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중동에서 정치와 정체성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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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중동에서 정치와 정체성 논쟁
  • 공일주 중동아프리카연구소장
  • 승인 2022.05.02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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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일주 중동아프리카연구소 소장
공일주 중동아프리카연구소 소장

중동 국가의 정치 성향 변화

일반적으로 중동의 국가나 무슬림의 정체성을 이야기할 때 어느 한 가지 특징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터키는 과거에 세속적인 국가라고 말해 왔지만 오늘날 터키는 이슬람주의자와 세속주의자가 있다. 1940년대 이후 아랍정치에서 이슬람주의자와 세속주의자가 충돌해 왔고 1970년대 이후 이슬람주의자가 더 큰 지지를 받았다. 2006년 6개 아랍국가 여론 조사에서 4분의 3이 민주주의를 지지했지만 이슬람주의자 민주주의와 세속주의자 민주주의로 나뉘었다.
 
2011년 8월 여론조사에서 이집트는 44%가 이슬람주의 정부를 원했고 46%는 세속적인 모델을 그리고 10%는 민주주의국가가 아니더라도 강한 정부를 원했다. 그러나 당시 이집트에는 무슬림형제단과 살라피들의 이슬람주의, 나세르 대통령의 이데올로기를 따르는 나세르 민족주의, 무바라크 대통령 말기 와프드 당의 자유주의, 그리고 맑시즘의 좌익이 공존했다. 

아랍 무슬림의 정체성 조합

2021년 작고한 이집트의 하산 하나피는 이슬람주의 좌익파(al-Yasar al-Islami)의 이론가였다. 그는 진보적인 이슬람주의자였다. 그는 이슬람과 좌익이 서로 모순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산 하나피는 이슬람주의자들인 무슬림형제단과 관계를 가졌고 동시에 맑스주의자와도 관계를 가지고 살았다. 그런데 1997년 정치적 이슬람운동에 가깝던 알아즈하르 교수와 몇 명이 모인 ‘알아즈하르 학자 전선’이 그를 카피르(알라를 안 믿는 자, 이슬람 율법을 안 지키는 자)라고 결의했다. 

그의 제자 중에는 꾸란 사상가로 유명한 나쓰르 아부 자이드(1943-2010)가 있었다. 그는 꾸란 해석에 대한 주류 무슬림의 견해에 도전했다가 1995년 샤리아 법정에서 카피르로 판결을 받았고, 아이만 알자와히리(알카에다)가 이끄는 이슬람 지하드조직의 살해위협에 못 이겨서 네덜란드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꾸란은 문학적 텍스트이자 종교적 텍스트’라고 주장했고 꾸란이 오직 알라의 책이라는 이슬람 전통적인 견해와 충돌했다. 그는 ‘꾸란은 담화의 집합체’라고 보았고 순수한 이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이슬람은 역사적, 지리적, 문화적 배경이란 측면에서 이해돼야 한다고 말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도 이슬람을 종교적으로만 연구하거나 또는 정치적으로만 연구하는 학자들이 있어서 역사, 언어, 문화, 종교, 철학, 경제 및 국제관계 등이 융합된 학제적인 연구가 절실히 필요하다.

나쓰르 아부 자이드는 자신이 이슬람 비평가가 아니고 그냥 무슬림이라고 했다. 하지만 가끔 언론에서는 그를 ‘자유주의자(liberal) 무슬림’ 또는 ‘21세기 계몽주의자’라고 했고 이집트의 샤리아 법정에서는 그를 ‘카피르’라고 했다. 그는 아랍에서는 현대화와 계몽이 실패했다고 보았다. 

정치의 사상적 논쟁과 정체성 충돌

중동에서 정치의 사상적 논쟁과 현실적 갈등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사우디의 작가 압둘라 알우타이비는 정치는 국가에 대한 봉사, 국가와 국민을 위한 이익 그리고 그들의 야심이 충돌하는 곳에서 작용하는 여러 세력들이 혼합된 공장이라고 했다.
 
중동지역에서 수십년간 계속되는 지역적 충돌은 정치적인 충돌일 뿐만 아니라 정체성에 대한 충돌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중동사람들이 자신들이 누구인가에 대한 충돌이고, 자신들이 어디로 가는가? 그리고 이웃 혹은 세계와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충돌이다. 

