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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 행장(行狀)
icon 김민수
icon 2012-10-16 10:5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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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 행장(行狀)





행장(行狀)에“오호 통재라. 높은 하늘이 슬픔을 주시어 우리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께서 무오년(1918) 12월 20일 묘시(卯時)에 경운궁(慶運宮)의 함녕전(咸寧殿)에서 돌아가시니 나이 67세에 7일이 넘으셨다. 대소 신하와 인척들이 그 공덕을 살피고 행적을 드러내어 의논하여 시호를 올리기를, ‘문헌 무장 인익 정효(文憲武章仁翼貞孝)’라 하였다. 황태자 전하(殿下)께서 신(臣) 이재완(李載完)이 궁궐을 출입한 지 50여 년으로 공덕을 가장 깊이 알고 있다 하여 신께 명하여 훌륭하신 덕을 글로 형상화하라고 명하시니 신이 깜짝 놀라고 두려워했으나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습니다. 또 아첨하는 말이 지나쳐서 사실과 다르게 하지 못하고 감히 피눈물을 닦으며 이를 서술합니다.삼가 살피건대, 고조 광무제의 성(姓)은 이씨(李氏)요, 휘(諱)는 희(熙), 자(字)는 성림(聖臨)인데, 처음의 휘(諱)는 재황(載晃)이고 자(字)는 명부(明夫), 호(號)는 주연(珠淵)이었다. 장조(莊祖)의 별자(別子)인 은신군(恩信君) 충헌공(忠獻公) 휘(諱) 진(禛)께서 후사(後嗣)가 없어, 순조(純祖)께서 명하여 인조(仁祖)의 별자(別子) 인평대군(麟坪大君) 충경공(忠敬公) 휘(諱) 요(㴭)의 5세손 진사(進士) 증 영의정(贈領議政) 휘(諱) 병원(秉源)의 둘째 아들 구(球)를 후사로 삼고 작위를 봉하여 남연군(南延君)이라 하고 시호(諡號)를 충정(忠正)이라 하였다. 남연군(南延君)의 넷째 아들 흥선대원왕(興宣大院王) 휘(諱) 하응(昰應)께서는 여흥(驪興) 민씨(閔氏) 판돈녕(判敦寧) 효헌공(孝獻公) 치구(致久)의 따님을 취하여 임자년(1852) 7월 25일 고조 광무제께서 청니방(靑泥坊)의 사저(私邸)에서 탄신하였다. 어려서부터 모습이 비범하여 멋대로 놀지 아니하였다. 관상을 보는 자가 한 번 보고 놀라 뜰아래로 내려가 엎드려 아뢰기를, ‘다른 날에 나라의 주인이 되시리라’고 하였다. 총명과 지혜가 절륜하여 문장에는 배워서 능하지 않음이 없었다. 계해년(1863)에 철종(哲宗)이 돌아가시고 후사(後嗣)가 없자 신정왕후(神貞王后)께서 대신에게 명하여 모셔오게 하여 익성군(翼成君)에 봉하고 익종(翼宗)의 양자로 삼아 종통(宗統)을 잇게 하였다. 이때 신정왕후(神貞王后)께서는 왕이 어리시기 때문에 국가의 법에 따라 주렴을 드리우고 정사(政事)에 참여하였는데, 크고 작은 일은 반드시 여쭈어 결정하였다. 왕대비(王大妃)를 대왕대비전(大王大妃殿)으로 높이고, 대비(大妃)를 왕대비전(王大妃殿)으로 하였으며, 중궁(中宮)은 대비전(大妃殿)으로 하였다. 대행대왕(大行大王)의 시호(諡號)를 올리기를, ‘문현 무성 헌인 영효(文顯武成獻仁英孝)’라 하였고, 묘호(廟號)는 ‘철종(哲宗)’이라 하였다. 다음 해인 갑자년(1864)에 예릉(睿陵)에 크게 장례지냈다.고조 광무제께서는 날마다 경연(經筵)을 열고 강관(講官)에게 이르기를, ‘혹시 잘못 읽는 것이 있으면 서산(書算)에 계산하지 말라.’ 하였다. 이 때 대왕대비께서 도와서 인도하고 부지런히 이끌며, 경연의 신하들이 정성을 다하여 바르게 힘쓰니 성학(聖學)이 날로 고명해졌다. 비둘기 조롱을 뜰에 두었는데 강관 김학성(金學性)이 그 조각 장식이 지나치게 화려하다고 여쭙자 버리도록 명하였다. ‘희문과(喜聞過)’ 3자를 쓰니 대왕대비께서 경성전(慶成殿)의 문설주에 편액을 만들어 달도록 하셨다. 뇌물을 엄하게 금하고 탐학을 징계하는 법을 펴서 서정(庶政)을 일신하였다.




