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흐스탄 고려인사회의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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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 고려인사회의 현황
  • 김병학
  • 승인 2003.07.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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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재는 존재에 의해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생성에 의해서 구성된다. 어떤 한 민족의 됨됨이도 그 민족에 대한 과거의 죽어버린 기록이나 유산에 의해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그 민족이 지금 그 자리서 꽃피우고 있는 창조성에 의해서 평가된다.
  구 소련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스스로를 '고려인'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단어는 불과 10여 년 전에야 등장했다. 물론 구 소련 시기에도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우리민족을 지칭하는 러시아어       (꼬레이쯔)의 원래 의미인 '고려인'이란 말이 드물지 않게 사용되긴 했지만 공식적으로는 언제나 '조선인'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구 소련이 붕괴되고 한국과 교류가 시작되면서부터, 그리고 한국과의 관계가 중요성을 띠게 되면서부터 같은 민족을 지칭하는 두 개의 다른 이름, 즉 '한국인'과 '조선인' 사이에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고육지책으로 선택한 것이 '고려인'이란 이름이었다. 이렇듯 재소 한인의 정체성은 한반도와 복잡하게 얽힌 고민스런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이미 널리 알려진 바대로 카자흐스탄 고려인사회는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에 의해 연해주에 살던 고려인이 대거 이주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카자흐스탄 고려인사회는 그로부터 50여 년이 지난 1991년 소련 연방의 붕괴와 카자흐스탄의 독립을 기점으로 하여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카자흐스탄이 독립을 선언하기 전까지는, 그리고 독립을 선언한 이후로도 한동안은 고려인을 포함하여 카자흐스탄에 거주하는 모든 민족들의 의식 속에는 자신의 정체성이 '소련인' 즉, 볼세비키 혁명 이후 '역사적으로 새롭게 태어난 공동적 인간'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카자흐스탄 고려인은 카자흐스탄이라는 일정한 공간 안에서 함께 거주하는 다른 민족들과 더불어 새로운 역사와 문화를 공유해가고 있다는 의식이 마음 속에 자리해 감에 따라 과거에 공통된 정체성을 가졌던 인근 다른 나라 재소 고려인들과는 조금씩 다른 정체성을 형성해 가고 있다.
  현재 카자흐스탄 고려인의 인구는 99,665명(1999년도 인구조사 통계)으로 카자흐스탄에서 9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강제이주 세대 후손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일부는 1960-1970년대에 사할린에서 건너왔다. 그리고 1950년대 북한유학생으로서 귀국을 거부하고 남은 사람들도 카자흐스탄 고려인의 극히 일부분을 구성하고 있다. 후자의 두 집단은 비록 수는 적지만 모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에 이미 1960년대 후반부터 조금씩 고갈되어가던 모국어신문사 '레닌기치'(고려일보의 전신)의 기자와 고려극장의 극작가 등으로 활약함으로써 민족문화 계승에 이바지했으며 한국과 교류가 시작되면서부터는 통역으로 활동하여 한국과 카자흐스탄을 잇는 가교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독립 이후 오랫동안 내전에 휩싸였던 타직키스탄 고려인과 소련 붕괴 이후 지금까지 경제적 어려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키르기즈스탄 및 우즈베키스탄 고려인들이 카자흐스탄으로 끊임없이 유입되고 있기 때문에 전체 카자흐스탄 거주 고려인은 10만을 훨씬 웃돌 것으로 추산된다.
  이들은 나름대로 민족적 전통과 가치를 지켜오고 있다. 이곳의 고려인 3세 시인 리 스타니슬라브씨가 자신의 시에서 "…이력서를 작성하다 뜻밖에 마주친 모국어 표기란에 뭐라고 써야 할지 심히 고민되었다"라고 표현했듯이 이들은 성(姓)과 음식 외에는 민족적 요소가 거의 사라져 모국어마저 잃어버렸다고 자조하기도 하지만 각종 세시풍속과 통과의례 등에서 아직까지도 전통을 풍부하게 간직하고 있다. 돌, 환갑, 상례, 제례에는 옛 전통이 거의 그대로 지켜지고 있으며 혼례에도 일부 남아있다.
