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속에 들은 우주의 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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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속에 들은 우주의 이치
  • 한위클리
  • 승인 2005.06.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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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째 불어 시집 낸 문영훈씨

벌써 6월 말이다. 낮 최고 기온이 31도를 기록한 무더운 날씨. 시인 문영훈 씨를 만나러 가는 길은 ‘생명의 취기’로 가득 차 있다.

그는 불어로 시를 쓴다. 언어구조가 다른 한국인이 불어로 창작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인데 그는 동양적인 정서와 프랑스어로 쓴 시로 프랑스 문단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1999년 후반부터 발표하기 시작한 그의 시집은 <수련을 위한 노래(Chants pour le Nymphéa)>, <무한의 꽃(La Fleur de l'infini)>(2002년)을 거쳐  <Voyage en Fleur(화객시초)>(2005년)에 이른다. '꽃'을 주제로 이어지는 세 작품은 “현상적인 세계의 아름다움으로부터 시작해 우주로 향했던 여정이 다시 현상으로 되돌아오는 순환적인 형태를 보여준다”고 작가는 말한다.

독일어로 번역돼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도 소개된 바 있으며, 짤스부르 문단에서도 호평 받았던 그의 시는 서양 언어로 쓰여졌지만 동양적 세계를 함축하고 있다.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문영훈 시인으로부터 그의 작품 세계를 들어본다.

프랑스와의 인연은...
■처음 프랑스에 온 것이 1987년이니 벌써 18년째입니다. 앙드레 말로의 “문학과 예술의 평행적 관계”를 연구하기 위해 프랑스에 왔죠. 그렇지만 학위 그 자체보다 글을 쓰기 위한 목적 때문에 오게 된 것이  더 컸어요. 생각해 보면 저는 이 곳에 오게 될 운명이었던 것 같아요.

불어로 시를 쓰는 게 어렵지 않나요?
■앙드레 말로를 공부하면서 논문이나 기타 문학 작품 등 계속 불어 책을 읽고 프랑스인과 많이 접하다 보니까 도불한지 약 10년이 지나서는 쉬워졌습니다.
감각도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고, 언어를 찾는 것도 수월해지더군요. 각자의 감성이 다르겠지만 제 경우엔 산문으로 쓰는 것 보다 운문으로 감정을 함축해서 표현하는 걸 좋아합니다.

‘글 감옥’이라는 표현도 있는데, 글 쓰는 것 자체도 어렵지 않은지요?
■느낌이 순간적으로 오기는 하지만, 그 느낌을 정리하고 가다듬는 데에는 어느 정도의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죠.
순간적 느낌이 이어지도록 계속 기다려야 해요. 중요한 것은 ‘정신적으로 맑은 상태’라고 생각해요.

단순한 질문이지만, 시를 왜 쓰시는지?
■‘무엇 때문에 쓴다’는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어느 때가 되어서 쓰고 싶다는 생각이 그냥 들었던 것이죠.
바다로 가고 싶다, 산으로 가고 싶다는 마음처럼 구속된 현실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한 행위라고나 할까요? 다르게 말한다면 ‘우주적인 느낌에 대한 욕망’이라고 해도 될 것 같네요.

꽃을 주제로 한 시들이 많습니다
■저는 인본주의적 사고를 벗어나 자연 중심, 우주 중심적인 사고로 세계를 보고 싶습니다.
꽃 역시 자연의 작은 부분이지만 그 속에서 ‘광대하게 열려 있는’ 우주의 이치를 봅니다. 불교를 염두에 두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화엄경’ 역시 꽃이 장엄하게(우주적으로)피어있다는 뜻이거든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물질 문명으로 인해 파괴되어 가는 현실에서, 꽃이란 순수한 생명을 통해 신비스럽고 아름다운 존재의 본질을 찾아 나서는 여행을 표현하려고 했습니다.

동양 사상과 많이 맞닿아 있는 느낌인데요.
■동양 사상 뿐 아니라, 서양 사상 역시 근본은 같다고 생각해요. 기독교 근본주의에도 ‘신에 의해 창조된 세계’라는 개념이 크게 자리잡고 있죠.
그러나 근대로 넘어 오면서 인본주의적 전통으로 기울게 된 겁니다.
19세기 말에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말했는데, 20세기 중반에 앙드레 말로는 “인간도 죽었다”고 말했어요. 즉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서양 물질 문명의 종말을 이야기한 것이죠.
서양은 그 때부터 동양 사상을 가까이 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지금의 동양은 오히려 서양의 물질 문명에 많이 경도된 모습입니다. 서양의 철학적 전통을 받아들이기보다는 그저 겉모습, 물질화된 현상을 닮아가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안타까워요.

프랑스 문단 분위기는 어떤가요?
■프랑스 문단의 동인 활동은 매우 활발하게 보입니다. 그리고 동인들의 활동은 강연회, 토론회 등 대중과의 접촉이 가능한 것으로 이어지구요. 그렇지만 반면에 프랑스의 시인 층은 한국에 비해 조금 얇은 편입니다. 약 1천 명이 정식 시인으로 등록되어 있어요. 우리 나라보다 훨씬 작은 숫자입니다.

프랑스와 한국 작가들 사이의 교류는 있는지요? 
■그렇게 적극적인 교류가 있다고 보기는 힘들어요. 대산문화재단 등의 노력으로 국내의 작품이 외국으로 번역되어 나오는 경우는 많지만, 실질적으로 FNAC이나 지베르 조셉 같은 서점에서 한국 작가의 문학 작품(소설, 시 등)은 10종에서 15종 밖에 없거든요.
안타깝게도 마케팅, 번역 같은 부분이 섬세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일례로 “님의 침묵” 같은 한국의 명시가 불어로 번역되어 나온 것을 봤는데, 단어 선택이 잘못된 부분, 또 시의 의미가 완전히 뒤바뀌어 있는 부분도 있더군요. 그래서 제가 번역상에 문제점을 하나 하나 체크해서 한국에 다시 보낸 일이 있어요. 그렇지만 ‘일단 나와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식의 답변을 받고 이런 세세한 교정 작업에 대한 의욕을 상실했었습니다.

일단 책이 나오기 전에 번역이 제대로 되었는지에 대한 확인 절차가 필요하고, 또 책이 나오고 난 후라도 중요한 작품들은 수정 번역본을 내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불어로 직접 시를 쓰는 사람이지만, 번역은 “제 2의 창작”이라고 불릴 만큼 굉장히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죠.

그래서 올해 10월에 있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한국 시와 판소리의 프랑스어 번역 작업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려고 합니다. 이런 기회를 통해 나아지기를 바라는 것이죠. 나아지지 않고 계속 이런 실수를 반복한다면 노벨 문학상은 아직도 멀리 있다고 봅니다.

창작 작업과 더불어 한국 문학의 번역 및 소개 작업에도 열정적인 문영훈 씨는 “여행을 통해 느낀 자연 본질적인 느낌을 시를 읽는 독자들도 같이 느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인터뷰를 마치고 난 뒤 바람이 불었다. 햇살이 덥게 느껴지지 않았다.


[김희선/한위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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