병인(丙寅) 2월 철종(哲宗)을 태묘(太廟)에 모시고 대왕대비전에 존호를 올려 ‘순화(純化)’라 하였고, 왕대비전에 존호를 올려 ‘홍성(弘聖)’이라 하였고, 대비전 존호는 ‘휘성(徽聖)’이라 하였다. 이 달에 대왕대비전에서 수렴을 거두니 고조 광무제께서 친정(親政)을 시작하였다. 대신들을 예당(禮堂)에 불러 보시고 교시(敎示)하여 이르기를, ‘익종(翼宗), 헌종(憲宗), 철종(哲宗)의 융성한 덕과 큰 업적은 하늘같이 높고 땅처럼 두텁다. 나 소자가 왕위를 계승한 이후 아직도 대왕대비의 크나큰 공렬(功烈)을 현양(顯揚)하지 못하였으니 또한 마땅히 옥에 새겨 첩문(牒文)을 만들어 받들어 해와 같은 공렬을 묘사하고 아울러 아름다운 의식을 거행하고자 한다.’ 하였다.익종께 존호를 추상(追上)하기를 ‘융덕 순공 독휴 홍경(隆德純功篤休弘慶)’이라 하였고, 대왕대비전에 존호를 가상(加上)하기를 ‘문광(文光)’이라 하였다. 헌종께 존호를 추상하기를 ‘지성 광덕 홍운 창화(至聖廣德弘運彰化)’라 하였고, 효현 왕후(孝顯王后)께는 ‘수원(粹元)’이라는 존호를 올렸다. 왕대비전에 가상하는 존호는 ‘장순(章純)’이라 하였고, 철종께 추상하는 존호는 ‘흠명 광도 돈원 창화(欽明光道敦元彰化)’라 하였고, 대비전에 가상하는 존호는 ‘정원(正元)’이라 하여 각전(各殿)에 임하여 축하를 드렸다.3월. 여흥(驪興) 민씨(閔氏)를 왕비로 책봉하니 여성 부원군(驪城府院君) 순간공(純簡公) 민치록(閔致祿)의 따님이다. 그리고 승지(承旨)를 보내 여양 부원군(驪陽府院君) 내외와 여성 부원군(驪城府院君) 내외의 사판(祠版)에 치유(致侑)하였다.7월. 관서(關西) 지방에 외국 배가 내양(內洋)에 들어오니 도신(道臣) 박규수(朴珪壽)가 쳐서 무찔렀는데, 경외(京外)에 군무(軍務)를 명하고 잘 거행하도록 강조하였다. 사교(邪敎)와 이학(異學)을 엄히 배척하여 모두 없앴다.8월. 삼반 예식(三班禮式)을 반포하여 위의와 계급의 구별을 정하였다. 부호군(副護軍) 기정진(奇正鎭)이 척사소(斥邪疏)를 올리니 온화한 비답을 내리고 흡족하게 받아들였다. 이달에 서양의 선박이 와서 강화부(江華府)를 범하였다. 지키던 신하 이인기(李寅夔)가 막지 못하자 명하여 파출시켰다. 순무영(巡撫營)을 설치하여 이경하(李景夏)를 순무사(巡撫使)를 삼고 이용희(李容熙)로 중군(中軍)을 삼아 한 달 넘게 지키게 하였다.9월. 천총(千總) 양헌수(梁憲洙)가 정족 산성(鼎足山城)에서 대파하니 적이 돛을 올리고 달아났다. 공조 참판(工曹 參判) 이항로(李恒老)를 성정각(誠正閣)으로 불러들여 만났다. 이항로가 좋은 계책과 대의(大義)를 아뢰니 이를 즐겁게 받아들이고 경연에 출입하라고 명하였다.11월. 다음 해는 대왕대비의 나이 육순(六旬)이 되므로, 대신들과 예당(禮堂)이 의논하여 익종께 ‘홍운 성렬 선광 준상(洪運盛烈宣光濬祥)’이라는 존호를 추상하였고, 대왕대비전에는 ‘원성(元成)’이라는 존호를 가상하였다.




정묘년(1867)에 고려(高麗) 왕릉을 보수하도록 명하였다. 사창법(社倉法)을 행하고 토호(土豪)가 무단(武斷)을 행하는 것을 금하였다.11월. 경복궁을 중건하고 근정전(勤政殿)에 나가 축하를 받았다.무진년(1868) 정월 초하룻날 대왕대비의 나이 61세가 되었다. 인정전(仁政殿)에 나가 친히 치사(致詞)와 전문(篆文)과 표리(表裏)를 올리고 축하하는 교서(敎書)를 반포하였다. 조정(朝廷)의 신하 가운데 61세되는 사람들은 각각 1등급씩 가자(加資)하도록 명하였다.3월. 건릉(建陵)과 현륭원(顯隆園)에 나가 친히 제사를 지냈다.7월. 경복궁으로 이어(移御)하고 종친부(宗親府)와 정부(政府), 삼군부(三軍府)에 선온(宣醞)하였다. 개국공신(開國功臣) 정도전(鄭道傳), 남은(南誾), 이직(李稷), 심덕부(沈德符)의 묘소에 제사를 지내도록 명하였다.8월. 건원릉(建元陵), 숭릉(崇陵), 수릉(綏陵), 경릉(景陵)에 나가 친히 제사를 올렸다.9월. 대왕대비전의 나이가 주갑(周甲)1) 이 되었으므로 ‘숙렬(肅烈)’이라는 존호를 올렸다.11월. 다음 해가 익종이 탄신한 지 주갑(周甲)이 되는 해이므로 추상 존호를 ‘요흠 순공 우근 탕정 대왕(堯欽舜恭禹勤湯正大王)’이라고 하였다. 대왕대비전에는 ‘명수(明粹)’라는 존호를 가상하였다.12월 6일. 근정전에 납시어 옥책문(玉冊文)과 금보(金寶)를 바치고 진하(陳賀)를 받았다. 이어 강녕전(康寧殿)에 음식을 올리고 대신 이하에게도 음식을 하사하였다.기사년(1869)에 문묘(文廟)의 중건을 마쳤다. 친히 전배(展拜)를 행하고 비천당(丕闡堂)에 나가서 선비들에게 응제시(應製試)를 보였다.8월, 수릉(綏陵)에 나가 친히 제사를 드렸다. 익종의 묘호(廟號)를 추증한 일로 문관(文官)은 시종, 음관(陰官)은 목사(牧使), 무관(武官)은 선전관(宣傳官) 이상으로 61세가 된 사람에게 각각 한 자급씩 가자하였다.경오년(1870) 3월. 건릉, 현륭원에 나가 친히 제사를 행하고, 화성(華城)의 행궁(行宮)에서 소대(召對)를 행하였다.8월. 경주(慶州) 숭덕전(崇德殿)과 신라(新羅) 10왕을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보수하고 관청을 세워 수호하도록 하였다.9월. 궁문에 쇠북을 달았다. 옛 법을 거듭 밝혀 사족(士族)들의 묘지의 한계를 정하여 소민(小民)을 편하게 하였다.




