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아더원수, 한국등 지구촌에 남긴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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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원수, 한국등 지구촌에 남긴 발자취
  • 김연려
  • 승인 2003.07.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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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외동포신문 편집국
본인은 시드니에서 자원봉사 적 성격으로 고려 없이 한 두
달에 한편 꼴로 논픽션 형식의 글을 일간지 "호주동아"에
발표하고 있습니다.
귀지의 해외통신원도 아니고 또 년령도 고희를 넘기고
알파도 붙어 있는데 반세기란 세월이 흘러간 시점에서
10일후에 맞이하는 한국전쟁 휴전 50주년 특집으로 "
맥아더원수, 한국등 지구촌에 남긴 발자취" 원고지로는
약28매 분량을 발표한바 있습니다. 별첨했으니 한번
읽어보시고 귀사의 편집방침에 맞으면 게재를 부탁합니다.
호주생활 15년이며 1988년에 신동아(新東亞 4월호) 논픽션
당선작 "경로헌장을 아십니까" 등 4편의 글을 전국판
월간잡지에 발표한바있습니다. 시드니에서
김연려


한국전쟁 휴전 50주년 특집
맥아더원수, 한국등 지구촌에 남긴 발자취
                                 글:사진 김연려(金鍊麗)

사진 1 : 브리즈번에 있는 맥아더사령부 카페 벽면에 그림장식(2002-11)
사진 2 : 인천 자유공원에 있는 맥아더원수 동상 (사진제공 이정일씨)


맥아더 기념관  
  크다란 돔(반구형-半球形)이 빌딩 중앙에 자리하고 전면에는 1미터 직경의 7개의 대리석 원주가 서있는 고색찬연(古色燦然)한 큰 빌딩 앞에 섰다. 19세기에 건축된 구(舊) 노퍽(NORFOLK) 시청건물 앞 상단에 흑색으로 각인 된 THE MACARTHUR MEMORIAL(맥아더 기념관)을 한참 쳐다보았다.  
  길이 225미터의 곡물 및 석탄운반선 WORLD ATLAS호는 북극권에 있는 노르웨이 나르비크(Narvik)항을 떠나 대서양을 건너 1975년 10월 미국 동해안 뉴포트뉴스(Newport News)항에 입항했다. 입항수속이 끝나고 잠시 이민관 및 대리점원과 차를 한잔 들며 잡담 중 선장이 한국인인 것을 알고 이웃도시 노퍽(Norfolk)에 맥아더 기념관의 존재를 알려주었다.
   기념관에 전시된 흑색의 리무진 승용차를 방문한지 28년이 지난 시점에서 글을 쓰는데도  맨 먼저 머리 속에 그릴 수 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부터 생애를 다할 때까지 맥아더 원수가 사용한 차다. 다음은 맥아더 원수의 유해가 보전된 흑색의 관(棺)이다. 이미 프랑스의 르아브르(La Havre)항에 기항하여 파리 관광 할 때 나폴레옹 기념관에서 황제의 관을 보며 동서(東西)간의 장의(葬儀)에 대한 차이를 본 탓인지 이번에는 담담했다.
  맥 원수가 한국전선에서도 쓴 미 육군 원수 정모(正帽), 맥 파이프"Mac Pipe"로 애칭이 붙은 옥수수 곰방대(corn-cob) 요사이 말로 담뱃대와 선글라스 이렇게 3종의 전시물들이 생소하지 아니했다. 6.25세대는 당시 신문사진이나 영화상연 전에 보여주던 미국 공보원 제작 "리버티 뉴스"를 통해 자주 본 탓이다.  
        
