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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 둥지(연재3)
icon 까마귀
icon 2005-11-17 17:3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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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 둥지> 연재3:


오늘은 12월 31일, 양력설 이브입니다. 싫어도 보내야 하는 날, 기념할 만한 날입니다. 이런 날에는 술 한잔 하는 법이지만, 그럴 여유가 없습니다. 작전 준비가 다 된 것 같습니다.

몸 단장도 깔끔히 했고, 굽 높은 구두도 번쩍번쩍, 명함장은 남성호르몬 냄새가 풀풀 나는 그런 거, 금방 명함장 집에서 찾아왔습니다.

작전 개시 해볼까. 잠깐만, 담배 한대 태우고..^^

담배 한대 태우는 동안, 여러분들 심심하지 않게 우리 어머니 얘기나 좀 해볼까요. 많은 분들 우리 어머니가 어떤 분이신지 궁금하리라 생각합니다.

지금부터 들어보시면 알만하시겠지만, 사실 에 세상도 둘도 없는 대단한 어머니입니다. 저의 얘기 듣고 감동되어 눈물을 흘리시면 난 모릅니다.

*

고생 많이 하신 우리 어머니, 부잣집 아가씨였습니다. 하필이면 빈농집 맏아들인 아버지에게 시집 와, 고샘만 사서 하는지 저는 이해가 안 갑니다. 시부모 모실라, 시동생들 셈길라, 자식들 공부를 시킬라, 그 고생이 얼마나 심했는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작을 잘해 우수교원이 되었고 인민대표에도 당선되었습니다.

지금 어머니를 위하여 <며느리감 사냥작전>을 시작하면서, 다시 한번 느끼는 어머님의 위대함이지만..^^

어머니가 아버지와 연애할 때, 외할아버지가 그리도 반대해 나섰답니다. 아버지가 처음으로 어머니네 집을 방문했을 때, 외할아버지가 야단이었답니다. 어디서 저런 못사는 놈을 데려왔냐며.

외할아버지뿐만 아니라, 공부를 많이 하신 외삼촌들도 모두 반대해 나섰습니다. 여섯 형제 중에 막내로, 제일 예쁘고 귀여워하던 여동생이 못 사는 집으로, 멀리 시골로 시집가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겠지요.

그나 저나 우리 아버지네 집 정말 못 살았답니다. 얘기가 길어집니다만, 우리 할아버지가 살길을 찾아 홀홀 단신 두만강을 건어와 만주땅에 자리를 잡아놓고, 그 뒤 얼마 안되어 할머니가 한살 정도인 어린 아버지를 업고 할아버지를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항일유격대에게 편지를 나르다가, 아차 일본놈들에게 잡혀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일년 후, 감옥에서 온갖 시달림을 다 받고 돌아오더니, 안 놀던 도박바람이 나 가지고 하루 밤새에 땅도 소 두마디로 모두 잃었답니다.

그러면서 살림이 쪼들리기 시작했는데, 그래도 부지런한 할머니가 있었으니 다행이었습니다. 자식이 모두 넷이였는데, 맏아들인 아버지 하나만은 공부를 잘 시켰습니다. 덕분에 아버지는 전과대학을 나왔고 학교에서 애들을 가르치는 원급쟁이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덕분에 고중을 졸업하고 한 학교에서 사업하는 어머니를 만나게 되었고, 두 사람은 사람에 빠진 거였습니다.

두 사람의 연애사를 둘처보니, 생각밖에도 어머니가 아버지를 먼저 따른 거였습니다. 아버지가 예술에 재간이 있어 손풍금도 잘 타고 노래도 잘 했는데, 역시 예술에 흥미가 많았던 어머니가 틈을 타서 배우러 다녔답니다.

그때, 아버지의 멸명이 '메뚜기'였는데, 어머니가 지어준 거랍니다. 달래기 할 때 껑충껑충~ 하면 달는 걸 보면 딱 메뚜기 같았답니다. 그래선지 우리 집 애들은 다른 거는 못하지만 달래기를 얼마나 잘 하는지 모릅니다..ㅠㅠ

시시한 얘기는 이만하고...^^

진정한 사람은 언제나 곡절이 많은 법입니다. 빈곤도 반대의 이유였지만, 아버지가 맏이라는 사실도 반대의 이유로 되었습니다. 맏며느리란 아무 여자나 할 수 있는 거 아니랍니다. 저의 짦은 소견에는 맏며느리 자격을 가진 사람은 충분히 인민대표자격을 가질 수 있다고 봅니다.

당연히 대한민국 국회의원 자격도 있지요..^^

거짓말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어머니가 걸어온 길을 돌아다보니, 한마디로 간난곡절의 반복이었습니다. 그 많은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은 드물겁니다. 우리 아버지 여자복 하나는 있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4형제중 맏이였는데, 아래에 여동생이 하나, 남동생이 둘이 있었습니다. 여동생, 즉 저의 고모는 그때 대학을 다니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달마다 월급에서 떼내여 부쳐주었답니다. 남동생 둘은 아직 철이 없을 때였습니다.

이런 집의 맏며느리로 들어간다는 건,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고생살이 인건 두말이면 잔소리입니다.

여러 분들도 가히 짐작이 가리라 믿습니다만, 맏인가 둘째인가며 딸 가진 집들에서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던 그런 시대가 있었습니다. 나의 고향에서는 사람만 똑똑하다면야, 요즘은 크게 안 따지는데, 대한민국은 지금도 따지는 것 같습니다.

그나 저나 세상이 바뀌며, 나의 고향에서는 둘째도 셋째도 맏이도 막내도 모두 장가가기 힘들어진 것 같습니다.

시시한 얘기는 이만 하고..^^

결국 어머니는 집을 뛰쳐나와 아버지에게 시집 같습니다만, 저에게는 궁금한 점이 너무 많습니다. 아버지가 잘 생기고 멋지고 재간이 있는 건 알지만, 그리고 그 시대의 청년들이 가감히 집을 뛰쳐나오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해도, 그것 만으로는 이해하기 힘듭니다.

어머니는 왜 아버지에게 시집 갔을까.

그런데...

요즘 제가 장가갈 나이가 되니 이해가 가는 것 같습니다. 대체 어머니는 왜 아버지에게 시집 갔을까. 어머니의 입장에서 보면 돈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가문도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맏아들도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2005-11-17 17:3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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