신미년(1871) 3월. 친히 적전(籍田)을 갈고 특별히 권농 윤음(勸農綸音)을 팔도(八道)와 사도(四都)에 내렸다. 그리고 선비들에게 알성시(謁聖試)를 보게 하였다.4월. 서양(西洋) 선박이 또 강화부(江華府)를 범하여 중군(中軍) 어재연(魚在淵)이 죽었다. 얼마 되지 않아 적이 물러갔다.11월. 대신(大臣)과 예조당상을 소견하고, 내년이 태조(太祖)가 개국한 지 8번째 회갑이 되는 해여서 태조께 ‘응천 조통 광훈 영명(應天肇統光勳永命)’이라는 존호를, 태종(太宗)께는 ‘건천 체극 대정 계우(建天體極大正啓佑)’라는 존호를 올렸다.임신년(1872) 정월에 대신 한치규(韓緻奎)가 성학(聖學)을 열심히 할 것을 아뢰니 충간(忠諫)이라고 칭찬하고 특별히 가자하도록 명하였다.3월. 제릉(齊陵), 후릉(厚陵)에 나가 친히 제사를 지내고 도중에 개성부(開城府)에서 머무르면서 고려의 현릉(顯陵)에 전작례(奠酌禮)를 거행하였다. 그리고 개성(開城) 문묘(文廟)에 나가 전배(展拜)하고 정시(庭試)를 열어 선비를 취하였다. 이 행차에서 큰 비로 진흙탕이 되어 군오(軍伍)가 법도를 잃었다. 조정의 신하들이 영솔한 장수를 죄줄 것을 청하였으나 특별히 문제삼지 말라고 명하였다.11월에 조정의 신하들이 9년 동안 임금의 자리에 있으면서 덕과 공훈이 높으시니 의당 간책(簡冊)을 만들어 찬양해야 한다는 빈계(賓啓)와 정계(庭啓)가 그치지 않았다. 이에 ‘통천 융운 조극 돈륜(統天隆運肇極敦倫)’이라는 존호를 올리고, 대왕대비전에는 ‘협천(協天)’이라는 존호를, 왕대비전에는 ‘정휘(貞徽)’이라는 존호를, 대비전에는 ‘수령(粹寧)’이라는 존호를, 중궁전(中宮殿)에는 ‘효자(孝慈)’라는 존호를 올렸다.계유년(1873) 4월에 대왕대비전에 진작례(進爵禮)를 행하였다.10월. 도성(都城)의 문세(門稅)를 없애고 또 원납전(願納錢)과 결렴(結斂)을 없앴다. 모두 경복궁을 지을 때 만들어진 것이었다. 광해군(光海君) 대의 죄인 한효순(韓孝純)과 기사년(1689)의 죄인 목래선(睦來善)과 이현일(李玄逸)의 관작을 추탈하도록 명하였는데, 호조 참판(戶曹參判) 최익현(崔益鉉)이 소(疏)를 올려 청하였기 때문이다. 최익현의 상소가 글이 심히 고지식하여 여러 아래 사람들이 죄줄 것을 청하였으나 왕께서 끝내 너그럽게 용납하시고 장려하는 뜻으로 발탁하시니 사람들이 더욱 임금의 아량에 복종하였다.12월. 자경전(慈慶殿)이 불타 창덕궁(昌德宮)으로 이어하였다.




갑술년(1874) 2월. 원자(元子)가 탄생하였다. 이달에 만동묘(萬東廟)를 복설하도록 명하고 문묘(文廟)에 나가 전배(展拜)하였다. 막혔던 서류(庶類)의 벼슬길을 소통(疏通)시켰다.을해년(1875). 원자를 왕세자(王世子)로 책봉하였다.5월. 경복궁으로 이어(移御)하였다.11월. 익종의 세실(世室)을 미리 정하고 ‘계천 건통 신훈 숙묘(啓天建統神勳肅謨)’라는 존호를 추상하고, 대왕대비전에는 ‘융목(隆穆)’이라는 존호를 가상하였다.병자년(1876) 정월. 일본국(日本國)에서 파견한 사신(使臣)이 강화부(江華府)에 도착하여 통상조약(通商條約)을 개정할 것을 청하였다. 판부사(判府使) 신헌(申櫶)과 부총관(副總管) 윤자승(尹滋承)을 보내어 접견한다는 비답을 내려 허락하였다. 그 후 서방의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 여러 나라가 다투어 와서 조약을 정하였다. 이로부터 국가에 많은 일이 생겼다. 여름에 큰 한발이 발생하였는데, 윤 5월. 사직단(社稷壇)에서 친히 기도를 드리자 단비가 많이 내렸다.10월. 농사가 흉년이 되니 경외(京外)에 술 만드는 것을 금하였다.11월. 교태전(交泰殿)에 불이 났다. 다음 해가 대왕대비전의 보령(寶齡)이 7순(七旬)이 되므로, 익종께 ‘건대 곤후 광업 영조(乾大坤厚廣業永祚)’라는 존호를 추상하였다. 대왕대비전에는 ‘수령(壽寧)’이라는 존호를 가상하였다.정축년(1877) 정월. 여러 도(道)에 진휼(賑恤)을 하도록 명령하고 어사(御使)를 파견하여 진휼을 감독하게 하였다.2월. 송병선(宋秉璿)을 경연관(經筵官)으로 선발하였다.11월. 대왕대비전이 명년에 보령(寶齡)이 71세 망팔(望八)이 되므로 ‘희강(禧康)’이라는 존호를 가상하였다.무인년(1878) 정월. 대비전이 승하(昇遐)하여 ‘철인(哲仁)’이라는 존호를 올리고, 9월에 예릉(睿陵)에 합장하였다.11월. 명년이 익종께서 혼인한 지 61년이 되는 해〔舟梁回甲〕이므로 순조(純祖)께 ‘계통 수력 건공 유범(啓統垂曆建功裕範)’이라는 존호를 올리고, 순원왕후(純元王后)께는 ‘수목(粹穆)’이라는 존호를, 익종께는 ‘장의 창륜 행건 배녕(莊義彰倫行健配寧)’이라는 존호를 추상하였다. 대왕대비전께는 ‘현정(顯定)’이라는 존호를 가상하였다.