한 예로서, 유럽에서 일어난 전쟁은 유럽 상황에서 위와 같은 질문들을 답변한 제국주의와 민족주의 충돌들에 근거한 것이다. 이런 충돌들의 일부가 중동에 도착해 각 국가별, 각 운동별, 그리고 각 민족주의에 따른 서로 다른 답변을 하게 했다.

그래서 터키는 칼리파 제도를 없애고 터키 민족주의 국가를 세웠고 지금은 이슬람주의가 득세하고 있다. 이란은 정치적 이슬람의 시아파 버전 또는 40년 전 호메이니 혁명(1979년)이 소개되기 전까지는 불확실했다. 아랍에서는 국가들과 운동(tayyar)들이 좌익과 공산주의, 민족주의와 그 지류인 바아스 주의와 나세르 주의, 그리고 이슬람주의와 그 지류들 사이에서 길을 잃고 있었다.   

정체성에 대한 충돌들은 아직까지 끝나지 않았다. 

정체성에 대한 충돌은 국내적으로, 지역적으로, 국제적으로 아직까지 끝나지 않았고 항상 새로워지고 있다. 세속적이고 민족주의적인 터키가 정치적 이슬람의 버전(version)을 채택하려고 여러 단계를 거쳤다. 이란은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성향을 갖던 왕정제도와 ‘샤(과거 이란에서 왕의 칭호)’에 대항한 이슬람주의 혁명이 일어난 뒤에 호메이니 사상에 닻을 내린 적이 있었다. 

많은 아랍국가들 중 이라크, 이집트, 리비아, 예멘, 시리아는 왕정제에 대항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정체성에서 파생한 사상적 충돌 때문에 전쟁이 발발하고 나라가 망하고 국민들이 피를 흘렸다.
 
그런데 아랍 걸프국가들은 이런 충돌들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았고 파괴적인 결과를 피했다. 견고한 정체성을 건설하는 길로 들어선 국가는 발전했으나 정체성의 발달에 뒤처진 국가는 자체 권력과 영향력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가령, 시리아는 왕정제를 전복시키고 아랍 사회주의 바아스 제도가 자리를 잡을 때까지 아랍 민족주의 팀들 사이에서 오락가락 변동을 보였고 나중에는 소수 종파를 믿는 가족형 체제를 확립했다.
 
예멘은 압둘라 쌀리흐 대통령이 권력을 장악하기 전까지 민족주의 제도를 채택하고 왕정의 이맘제를 전복시켰다. 그리고 지금은 이맘제보다 훨씬 나쁜 상황에 처해 있는데 이란의 지원을 받는 후시와의 전쟁을 지속하고 있다. 

위와 같이 중동 각국 역사와 정치적 현실에 의거해, 중동의 사상적 논쟁과 정체성을 알아본 것은 중동의 국가들이 너무 많아서 우리가 이슬람과 무슬림을 너무 과도하게 일반화했을 때 그 결과로 생기는 문제점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더구나 우리나라에 이주한 무슬림들은 그들의 종교적 전통과 문화와 사상이 맞지 않는 한국 사회에서 무슬림 국가별, 종파별로 이슬람사원을 건축해 왔는데 이제는 지방대학에 다니는 무슬림 유학생들이 이슬람사원을 짓게 해달라고 했다. 그런데 고법에서는 합리적인 이유 없이 관련법률에 근거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내세웠지만, 무슬림들의 복합적인 종교 및 사상적인 문제(공산주의자이면서 자유주의 무슬림, 이슬람주의자이면서 사회주의자 등)를 다루지 않았는데 이런 요인들이 향후 우리 사회에 어떤 갈등을 만들어낼지 아무도 묻지 않았다. 

21세기 꾸란 사상가 나쓰르 아부 자이드가 아랍 이슬람국가에서 꾸란에 대한 그의 견해가 주류 사회와 달랐다고 그를 이슬람법정에서 ‘카피르’로 판결하고 부인과 이혼 시킨 법원의 결정을 되돌아보면 우리나라 고법 판사들의 결정이 예삿일로 보이지 않는 것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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