  카자흐스탄 고려인은 중앙아시아에서 정치·경제, 사회·문화적으로 가장 안정되고 수준 높은 생활을 누리고 있다. 이는 카자흐스탄 정부의 관대한 소수민족정책과 최근의 안정적인 경제성장에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카자흐스탄 거주 고려인의 특수한 상황이 빚어낸 작품이기도 하다. 즉, 강제이주의 와중에도 살아남아 재소 고려인의 말과 얼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가 되어주었던 고려일보 신문사와 고려극장이 바로 카자흐스탄에서 존재하며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자흐스탄 고려인은 고려일보를 통하여, 특히 고려일보 문예페이지를 통하여 다수의 문인들을 배출함으로써 구 소련의 다른 지역 고려인들보다 수준 높은 민족문화를 재생산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고려극장을 통하여 풍부한 모국어 예술을 향유할 수 있었다. 카자흐스탄 고려인은 카자흐스탄 130여 민족 중에서 위구르민족과 더불어 모국어신문과 모국어로 공연하는 극장을 갖고 있는 유일한 소수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지난 6월 28일에는 고려일보창간 80주년 기념식이, 작년 9월에는 고려극장창립 70주년 기념식이 성대하게 열린 바 있다.
  신문사와 극장은 지난 60-80년대에 황금기를 구가했었다. 당시 신문은 2만 부 가까이 발행되었고 여러 곳에 지부와 특파기자를 두고 있었다. 극장은 모스크바와 발틱해, 그리고 사할린에까지 순회공연을 나갔었다. 그런데 90년대에 들어와서 재정난과 인재난이 겹쳐 여러 차례의 존폐 위기를 겪어야 했다. 다행히 고려일보는 2000년, 국가로부터 5년 간 운영권을 위임받은 고려인협회에 소속됨으로써 폐간위기는 넘겼으나 여전히 고려인협회로부터 재정적으로 독립해야 할 부담을 안고 있다. 고려극장은 이와 반대로 고려인협회에 소속됨으로써 안정을 되찾고 있다. 신문사는 이번 창간 기념식을 계기로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며 여러 가지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현재 대부분의 고려인은 도시에 거주하고 있다. 적성민족으로 분류되어 오랫동안 거주이전의 자유를 제한 받았던 고려인은 스탈린 사후 1954-57년 사이에 거주이전의 제한이 풀리자 능력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은 교육의 기회와 더 나은 삶을 찾아 도시로 이주했다. 소련해체 이후에는 소련 내 국가 간 유통망의 붕괴와 인플레로 인해 고려인 경제활동의 보루였던 협동농장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평생 농업에만 종사하던 고려인들이 도시로 나가 살길을 모색했다. 현재 70%이상의 고려인이 도시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강제이주 세대 선배들은 연해주에서 기차에 실려와 척박한 중앙아시아 땅에 버려졌을 때 집보다도 학교를 먼저 지었다. 그들은 강제이주 첫 해 겨울을 토굴에서 지낸 다음 이른 봄이 되자 자식들을 가르치려는 일념으로 가장 먼저 학교를 지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야 자신들의 생존을 위한 집을 지었다. 그래서 한 세대가 흐른 뒤에는 사회 전반에 다수의 고려인 인텔리들이 등장할 수 있었다. 지금 카자흐스탄 사회문화계 전반에 어느 민족 못지 않게 고려인 인텔리와 학자, 작가들이 풍부한 건 바로 이 때문이다. 1999년 현재 민족별 교육수준 통계를 보아도 고려인 대졸자 비율이 1000명당 262명(알마틔시는 1000명당 400명)으로 130여 민족 중 유대인에 이어 2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이는 한편으로 민족 정체성 상실을 가속화시키는 주 요인이 되었다. 주류사회에 편입하려는 열망은 당시 주류문화로 자리잡고 있던 러시아문화에 대한 예속정도를 높여 80년대 후반에 들어서서는 곳곳에서 민족성 상실의 징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고려일보는 모국어로 글을 쓸 후계자가 없어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교육열은 개인적 성공을 보장해준 반면에 민족공동체를 어느 정도 약화시켰다.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카자흐스탄 고려인협회(이하 카고협)다. 카고협은 카자흐스탄 고려인의 최근 10년사를 모두 망라하고 있으며 앞으로 고려인의 장래에도 상당부분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카고협의 전신인 카자흐스탄 고려문화중앙은 1989년 재소고려문화중앙 결성과 함께 조직되어 오래 전부터 카자흐스탄 고려인을 대표하는 유일한 기관으로 자리잡았다. 카고협에는 카자흐스탄 정계·관계·재계 등에 종사하는 성공한 고려인들이 모두 망라되어 있고 고려인을 대표하여 국가를 상대하는 기관도 카고협이 유일하다.