기묘년(1879) 8월. 경외에 괴질이 크게 성행하니 특별히 여제(厲祭)를 거행하여 병이 물러가기를 기원하였다.12월. 세자(世子)가 천연두를 앓다가 회복이 되어 태묘(太廟)에 고하고 사면령(赦免令)을 반포하였다.경진년(1880) 9월. 경연관으로 김낙현(金洛鉉), 박성양(朴性陽), 이상수(李象秀)를 선발하였다.임오년(1882) 2월 세자의 가례(嘉禮)를 거행하였다. 여흥 민씨 좌찬성(左贊成) 민태호(閔泰鎬)의 따님을 맞아들였다.6월. 훈련도감(訓練都監)의 군인들이 군향(軍餉) 문제를 구실삼아 난을 일으켰다. 중궁전이 충주(忠州)지방으로 피하였다가 난이 진정된 후 돌아왔다.11월. 익종께 ‘기태 수유 희범 창희(基泰垂裕熙範昌禧)’라는 존호를 추상하고, 대왕대비전에는 ‘휘안(徽安)’이라는 존호를 가상하였다. 겨울에 감생청(減省廳)을 설치하여 불필요한 관청과 관리들을 헤아려 혁파하였다.계미년(1883) 10월. 문열공(文烈公) 조헌(趙憲),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을 문묘에 배향하라고 명하였다.11월. 치적이 좋은 수령(守令)들을 표창하라고 명하였다.갑신년(1884) 윤5월. 의제(衣制)를 변통해서 간편하게 하도록 명하였다.10월. 적도(賊徒)들이 우정국(郵政局)에서 민영익(閔泳翊)을 저격하고, 임금에게 경우궁(景祐宮)으로 옮길 것을 권하였다. 일본 공사(日本公使)가 병력을 끌고 호위하려 왔는데 실은 임금은 포위하여 핍박하기 위해서이다. 다음날, 청(淸)나라 장수 원세개(袁世凱) 등이 입궐하여 격투를 벌였다. 왕께서 하도감(下都監)에 있던 청 나라 군진(軍鎭)으로 피난하였다가 난이 끝나자 돌아왔다.을유년(1885) 정월. 관북(關北) 10읍에 진휼(賑恤)을 베풀라고 명하였다. 경복궁으로 이어하셨다.7월. 강 연안의 명목 없는 세금을 혁파하도록 명하였다.8월. 대원왕(大院王)께서 천진(天津)에서 돌아왔다.9월. 각 궁방(宮房)에서 새로 만든 경외의 잡세(雜稅)를 혁파하도록 명하였다.11월. 내년이 대왕대비전의 보령(寶齡)이 장차 8순(八旬)에 오르기 때문에 ‘흠륜(欽倫)’이라는 존호를 가상하였다.12월. 내탕전(內帑錢) 2만 냥을 하사하여 영남(嶺南) 지방을 진휼하는 데 보태도록 하였다.병술년(1886) 2월. 공사 노비(公私奴婢)의 신분이 대대로 전하는 일이 없게 하라고 명하여 신라(新羅)와 고려(高麗) 이래의 나쁜 관습을 단번에 씻어버렸다.7월. 육영 공원(育英公院)을 설립하고 조신(朝紳) 중 총명하고 뛰어난 자를 선발하여 각 국의 언어를 가르쳤다.12월. 내년이 익종이 대리 청정(代理聽政)한 지 61년이 되고, 대왕대비의 보령이 팔순이 되므로 익종께 ‘입경 형도 선헌 소장(立經亨道成獻昭章)’이라는 존호를 추상하고, 대왕대비께 ‘홍경(洪慶)’이라는 존호를 가상하였다.


