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주 강제이주 1세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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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 강제이주 1세대 이야기
  • 장민석
  • 승인 2006.12.20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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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민석 (연해주 고려인 이주 농업정착지원센터)
△83세 안중석 할아버지.

1937년 중앙아시아 행 열차를 타야 했을 때 14세였다. 두만강에서 멀지 않은 포셰이트 항구 부근 고려인 마을에 살며 고려인 학교에서 5학년까지 다녔다. 마을 사람들은 바다에서 고기도 잡고, 농사도 지었다.  바닷가 사람들이라 고기를 잡도록 아랄해 근처에 내려졌다.

그러나 황량한 곳에서 살 수가 없어 우즈베키스탄으로 다시 이주하였다.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고려인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33년간 교장을 하였다. 아직도 조기천의 ‘두만강’ 시 구절과 당시의 노래들을 외울 정도로 기억력이 좋다.

다시 연해주로 온 것은 올 3월. 지금은 달네레친스크(당시 명칭은 이만: 자유시사변 장소) 북쪽 30km의 아주 작은 마을에 딸과 살고 있다. 우수리스크에서는 400km가 넘는 거리이다. 연해주에서의 첫 겨울은 더욱 추울 수밖에 없다. 추위보다 더 힘든 건 함께 지낼 말벗이 없는 것.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도 들어줄 사람도, 함께 대화 나눌 사람도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86세 박봉근 할머니.

할아버지가 1912년 큰 오빠를 업고 두만강을 건너왔다. 바닷가 올가 부근의 고려인 마을에서 고려인 학교를 다녔다. 가족들은 농사를 지었다. 1937년 중앙아시아행 열차를 탈 때 17살이었다. 다른 고려인보다 상당히 빠른 1955년 연해주로 이주해 우수리스크에서 서쪽으로 30km 정도 되는 크라우노프카 마을에 자리잡고 농사를 지었다.

슬하에는 5남2녀. 손자 17명, 증손자 19명의 큰 가족을 하나도 잃지 않고 키워냈다. 한글을 읽고 쓸 수가 있다. 기억력도 비상하다. 역시 가족 외에는 말벗이 별로 없다. 마을에 고려인이 만든 우물이 어디 있고, 학교와 어떤 집이 고려인들이 강제이주 전에 지은 집인지를 자세히 설명해 준다.

우리와는 이념이 다른 국가의 국민이었다는 이유로 공백처럼 남아 있는, 연해주 한민족의 역사들이 이 분들의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 있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고향을 이야기 할 때 ‘우리는 여기서 몇 대째 살아오고 있다’는 말을 많이 한다. 그만큼 정착하여 살아가는 것을 중요시 하고, 삶의 터전과 가계의 연속성을 따로 떼어 놓지 않고, 통일적으로 생각해 온 것이다.

그러나 연해주 고려인들은 한 곳에서 2대 이상을 살아본 경험을 갖지 못하고 있다. 두만강을 건너 3대를 넘기지 못하고, 중앙아시아로 가야 했고, 그곳에서도 3대를 넘기지 못하고 다시 연해주로의 귀환을 할 수 밖에 없는 처지의 고려인들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고려인들의 말을 종합하면 연해주에 한민족이 이주해 농사를 짓기 시작한지 150년이 넘는다. 그간 이들의 삶의 과정을 모으고 종합하면 풍부한 역사가 되고 곳곳에 흩어져 있는 근세의 유적을 찾아내는 길이 된다.

한민족은 어른을 공경하고 항상 먼저 대우했다. 긴 역사의 과정을 거쳐 다시 연해주로 돌아왔으나 아직은 자리 잡고 살기에 급급해 뿔뿔이 흩어져 말벗을 그리워하는 강제이주 1세대를 위한 자리의 마련이 시급하다. 한국에서는 마을마다 치르는 경로잔치가 이곳에서는 연해주 차원에서 필요하다.

단지 노인들을 즐겁게 하는 것만이 아닌, 각자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경험을 모아 역사로 만들고, 70년 전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내던 이웃마을 친구들과 학교 동창도 만날 수 있는 자리. 이분들의 기억이 흐려지면 그 시절의 역사도 선명하지 못하고 흐릿하게 재생될 수밖에 없다.

물론 연로해서 귀가 잘 들리지 않아 의사소통이 잘 안 될테니, 보청기도 필요할 것이다. 형식적인 경로잔치가 아니라, 이들이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듣고 적고 정리하는 자리가 될 때, 노인들 만이 아니라 젊은 사람들에게도 소중한 자리가 될 것이다. 

새해에는 가장 구체적인 일에서 출발하자. 곳곳에 흩어져 어려움을 헤치며 살아 온 삶들을 소중히 모아보자. 전 세계의 한민족은 장소와 숫자가 아니라, 구체적 삶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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