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난 극복의 외교전에 등장한 보신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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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난 극복의 외교전에 등장한 보신탕
  • 주간 유로꼬레
  • 승인 2005.06.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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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문헌에서 찾는 한국 역사 1 ]

   
▲ 1894년 8월 25일자 일뤼스트라시옹(Illustration)지의 삽화
이번에 소개하는 자료는 ‘1894년 8월 25일자 일뤼스트라시옹(Illustration)지의 삽화’이다.
일뤼스트라시옹 지는 1894년 여름 조선에 파견된 총영사 샤일 롱 Chaille-Long 대령의 조선에 대한 소개와 서방 외교관의 동정을 담은 기고 형식의 연재물로 한국을 보도했다.

당시의 기사 작성 시기를 확정짓기는 힘들다. 1895년 10월 8일에 일어난 명성황후시해사건(을미사변)이 프랑스 언론에 알려진 것이 사건 발생 19일 후인 10월 27일이었던 점과 이 기사가 보도기사가 아니라 연재물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이 기사는 빨라도 8월 이전이었을 것이라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1894년 여름에는 조선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알아보자. 1894년 봄 동학농민이 봉기한 ‘갑오농민전쟁’이 발발해 5월에는 동학군이 전주성을 점령했다. 이에 조선의 요청으로 6월 8~9일 청군 2,400여 명이 아산만에 상륙했고 일본도 공사관과 거류민 보호라는 구실 아래 육, 해군 대부대를 파병했고, 이어 인천-서울 간의 정치적, 군사적 요충지를 장악했었다.
청일 두 나라 군대가 몰려들어 군사적 긴장이 높아질 무렵 일본공사 오토리는 7월 23일에 궁중에 난입하여, 친청 민씨 정권을 타도하고 흥선대원군을 영입하는 한편 개혁파 중심의 친일 정권을 수립했다. 이에 따라 7월 27일 개혁추진기구로서 군국기무처가 설치하고 영의정 김홍집에 의해 갑오경장이 시작되었다.

위의 삽화는 조선 조정이 서방 외교관을 초대한 연회를 표현한 것이다. 기사에서 연회를 주관한 사람을 ‘Le ministre des affaires etrang?es de Cor?, Cho-Pyoug-Sik’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1893년에 오른 외무독판(外務督辦) 조병직(趙秉稷 1833~1901)이다.

조병직은 청일전쟁 중 일본의 압력으로 외무독판에서 물러난 것으로 확인되었는데, 그 시점은 보다 상세한 사료로 확인해봐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아마도 앞서 설명한 갑오개혁의 와중이었을 것 같다. 그러하다면 이 삽화가 담고 있는 연회는 일본군이 궁궐에 난입한 1894년 7월 23일 이전일 것으로 보인다.

조병직 외무독판은 청일전쟁의 전운이 감도는 시점에서 열강의 외교관들에게 만찬을 베풀며 외국군대의 압력을 완화하려 했을 런지 모른다.
그렇다면 열강의 태도는 어떠했을까? 영국은 일본을 동맹국으로 보고 청일전쟁 개시 2주 전인 1894년 7월 16일 영-일간 불평등조약 개정에 동의하면서 일본의 침략전쟁 개시를 승인했다. 청일전쟁 후 일본과 한반도 지배권을 두고 경합을 벌이게 되는 러시아는 청일간의 세력판도를 읽기에 급급했을 것이다.

조병직 외무독판의 연회 초청장이 불어로 기록되어 있다.
"Le rouge palit, le vert devient plus fonc?, la s?uisante couleur du printemps est venue. C'est la saison de joie. Voulez-vous me faire le plaisir de vous joinidre ?moi et ?mes amis pour jouir de la f?e que je donne cet apr?-midi?"
Cho-pyong-sik
기사의 필자는 조병직 독판에 대해 65세의 나이로 매우 친철하며 위엄을 갖추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으며, 만찬장면은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외무독판(장관)은 모든 외교관들이 도착하자, 8명의 무희들을 들게 했다. 식탁에 놓인 그릇 및 테이블 보 등은 유럽식이었다. 메뉴도 서양식이었다. 사냥에서 잡은 고기요리였으나 술에 너무 많이 절여 맛은 좋지는 않았다. 우리에게 왕과 양반들이 매일 식탁에서 먹는 국민요리(plat national)인 보신탕을 대접했다."

여하튼 나라를 구하기 위한 외교전에서 서방 외교관들에게 보신탕을 제공했는데, 아마도 이 기사가 서방 언론에 나타난 최초의 보신탕 기사가 아니었을까 한다. 그리고 서방에 소개된 최초의 보신탕 기록이 유독 한국의 식문화에 비리를 거는 프랑스에서 나왔다는 점이 흥미 있는 역사의 우연이다.


‘만찬이 끝날 무렵 사진을 찍으려고 하자 조병식장관은 각 외교관에게 배당된 무희(기생)들을 공식적인 자리에서 사진 속에 담을 수 없다며 자리를 물러나게 해 무희들이 보이지 않는다’고 전하고 있지만 안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희들의 모습이 으슴푸레 보인다.

@ 사진 소장 : 오영교.
글 : 오영교, 유승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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