정해년(1887) 11월. 내년이 대왕대비의 연세가 81세 되는 해이므로 ‘태운(泰運)’이라는 존호를 가상하였다.무자년(1888) 정월. 세자가 상소하여 임금의 공덕을 높이는 ‘정성 광의 명공 대덕(正聖光義明功大德)’이라는 존호를 올렸다. 계유년(1873)의 예에 의거하여 각전(各殿)에 모두 존호를 올렸다. 대왕대비전에는 ‘창복(昌福)’, 왕대비전에는 ‘장소(莊昭)’, 중궁전에는 ‘원성(元聖)’이라는 존호를 올렸다.기축년(1889) 정월. 삼남(三南) 지방의 작년 농사가 흉년이므로 진휼(賑恤)을 베풀어 구제하였다.8월. 지평현(砥平縣)의 패유(悖儒) 한용석(韓容奭)을 섬으로 귀양 보냈는데, 충현(忠賢)을 모욕한 죄를 바로잡기 위해서이다.11월. 봉조하(奉朝賀) 김상현(金尙鉉)이 소(疏)를 올려 청하니 영종(英宗)의 묘호(廟號)를 영조(英祖)로 바꾸고, 시호(諡號)를 ‘정문 선무 희경 현효(正文宣武熙敬顯孝)’라 하고 ‘중화 융도 숙장 창훈(中和隆道肅莊彰勳)’이라는 존호(尊號)를 추상하였다. 정성 왕후(貞聖王后)께는 ‘원열(元烈)’, 정순 왕후(貞純王后)께는 ‘정현(正顯)’이라는 존호를 추상하였다.12월. 문묘(文廟)에 나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왕대비전(王大妃殿)에 ‘단희(端禧)’라는 존호를 가상하였다. 왕세자(王世子)가 내년이 중전(中殿)의 보령(寶齡)이 40이 된다고 하여 존호를 올릴 것을 소청하고 정계(庭啓)까지 하니 어쩔 수 없이 따랐다. 임금께 가상하는 존호(尊號)는 ‘요준 순휘 우모 탕경(堯峻舜徽禹謨湯敬)’이었고, 대왕대비전(大王大妃殿)에는 ‘희상(熙祥)’, 왕대비전(王大妃殿)에는 ‘수현(粹顯)’, 중궁전(中宮殿)에는 ‘정화(正化)’라는 존호를 올렸다.경인년(1890) 4월. 대왕대비전이 승하(昇遐)하였다. 고조 광무제께서 붙잡고 부르짖으며 가슴을 두드리며 통곡하므로 좌우가 차마 쳐다볼 수가 없었다. 빈청(賓廳)에서 의논하여 시호를 ‘신정(神貞)’이라 하였고, 휘호(徽號)는 ‘경훈 철범(景勳哲範)’이라 하였다. 8월에 수릉(綏陵)에 부장(祔葬)하였다.10월 익종(翼宗)에게 ‘치중 달화 계력 협기(致中達化繼曆協紀)’라는 존호를 추상하고, 신정 왕후(神貞王后)에게는 ‘익모(翼謨)’라는 존호를 추상하였다.임진년(1892) 6월. 세자(世子)가 왕의 나이 41세망오(望五)가 되었다 하여 상소를 올려 존호 올리기를 청하여 ‘응명 입기 지화 신열(應命立紀至化神烈)’이라는 존호를 올렸다. 익종에게 ‘강수 경목 준혜 연지(剛粹景穆峻惠衍祉)’라는 존호를, 신정 왕후에게는 ‘예헌 돈장(睿憲敦章)’이라는 존호를 추상하고, 왕대비전에는 ‘의헌(懿獻)’, 중궁전에는 ‘합천(合天)’이라는 존호를 가상하였다.




계사년(1893) 8월. 문묘에 나아가 친히 석전제(釋奠祭)를 거행하고 ‘정심 공부(正心工夫)’라는 네 글자를 써서 유생(儒生)들에게 보였다.10월. 선조(宣祖)가 환궁(還宮)한 지 9갑(甲)이 되므로 경운궁(慶運宮)에 나가 즉조당(卽祚堂)에 전배(展拜)하고, 대신(大臣)을 보내 목릉(穆陵)에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갑오년(1894) 2월. 고부(古阜)의 백성들이 군수(郡守) 조병갑(趙秉甲)의 탐학으로 인하여 소요를 일으키자 근처 읍 사람들이 향응(響應)하였다. 이에 초토사(招討使) 홍계훈(洪啓薰)에게 병사를 이끌고 가서 정벌하고 괴수들을 죽이도록 명령하였다.6월. 정부(政府)에 명하여 폐정(弊政)을 혁파하도록 명하였으나 난민(亂民)이 잠깐 잠잠해졌다가 얼마 후에 일어나니 순무영(巡撫營)을 설치하여 신정희(申正熙)를 영사(營使)로 삼아 이를 토평하게 하였다. 이 때에 청(淸) 일(日)전쟁이 시작되어 시사(時事)가 크게 변하였다. 교정청(校正廳)을 설치하여 관제(官制)를 변화시키고 전날의 불필요한 관청과 관리를 폐지하고 다만 의정부(議政府)와 6부(六部)를 설치하여 이목(耳目)을 쇄신하였다.을미년(1895) 정월. 현명하고 능력 있으며 재예와 덕행이 방정한 선비를 천거하도록 명하였다.2월.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하라고 명하였다.8월. 적신(賊臣) 우범선(禹範善) 등이 변을 일으켜 명성황후(추책)가 붕어하였다.10월. 발상(發喪)하였다.11월. 내각(內閣)의 의논으로 인하여 대군주 폐하(大君主陛下)라 호칭하게 되었다. 왕대비전은 왕태후 폐하(王太后陛下), 왕비는 왕후 폐하(王后陛下), 왕세자는 왕태자(王太子), 왕세자빈은 왕태자비(王太子妃)로 호칭하였다. 그리고 건양(建陽)이라는 연호(年號)를 쓰고 체발령(剃髮令)을 내리고 태양력(太陽曆)을 사용하였다.12월. 러시아 공사관(公使館)으로 임시로 옮겼다.정유년(1897) 정월. 경운궁(慶運宮)으로 이어하였다. 빈청(賓廳)에서 대행 왕후(大行王后)의 시호를 ‘명성(明成)’으로 올렸다.7월. 연호(年號)를 광무(光武)라 개정하였다.9월. 여러 신하들의 간곡한 청으로 황단(皇壇)에 제사를 지내고 황제(皇帝)에 즉위하여 국호(國號)를 ‘대한(大韓)’으로 고쳤다. 왕태후(王太后)를 높여 명헌태후(明憲太后)라 하고, 명성 왕후(明成王后)를 황후로 추책(追冊)하고 왕태자를 황태자(皇太子), 왕태자비를 황태자비(皇太子妃)로 하였다. 이달에 귀인 엄씨(貴人嚴氏)가 우리 동궁(東宮)을 낳았다. 처음에는 영왕(英王)으로 봉하였다.10월. 명성황후(明成皇后)를 홍릉(洪陵)에 장사지냈다.