나는 꼭 돌아갑니다
  직업이 해군과 상선선원이라 필리핀 마닐라 와 그 나라 최남단의 큰 섬 민다나오의 카가얀 (Cagayan)에 기항한 적이 있다. 두 항구의 거리는 600마일 한국의 신의주와 부산간의 거리와 비슷하다. 1942년 3월11일 조그만 PT 해군보트는 맥아더 장군, 부인과 4살 된 아들 그리고 유모(乳母)와 수명의 측근 참모를 태우고 일본군의 해상 봉쇄를 몰래 뚫고 마닐라만 입구의 코레지돌(Corregidor) 섬을 탈출했다.
  이후 일본군의 감시망을 피해가며 만 2일간의 피를 말리는 항해 끝에 카가얀 근해의 조그만 비행장에 도착한다. 다시 미 공군 B-17 폭격기에 탑승하여 호주 북부의 주도(州都) 다윈(Darwin) 근처에는 3월17일에 도착했다. 맥 장군일행이 탈출한지 20여일 후에 미군과 필리핀군 7만명은 일본군에 항복했고 이들 포로들은 "죽음의 행진"으로 3만명이 희생 되였다. 호주에 온 맥 장군도 죽음의 행진 때문인지 "나는 미합중국 루우즈벨트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호주로 왔다"는 말을 몇 번했다.  

  맥아더장군 부인이 더 이상의 항공기 여행을 꺼리자 호주 내륙도시 앨리스스프링 에서   급히 차출된 특별열차로 70시간을 달려 남호주의 주도(州都) 애들레이드(Adelaide)로 이동했다. 이동 중 테로위(Terowie)라는 소도시에서 잠시 정차했을 때 기자에게 발표한 "I shall return(본인은 꼭 다시 돌아갑니다)"은 바로 전파를 타고 세계에 알려지고 태평양전쟁 중 내내 맥아더 장군의 항일 구호가 되였다.

호주속의 맥아더사령부
  1942년 3월22일 9시30분 멜버른 스펜서 기차역에 도착한 맥아더 장군은 360명의 미 육군 의장대를 사열했다. 이날 6천명의 멜버른 시민이 역 광장에 모여들어 성대히 맥 장군을 환영했다. 필자는 1997년 멜버른 컵 취재로 멜버른을 다녀왔다. 55년의 시차를 두고 스펜서역 광장에서 당시를 상상해 보았다. 어째든 맥아더 장군은 필리핀에서 패장(敗將)이 된 것은 분명한 사실인데.. 동서간 평가기준의 차이를 보게된다.
   멜버른에 개설된 맥아더사령부는 3개월만에 약1800키로 서북쪽에 위치한 항일(抗日)작전의 전진기지 브리즈번(Brisbane)으로 1942년7월20일 이전했다.
  2002년 11월28일부터 3박4일간 장미노인교실의 일원으로 시드니에서 편도 14시간의 브리즈번 기차여행을 다녀왔다. 일정 중 하루를 필자만은 맥아더장군의 발자국을 찾아났었다. 오스트레일리아 여행안내서에 소개된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는 이곳에서 시작 되였다"는 동판을 찾아 퀸 스트리트 의 T&G 빌딩에 갔으나 건물소유주가 변경 되여 동판은 철거 되여 없었다.
  다행히 관리사무실 말레이시아 출신 여비서가 센트럴 플라자 6층에 있는 퀸즐랜드 투자회사의 롯 리챠드손씨를 전화로 소개해주었다. 찾아간 회사응접실에서 실물도 보고 사진도 촬영할 수 있었다. 리챠드손씨는 애들레이드 스트리트에 있는 MACARTHUR'S H*Q (맥아더 사령부)를 찾아보도록 소개했다.
  거리 간판부터 그리고 내부 1층 벽에는 이번에 게재된 벽 사진 이외에도 여러 게시물이 부착 되여 있었다. 1층은 카페, 지하는 그릴인데 웨이트리스가 생맥주 한 컵을 원형(圓形) 종이 밭임 위에 올려준다. 맥 장군의 초상(肖像)이 인쇄되어 있는 밭임이다. 기념으로 밭임 한 장을 갖고 왔다.

