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교류기금은 ‘눈먼 돈’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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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교류기금은 ‘눈먼 돈’ 아니다
  • 동아일보
  • 승인 2005.03.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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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기고/김정원]

3·1절을 앞두고 주한 일본대사가 ‘역사적으로나 법적으로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말해 충격을 던져주었다. 이웃 나라에 의해 고구려사, 임나일본부, 동해 표기 등의 역사 문제가 쟁점이 된 것은 작금의 일이 아니다. 흥분이나 비난과 같은 감정적 대응으로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일례로 측우기는 1442년 세종대왕 때 세계 최초로 발명된 것으로 한국과학기술사의 자존심이다. 세종실록에 기록된 측우기의 존재는 1910년대 일본 기상학자의 논문이 프랑스 영국 등의 학술지에 소개되면서 국제사회에 알려졌다. 그 논문들에 영조 시기(1770년)에 제작된 측우기 사진이 함께 실렸는데 거기에 ‘건륭’(청나라 고종의 연호)이라고 새겨진 것을 중국학자들이 발견했다. 그 뒤 중국학자들은 측우기가 중국의 하사품이라는 주장을 발전시켰다. 급기야 1959년 과학사의 대가 조지프 니덤이 이 입장을 지지하면서 세계과학사에서 측우기의 영광은 중국의 차지가 되고 말았다.

이런 문화외교의 힘을 간파한 일본은 1972년 국가 이미지를 관리하는 ‘저팬 파운데이션’을 설립했고, 이를 통해 서방의 학계·문화계를 집중 지원해 일본학, 일본문화 붐을 일으켰다. 2003년 독립행정법인으로 재출범하면서도 2조 원이 넘는 적립금을 유지했고 19개 해외사무소를 통해 연간 1억5000만 달러의 사업비를 집행하고 있다. 30여 년간 저팬 파운데이션은 치밀한 전략 아래 엄청난 수의 호일(好日)·지일(知日)파를 양산해 왔다.

일본뿐 아니다. 영국의 ‘브리티시 카운슬’은 110개국에 220개 근거지를 마련해 연간 8억8000만 달러를 집행하며, 독일은 78개국에 144개소의 ‘괴테 인스티투트’를 운영하면서 2억7000만 달러를 투자해 세계인의 마음속으로 파고들고 있다.

한국도 뒤질세라 1993년 당시 외무부 산하에 한국국제교류재단을 설립했다. 매년 예산 걱정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영구 재원도 확보했다. 국민들이 여권 발급 때 5000∼1만5000원씩 내는 국제교류기금이 그 종자돈이다. 이 재원으로 53개국 주요 대학에 한국학을 가르치는 학과나 강좌를 개설해 한국을 아는 세계인을 양성하고 있다. 세계 유명박물관에도 한국실이 생겨 일본·중국실에 셋방살이 하던 우리 문화재가 제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지금 국회에선 독도 망언을 한 일본대사를 추방하라는 주장까지 나온다. 그러나 정부와 국회는 국제사회에서 한국을 대변해줄 학자를 배양해 온 국제교류기금을 보호하기는커녕 이 기금의 편법 사용에 앞장서고 있다. 외교통상부의 일시적 자금난을 해소하기 위해 국제교류재단법 재개정을 시도하며 외교부, 기획예산처, 일부 국회의원 등은 기금 적립금을 곶감 빼먹듯 사용하거나 사업목적도 모호한 외교기금으로 확대하는 방안까지 검토하고 있다.

급변하는 국제사회의 동향과 국제교류 사업에 대한 진지한 이해가 결여된 이 같은 행정편의주의는 결국 재원 고갈로 13년간 공들여 쌓아 온 국제교류사업을 물거품으로 만들 가능성이 크다.

한국 문화를 알리고 한국 역사를 지키며 한국 이미지를 바로잡기 위해선 제3국 학계와 문화계의 도움이 절실하다. 일본 영국 독일 등이 한국국제교류재단의 8∼40배에 해당하는 자금을 수십 년간 투자해 온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향후 독도문제나 역사 왜곡문제가 세계적 이슈가 되었을 때 과연 누가 우리의 손을 들어줄까.

김정원 세종대 석좌교수·전 외교부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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