기해년(1899) 6월. 국조(國祖)인 사공공(司空公)의 묘소가 있는 봉산(封山)이 전주(全州) 건지산(乾止山)에 있는데 재신(宰臣) 이재곤(李載崐)을 보내어 봉심(奉審)하도록 하였다. 조경단(肇慶壇)을 설치하고 관리를 두어 지키게 하였다. 국조(國祖)인 장군공(將軍公)의 묘는 삼척(三陟)의 노동(蘆洞)에 있고 배위(配位) 이씨(李氏)의 묘는 그 옆 동산(東山)에 있었는데 재신 이중하(李重夏)를 보내어 봉심하고 무덤을 쌓게 한 후 준경묘(濬慶墓), 영경묘(永慶墓)라 칭하고 관리를 두어 지키게 하였다. 모두가 선조(先祖)들이 하지 못했던 일인데 고조 광무제의 신념에 의해 결단한 것이다. 장헌세자(莊獻世子)를 장종(莊宗)으로, 혜빈(惠嬪)을 헌경왕후(獻敬王后)로 추숭(追崇)하고, 정종(正宗)에게 ‘경천 명도 홍덕 현모(敬天明道洪德顯謨)’, 효의 왕후(孝懿王后)에게는 ‘장휘(莊徽)’라는 존호를 추상하였다.11월. 태조를 고황제(高皇帝)로, 신의(神懿), 신덕(神德) 두 왕후를 고황후(高皇后)로 추존하였다. 장종(莊宗)을 장조 의황제(莊祖懿皇帝), 헌경왕후(獻敬王后)를 의황후(懿皇后), 정종(正宗)을 정조 선황제(正祖宣皇帝), 효의왕후(孝懿王后)를 선황후(宣皇后), 순조(純祖)를 숙황제(肅皇帝), 순원왕후(純元王后)를 숙황후(肅皇后), 익종을 문조 익황제(文祖翼皇帝), 신정왕후(神貞王后)를 익황후(翼皇后)로 추존하여 황단(皇壇)에서 태조에 배향(配享)하는 제사를 지냈다.12월. 대신과 예조 당상을 소견하여 인조(仁祖)에게 ‘개천 조운 정기 선덕(開天肇運正紀宣德)’이라는 존호를 올렸다, 인열왕후(仁烈王后)의 존호는 ‘정유(正裕)’, 장렬 왕후(莊烈王后)의 존호는 ‘숙목(淑穆)’, 효종(孝宗)의 존호는 ‘흠천 달도 광의 홍렬(欽天達道光毅弘烈)’, 인선 왕후(仁宣王后)의 존호는 ‘홍범(弘範)’이라 하였다.경자년(1900) 정월. 황태자(皇太子)가 상소하여 명헌태후(明憲太后)의 보령이 칠순이 되고, 성수(聖壽)가 오순이 되니 존호를 가상할 것을 청하였다. 고조 광무제의 존호는 ‘외훈 홍업 계기 선력(巍勳洪業啓基宣曆)’, 명헌태후(明憲太后)의 존호는 ‘강유(康裕)’라 하였고, 명성황후(明成皇后)에게 추상한 존호는 ‘홍공(洪功)’이라 하였다.윤 8월. 선원전(璿源殿)에 화재가 났다. 소복(素服)을 입고 가서 곡(哭)을 하는 예를 거행하였다.