맥아더 원수의 편지  
  강물은 이날도 유유히 흐른다. 작은 보트 한 척이 지나는 강가에서 난간에 기대고 있는 호주 할머니가 클로즈업되면서 TV화면에 "아직도 그대이름은 차리"가 새겨진다. 1997년9월 KBS 일요스페셜의 도입부문이다.
  한국전쟁미망인 그린여사와는 1991년부터 가족적으로 사귀어 93년4월 그린중령 부인이 저술한 "아직도 그대이름은 차리"의 출판기념잔치에 참석했다. 2000년11월5일 호주육군 3대대에 종군한 전 한인회장 최영길씨와 필자가 발의하여 구세군한인교회에서 그린중령 50주기 추도식이 백기문 시드니총영사 등 많은 한호인사들이 참석한중에 거행되었다.
  "아직도 그대이름은 차리 책 286면에 '맥아더 원수께서도 편지를 주셨다'는 기술(記述)이 있는데 편지의 내용을 원본이나 카피로 볼 기회를 주실 수 있는지요. 그리고 금년 한국전쟁 발발일인 6월25일 한인 장미교실에서 한시간의 강의를 부탁드립니다." 5월13일에 이-메일을 발송했다. 그린여사는 노령임에도 강의도 수락했고, 편지원본은 캔버라 전쟁기념관에 보전중이라며 사본을 사진판으로 전송해 주었다.
   "그린여사님-  한국전선에서 부군 되시는 차리 그린 중령의 안타까운 전사소식은 우리 모두에게 깊은 충격을 주었습니다. - 15행의 위로의 글이 이어지고 - 전능의 하나님께서 시련의 시간을 부인께서 이기게 도와주시기를 저는 간절하게 기도 드립니다.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최고사령관의 레터 헤드와 1950년11월9일, 말미에 더글러스 맥아더의 사인(sign)이 있다. 그간 많은 자료를 참고했지만 맥아더 원수의 사인은 처음 보았다.

인천상륙작전
  1950년9월15일 인천상륙작전 상륙시간(H-hour) 아침6시30분보다 3분 늦게 미 해병1사단 5연대 3대대 대원 286명을 태운 제1파 8척의 LCVP(상륙주정)들이 월미도 녹색해안(Green beach)에 도착했다. 예상밖에 경미한 북한군의 저항으로 20여분만에 월미도중앙에 진출한 해병들이 세운 성조기를 기함 마운트 맥킨리(Mount McKinley)함교(艦橋) 의자에 않고 쌍안경으로 확인한 맥아더 원수는 파안대소(破顔大笑)하며 '해냈다! 자 커피를 듭시다' 라고  말했다.  
  한인 교민촌의 캠시도서관에 마이크로 필름으로 보존된 시드니 모닝 헤럴드 신문 1950년9월16일자 1면에는 "U.N.군 인천상륙"을 톱으로 맥아더 사령관의 사진과 전황이 그려진 한국지도가 먼저 눈에 띠었다. 작전성공을 맥 원수의 탁월한 전략안(戰略眼)을 갖고 내린 결단이라고 칭송하는 내용이 지면에 실렸다.  
  36년간 해군과 상선생활로 인천을 수없이 드나들었지만 5m의 기단 위에 3m 높이의 맥아더 원수 동상이 서 있는 자유공원은 단 한번 찾아갔다. 인터넷에 뜬 내용만으로는 글을 쓸 수 없어 궁리 끝에 인천에서 비즈니스를 하는 이정일씨에게 간청했다. 인천상륙작전 전적지를 고루 방문하고 시드니에서 앉고 볼 수 있게 사진과 설명문을 이-메일로 전해주기를 부탁드린 것이다.  
  자유공원의 맥아더 원수동상과 월미도 문화의 거리 녹색해안에 "UN군 인천상육지점"이라고 새겨진 화강암의 표지석을 사진으로 보았다. 한편 존재조차 몰랐던 송도유원지의 인천상륙작전기념관의 맥원수의 흉상(胸像)을 포함한 8매의 사진을 보고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인천시민의 관심이 남달리 크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인터넷에 뜬 2002년 "인천을 대표하는 인물" 중고등 학생 설문조사 결과 1위가 맥아더 원수다. 인천과 맥아더 원수의 맺어진 고리는 여전히 튼튼하다.

