, 뭐니 하며 늙어버린 총각들이 많지 않습니까..^^ 작가가 된다며 장가도 안 가고 다 늙어버린 나도 참 불상한 놈입니다..^^

시시한 얘기는 이만 하고..^^

어험... 그 날 저녁, 노총각이 참지 못하고 호랑이로 변신해 아가씨를 잡아먹었는지, 아니면 아가씨가 호랑에 반해 잡아먹으세요, 하며 몸을 맏겼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하여튼 닭이 울고 동이 트더니 새날이 밝아왔습니다.

해가 중천에 뜨고 오후가 되여 총각에게 작별을 고하고 서울로 떠나간 아가씨는, 끝내 참지 못하고 집에서 뛰쳐나와 그 늙은 총각에게 시집갔답니다. 아버지의 반대도, 어머니의 반대도, 그리고 오빠들의 반대도 마다하고.

덕분에...

좋은 마누라를 얻은 시골총각은 마누라의 성원에 힘입어 또 다시 과거 시험에 도전합니다. 그 결과 총각은 끝내 과거시험에 장원급제 했고, 어느 지방의 군수로 부임되었습니다.

후에 총각과 처녀는 아들 딸 많이 낳고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

여러 분, 이만 하면 어머니가 왜 아버지에게 시집갔는지 알만하시겠습니까. 지금 생각해보니 그 서울아가씨는 저의 어머니였습니다. 우리 어머니 참 낭만적입니다. 원래 시 잘 쓰고, 춤 잘 추고, 노래 잘 하고... 젊었을 때는 문학소녀였습니다.

햐여튼...

우리 아버지에게 시집갔기에 늙으막에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지금은 좋은 집에서 남들이 다 부러워 할 정도로 근심거겅 없이 잘 살고 있습니다.

매일 아침에 무도장에 가서 운동 삼아 할아버지들과 한 바튀 휭 돌고, 돌아와서는 낮잠 자고, 오후에는 마을돌이를 하고, 저녁에는 한국드라마를 보고...^^

여러 분, 이젠 사랑이 뭔지 알만하시겠습니까. 넘 낭만적이지요. 나의 로맨틱한 부분도 역시 유전인 것 같습니다. 너무 로맨틱하여 현실적이 부분이 부족한게 흠입니다.

예를 들면, 장가 못간 이유의 하나라고 할까..^^

믿거나 말거나, 이 자리에서 한 마디 시집 못간 여성동무들에게 충고를 합니다. 우리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절대 그 서울아가씨를 따라배우지 마십시오. 시대가 다릅니다. 낭만을 차아 북경교외에 가서 아무 집이나 들어가 하루 밤 잘못 자면 신세 망칩니다.

잘못하다간 3000원에 싼동의 할아버지들에게 팔려갈 수도 있습니다.

진짜 낭만적이고 안전한 곳이 하나 있는데, 제가 주소 줄게요. 꼭 한번 가보세요.

우편번호: 100881
주소: 북경시 해전구 북경개학 중관원 ***-*** 이상 거짓부리 하나도 없습니다. 오타도 없습니다. 우리 집 주소이니깐..^^

어디 우리 어머니와 같은 그런 로맨틱한 아가씨가 없을까.
2005-11-17 17:3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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