신축년(1901) 11월. 내년이 성수(聖壽) 51세가 되므로 동궁(東宮)이 여러 번 상소하여 존호를 가상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건행 곤정 영의 홍휴(乾行坤定英毅弘休)’라는 존호를 올렸다. 문조(文祖)에게 ‘굉유 신휘 수서 우복(宏猷愼徽綏緖佑福)’이라는 존호를 추상하고, 익황후의 존호는 ‘계지(啓祉)’로 하였다. 명헌태후에게 ‘유녕(裕寧)’이라는 존호를 가상하고, 명성황후(明成皇后)에게는 ‘성덕(誠德)’이라는 존호(尊號)를 추상하였다.임인년(1902) 3월.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영조(英祖) 이후 처음있는 성대한 일이었다.계묘년(1903) 정월. 호남(湖南)의 사환미(社還米) 2만 석을 관북(關北)으로 옮겨 흉년을 당한 백성을 구하도록 하였다.11월. 명헌태후가 붕어하였다. ‘효정(孝定)’이라는 시호를 올리고 휘호는 ‘자온 공안(慈溫恭安)’이라 하였다. 정부(政府)에 명하여 업무가 없는 관청을 혁파하도록 하였다.갑진년(1904) 정월. 효정황후(孝定皇后)를 경릉(景陵)에 합장하였다.4월. 학교(學校)를 증설하여 시대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도록 명하였다.8월. 잡세를 엄금하도록 거듭 명하였다.9월. 태자비(太子妃) 민씨(閔氏)가 승하하였다. 시호를 ‘순명(純明)’이라 하고 11월에 유강원(裕康園)에 장사지냈다.12월. 찬정(贊政) 최익현(崔益鉉)에게 승지(承旨)를 보내 올라오도록 하니, 좋은 계책을 아뢰었다.을사년(1905) 11월. 일본(日本)과 을사늑약이 늑결되었다. 상신(相臣) 조병세(趙秉世), 재신(宰臣) 민영환(閔泳煥), 좨주(祭酒) 송병선(宋秉璿)이 이 때문에 졸하였다.병오년(1906) 12월. 해풍 부원군(海豐府院君) 윤택영(尹澤榮)의 따님을 태자비로 책봉하였다.정미년(1907) 6월 9일. 황태자에게 국정(國政)을 대리하도록 명하였다. 지난 10월 큰 별이 동방에 떨어졌는데 소리가 우레와 같고, 섬광이 번쩍이다가 얼마 후에 그쳤다. 나라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하였는데, 두 달이지나 옥궤(玉几)의 명을 받을 줄 어찌 예상했겠는가? 붕어하신 날 도성(都城)의 인사와 여인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를 풀고 대궐 앞으로 달려와 부르짖으며 눈물을 흘렸는데, 그 소리는 천지를 진동하며 온 나라에서 밤낮으로 그치지 않았다. 문상(問喪)하는 날에는 모두가 어린 아들이 죽은 어머니를 사모하는 것 같았다. 해를 넘겨 다음 해 2월 3일 을묘(乙卯)에 양주(陽州) 금곡리(金谷里) 부을원(負乙原)에 있는 홍릉(洪陵)에 크게 장사지냈다. 고조 광무제께서 평소에 묘소로 예정해 놓은 곳이며, 명성황후를 지난 10월 8일 이곳에 옮겨 모셔졌는데 지금 합봉(合封)한 것이다.명성황후에게서 4남 1녀가 탄생하였는데, 황태자 전하(殿下)의 서열은 두 번째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일찍 훙서하셨다. 완친왕(完親王) 이선(李墡)은 귀인 이씨(貴人 李氏)에게서 태어났는데 혼인 전에 훙서하셨다. 1녀(女)는 요절하였다.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은 귀인(貴人) 장씨(張氏)에게서 태어났다. 1녀(女)가 이씨(李氏)에게서 태어났으나 요절하였다. 귀인 엄씨(貴人 嚴氏)는 1남을 낳았으니 영친왕이다. 양씨(梁氏)가 1녀를 낳았는데 어리고 또 2남을 낳았다. 이씨(李氏), 정씨(鄭氏)에게 출생한 자식은 모두 요절하였다.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기우(氣宇)가 영명하여 덕성이 인후하여 어려서 임금의 자리를 이어 받았으나, 대왕대비의 가르침을 열심히 따르고 한 마음으로 효도하고 받드는 데 몸과 마음은 다하였다. 대왕대비께서 일찍이 이르시기를, ‘나는 어렵고 험한 세상을 살았는데 뜻하지 않게 늙어서 이런 즐거움을 받으니 이제부터는 걱정이 없도다.’라고 하였다.수렴청정을 그만 둔 뒤에도 크고 작은 일은 모두 여쭈어 본 후에 결정하였고, 아주 미세한 것도 거스르지 않았으며, 28년을 하루같이 어른의 뜻을 밝게 살피고 해이하지 않았다. 경인년(1890)에 상을 당하여서는 모든 장례 절차를 반드시 신중하고 정성스럽게 하여 털끝만큼도 유감이 없었다. 임진년(1892)에 태묘(太廟)에 모신 이후, 한 여름이나 심한 추위에도 반드시 매달 전배(展拜)를 행하였고, 기일(忌日)에는 해마다 능(陵)에 가서 알현하면서 영원히 사모하는 뜻을 폈다. 새로운 물건이 나오면 태묘(太廟)에 올리기 전에는 진어(進御)하지 못하게 하였다. 일찍이 누워있을 때, 중관(中官)이 진전(眞殿)을 봉심하고 들어와 여쭈니 고조 광무제가 벌떡 일어나 책망하여 말하기를, ‘어찌 나를 일어나라고 하지 않았는가? 이제부터 중관(中官)은 반드시 짐이 일어나 앉았는지를 살펴서 아뢰도록 하라.’고 하였다. 황실 계파의 책자를 살펴볼 일이 있으면 반드시 이르기를, ‘받들어 오라.’고 하여 손을 씻고 열어 보았다.백성을 불쌍히 여겨 물건을 구휼하였고 수재나 화재의 재난을 만나면 반드시 내탕금을 내려서 구제하고, 수령과 신하들을 각별히 신칙하여 집을 지어서 정착할 살만한 곳을 마련해 주도록 하였다. 대대로 벼슬한 신하들을 온전하게 보호하여 비록 모함에 빠지더라도 형벌을 주지 않고 반드시 곡절을 살펴 죄를 말끔히 씻어주었다. 경연에 임하여서는 신채(神彩)가 장중하여 온화하면서도 위엄 있는 용모를 지녔고, 여러 신하들의 여쭙는 말씀을 대할 때는 안색이 온화하여 화락하니 각자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바를 다 말하였다. 