노병은 죽지 않고..
  인천상육작전 성공으로 유엔군은 서울을 수복하고 38선을 돌파한 후, 북진하여 압록강변  초산까지 도달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를 거듭해 51년 1월4일 서울철수와 서울 재탈환 그리고 전선이 교착된다. 맥아더 원수는 중공 본토 폭격등의 주장으로 트루먼 미대통령에 의해 전보 한 장으로 4월 11일 9개월만에 유엔군사령관에서 해임 되였다.  
  1951년4월16일 아침 맥아더원수 가족일행이 탄 전용기 바탄호는 일본 하네다공항을 이륙했다. 태평양전쟁이후 맥아더원수가 미국본토로의 귀환은 처음이다. 뉴욕시민들은 브로드웨이에서 52년간의 군인으로 봉직한 71세의 맥아더원수와 52세의 부인이 탄 카 퍼레이드를 눈보라 색종이로 뜨겁게 환영했다.
  막간(幕間)으로 맥원수의 부인을 소개한다. 필리핀 탈출 후 호주에서다. 멜버른 마이요 백화점의 여점원과 맥 부인의 대화내용이 인터넷 글에 있다. 'SSW 이네요. 옷의 재고가 있는지 찾아 봐야해요' 'SSW 가 무순 뜻이지요' 'small size woman' 번역하면 작은 치수의 부인이다. 맥장군은 이혼하고 오랜 독신공방 끝에 57세에 재혼한 19세 연하의 진 페어클로스(Jean Faircloth) 부인에게 동양적인 시각으로는 공처가의 편린(片鱗)이 옆 보이긴 해서도 애처가로 손색없는 가장 이였다.
  인터넷으로 연설문 전문을 접할 수 있는데, 맥아더 원수는 미국 상하양원 합동회의에서 스피치를 이렇게 마무리했다. '老兵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다.('Old solders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 www.homestead.com/douglassmacarthur/Macarthur.html)      

맥 원수의 발자취
  미국시민으로  맥아더가 출생한 1880년은 조선시대의 말기 갑신정변이 이러나기 4년 전이다. 청일전쟁, 대한제국의 선포, 그리고 미국 육사를 나온 초급장교 맥아더는 종군무관으로 러일전쟁을 관전했다. 필리핀에서 큰공을 세운 아서 맥아더장군을 부친으로 둔 아들 맥아더가 미국과 일본간에 "미국은 필리핀을 일본은 대한제국에 대한 독립적 지배권"을 양해한 사실을 당연히 알 것이다.
  일제의 대한제국 강탈, 세월이 지나 미일 전쟁의 주역으로, 일본항복을 수락한 맥아더 원수는 1948년8월15일 대한민국 선포식장 에서 이승만 대통령께 축복의 말을 전했다. 6.25동란후에는 1950년9월29일 중앙청에서 맥원수가 이대통령에게 서울 이양식을 했고 재임 중   맥원수는 18회 한국전선을 시찰했다.
  "더글러스 맥아더"라는 한 미국 군인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우리의 지난 한 세기를 돌아보았다. 중국 일본 러시아 그리고 미국 등 주변 4강국의 힘 다루기 속에 무력하게 표류하는 우리의 행로가 애달프다. 사실 깊이 들어가 보면 우리가 안고 있는 한(恨)의 길목에 한국전쟁의 수난의 뜻이 숨어 있음을 확실히 알게된다. 10일 후면 6.25 휴전 50주년이 된다. 지면제한으로 참조문헌의 출처를 생략했다. 1944년12월 이전의 호칭은 맥아더 장군으로 진급 후는 원수칭호로 통일했다. "아! 6.25"사진첩을 우송해준 김희철형과 사진을 전송해준 이정일씨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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