  카고협은 출범 초기에 모국어와 민족문화의 부흥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발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알마틔에 개원되었던 한국교육부산하 한국교육원과 협력하여 카자흐스탄 전역에 모국어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고려인 카자흐스탄이주 60주년을 맞은 1997년에 들어서자 카고협은 이 목적이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고 판단하고 이제는 '민족사회의 큰 문제해결'에 힘을 집중하고 있다. 카고협은 2000년 11월에 총회를 열어 당면과업으로 '고려인회관 건립'과 '젊은 인재양성'을 내세웠다. 그리고 해마다 비즈니스 플랜을 작성하여 집중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회관건립은 아직 요원하지만 인재양성은 결실을 봐 올 5월에 카자흐스탄에서 카고협산하 고려인청년회주최로 첫 국제청년포럼이 개최되었다.
  카고협 외 기관으로 알마타고려민족문화중앙이 독자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기관은 해마다 설날맞이 민속놀이 축제를 개최하고 모국어교육 등에 힘을 쏟고 있다.
  누군가는 디아스포라를 정의하기를 근원으로부터 새로운 물이 유입되지 않으면 정체되어 없어져 버리고 마는 고인 물과 같다고 한 바 있다. 이런 의미에서 카자흐스탄 고려인의 정체성은 한국인의 끊임없는 유입으로 유지, 재구성되는 측면이 있으며 사실 최근 10년 동안의 고려인 역사는 한국과 한국인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인이 카자흐스탄으로 처음 진출한 건 1990년에 들어서면서부터다. 물론 그 이전에도 진출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고려인들이 한국인과 본격적으로 긴밀한 접촉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91년 여름 알마틔에 한국교육원이 개원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역시 그 해 여름에 알마틔대학에 최초로 한국어학과가 개설되었다.
  구 소련에서 최초로 설립된 알마티한국교육원은 초기에 카자흐스탄뿐만 아니라 구 소련 전체의 모국어와 문화전통의 부흥에 크게 이바지했고 소련 붕괴와 함께 지속된 경제적 어려움과 정체성의 혼란 등으로 많은 시련을 겪어야 했던 카자흐스탄 고려인의 정신적 안식처가 되기도 했다. 여기에는 이미 고인이 된 신계철 초대 교육원장의 헌신과 노고가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심영섭 2대 원장 시절에는 교육원 건물을 신축하여 카자흐스탄 고려인협회와 고려극장을 입주시킴으로써 명실상부한 고려인 사회의 구심점이 되었다. 2003년 3월 현재 알마티한국교육원이 관할하고 있는 한글학교는 카자흐스탄 전역에 분포되어 있는 19개 대학을 포함한 168개 학교이며 여기서 245명의 교사에게서 5,424명의 학생이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
  1995년에는 외교통상부산하 한국국제협력단(KOIKA)이 카자흐스탄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120만 달러를 들여 설립한 한국·카자흐스탄 우정병원에 6명의 의사가, 한국어교육에 14명의 단원, 태권도 등 기타 분야에 10명의 단원 등 총 30 여명이 파견되어 활동하고 있다.
  초기에는 개신교선교사와 사업가와 유학생이 카자흐스탄 진출 한국인의 주류를 이루었지만 지금은 개인사업가가 수적으로 주류를 이루고 선교사 역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에서 상사주재원으로 파견된 기업인들 사이에 '한국상사협의회', 개인사업가들 사이에 '한인회'가 결성되었으며 상사협의회와 한인회는 한국대사관의 후원으로 교민을 위한 추석맞이 한인체육대회를 4년째 공동개최 해오고 있다. 현재 카자흐스탄 거주 한국인은 1,000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카자흐스탄 고려인과 카자흐스탄 거주 한국인은 100여 년의 단절을 넘어 벌써 10년 째 교류를 지속하고 있다. 어쩌면 뒤섞이면서 서로 닮아가고 있다는 것이 옳은 표현일 것이다. 카자흐스탄 정착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는 한국인이 늘어나면서 그들은 고려인의 일부로 편입되고 또 많은 고려인들이 한국문화의 주변에서 중심으로 더 가까이 다가옴에 따라 문화적·경제적·심리적 차이에서 오는 초기의 외인적 관계를 넘어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필요로 하는 진정한 내인적 관계로 진입하고 있다.  


필자 약력
성    명 :  김병학, 1965년생
           (1992년 6월부터 현재까지 카자흐스탄에서 거주)
연 락 처 : 이메일 bhkim7714@hanmail.net  
          고려일보 이메일 kore-ilbo@nursat.kz

경력
1. 1992년 2월 전남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과 졸업
2. 1992년 6월∼1993년 8월
  우슈또베 광주한글학교 교사.(카자흐스탄 공화국 우슈또베시 소재)
3. 1993년 9월∼1995년 9월
  알마아타 고려천산한글학교장.(카자흐스탄 공화국 알마틔시 소재)
4. 1994년 3월∼2002년 6월
  알마틔국립대학교 한국어과 강사.
5. 2000년 10월∼현재
  고려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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