때문에 한 번 나가 만나본 사람들은 반드시 취한 것같이 진실로 감복하니 마치 봄바람의 온화한 기운 안에 들어있는 것 같았다.여러 번 변란(變亂)을 겪으면서도 분노의 기색이 없었으며, 조용히 생각하고 깊이 계산하여 시기나 형편에 잘 맞게 처신하였다. 역대의 전장(典章)과 국조(國朝)의 정식(程式)을 자선의 말처럼 외우며 마치 손바닥을 뒤집는 것같이 분명히 알았고, 한 가지 일에 닥치거나 의문 나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자세한 전례를 검토한 후 결정하니 여러 신하들이 미치지 못하였다. 근일에는 해외 각국의 산천과 도리, 인물, 습속 등과 같은 것을 모두 잘 알고 법률(法律)과 장정(章程)을 정밀하고 상세하게 하였다.곤룡포와 면류관 이외에는 무늬있는 비단을 쓰지 않았고, 평상복은 두세 번씩 빨아 입었으며, 모든 완상품과 기호품에는 욕심이 없었다. 하늘을 대하여 엄숙하고 공경하며 삼가고 하늘 빛이 비치는 곳에서는 드러누운 적이 없었다. 재이(災異)를 만나면 지성으로 경계하고 두려워하여 반찬을 줄이고 구언(求言)을 하며 자신을 돌아보며 자책하였다. 상을 내릴 때는 신중하게 하였고, 절의(節義)를 표창할 때는 자세히 살피니, 현명함이나 정절과 충성을 드러 내거나, 절개를 위해 생명을 버린 사람들, 선유(先儒)나 큰 신하로 세상에서 공경을 받는 자들 중에 관작(官爵), 시호(諡號)나, 은총(恩寵)을 받지 못한 자가 없었으며, 제사를 지내서 이를 표창하였다. 옥사(獄事)를 살필 때는 반드시 신중하게 심의하여 가벼운 처벌에서 판결이 잘못될지언정 보전시키는데 주력하였다. 초야(草野)에서 독서하는 선비에게는 반드시 교지를 내려 돈독히 권면하여 표창하여 추켜세워서 비록 조정으로 맞아들이지 못하더라도 선비들의 기풍이 일어나는 본보기가 되게 하였다.




고조 광무제가 예전에 경연에 임하여 논어(論語)를 강하였는데, 효제(孝弟)가 인(仁)의 근본이라 하는데 이르러, 강관(講官)이 글의 뜻을 설명하자 왕이 이르기를, ‘요(堯) 순(舜)의 도(道)는 효제뿐이니 인(仁)의 근본이 효제(孝弟)에 있을 뿐만 아니라, 다스림의 근본 또한 효제에 있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요(堯) 순(舜)을 본받고자 하면 먼저 조종(祖宗)을 본받아야 한다. 우리나라의 열성조(列聖朝)의 훌륭한 법과 아름다운 규례, 훌륭한 말씀과 선행은 역사에 다 쓰지 못할 정도로 천고에 빛나는 것이니 마땅히 이어받아 행하여야 하며, 반드시 먼 옛날의 일만을 추종할 필요는 없다’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사람이 금수(禽獸)와 다르고, 중국(中國)이 오랑캐와 다른 것은 오륜(五倫)이 있기 때문이다. 진실로 윤리가 바르면 백성들이 교화되니 경사스러운 조짐과 평화로운 기운이 세상 구석구석까지 넘쳐 기근이나 질병의 재앙이 없어지고 천하가 태평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국가의 근본은 세자를 보양(輔養)하는 데 있다.’라고 하시고는, 신 이재완에게 명하여 삼대(三代) 이래 세자를 가르치는 법을 뽑아서 서술하도록 하였다. 신이 삼가 가의(賈誼)의 보부편(保傅編)과 선유(先儒)의 바른 논설을 모아서 바치니, 고조 광무제께서 보시고 좋다고 하시며 책상머리에 두었다. 경사에 깊은 관심을 가지시고 문장을 여사(餘事)로 여겼다. 임금의 윤음에서 드러난 것과 임금의 말씀에서 발하는 것이 모두 법도에 맞고 단아하였는데, 비각의 신하가 일찍이 주연집(珠淵輯) 10권으로 모아서 두었다. 오호라, 고조 광무제께서는 임금의 도리와 임금의 덕을 실로 갖추었도다. 그리고 부지런히 힘써 치세(治世)를 구하여 한가하게 식사하거나 주무실 겨를도 없이 40여 년을 지냈다. 감히 모르겠거니와 한 번 치세(治世) 오는 것은 아마도 천도(天道)의 기수(氣數)가 다가옴이 주야한서(晝夜寒暑)의 순환처럼 어쩔 수 없는 형세가 있으니 사람의 힘으로는 만회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황극(黃極)의 가르침을 세우고 아울러 양(陽)을 부추기고 음(陰)을 억누르는 뜻을 잡는 것에서는, 장의(張儀)와 소진(蘇秦)의 말솜씨로도 능히 다 말할 수 없고, 맹분(孟賁)과 하육(夏育)의 힘으로도 능히 빼앗을 수 없도다. 모든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황도(皇道)를 높이고 패도(覇道)를 물리치며, 중화(中華)를 지키고 오랑캐를 물리치며, 백성을 교화하여 인의 예악(仁義禮樂)의 가운데에 차차 스며들게 하였으니, 백대를 지나도 영원히 떳떳하게 할 말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 공열(公烈)이 어찌 적겠는가? 오호, 슬프도다. 신이 4년 간 기이한 질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모진 목숨 죽지 못하여 차마 행장(行狀)을 서술하는 일을 담당하게 되었도다. 가만히 생각하니 일월(日月)의 밝음과 하해(河海)처럼 넓은 경지를 나의 좁은 식견으로 헤아릴 수 없으니 단지 간략하게 하여 과장하지 않는 뜻을 따를 뿐이다. 그러나 울음을 삼키며 흐르는 눈물을 참는 말을 면하지 못하니 황공하고 간절한 마음을 막을 길이 없으니, 오호 슬프도다.”하였다.완순군(完順君) 이재완(李載完)이 지었다.
2012-10-16 10:5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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