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크라쿠프에서 리비우까지 ‘338km, 4시간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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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크라쿠프에서 리비우까지 ‘338km, 4시간 40분’
  • 심경섭 폴란드 크라쿠프한인회장
  • 승인 2022.04.18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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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피란민 최후방 리비우의 고려인 동포들을 생각하며

‘민초들은 오늘도 무사할까?’ 허공에 안부를 묻는다
심경섭 폴란드 크라쿠프한인회장<br>
심경섭 폴란드 크라쿠프한인회장

뜻하지 않은 전쟁의 여파로 4천만이 넘는 우크라이나인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전쟁터에서 목숨 걸고 싸우는 이들, 실향민이 돼 서부전선으로 피신한 이들만이 아니라 전쟁터가 된 조국을 탈출한 430만에 달하는 노약자들, 엄마와 아이들은 낯선 타국에서 ‘전쟁난민’이라는 신분으로 살아가야 하는 현실이 믿겨지지 않을 것이다.

고려인과 전쟁난민 아이들 지원에 열심인 사람예술학교 권태훈 대표는 난민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난민은 뿌리 뽑힌 사람들이다.
가난, 박해, 전쟁을 피해 고향을 떠나서 
낯선 다른 나라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생활의 뿌리가 뽑힌 가난한 사람들이다.
인권의 뿌리가 뽑힌 박해 받는 사람들이다.
공동체의 뿌리가 뽑힌 나라가 없는 사람들이다.”

솔직히 남 일처럼 느껴졌다. 신경 끊고 아니 신경 쓸 새도 없이 부산한 일상에 매몰돼 살다보면 같은 동네에 난민들이 살고 있다는 것조차 망각하게 된다. ‘다들 그렇게 사는데… 내가 돕는다고 세상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극히 현실적이고 당연한 판단이라 여기다가도 전쟁난민들이 운집해 있는 장소들을 찾아가 보면 마음을 고쳐먹게 된다.

폴란드 크라쿠프에 있는 Tauron Arena Krakow 경기장은 현재 우크라이나 난민등록소 겸 행정업무 센터로 활용되고 있다. (사진 심경섭 폴란드 크라쿠프 한인회장)
폴란드 크라쿠프에 있는 Tauron Arena Krakow 경기장은 현재 우크라이나 난민등록소 겸 행정업무 센터로 활용되고 있다. (사진 심경섭 크라쿠프한인회장)

폴란드 크라쿠프에는 아레나 대형 실내 경기장이 있다. 이곳은 현재 우크라이나 ‘전쟁난민 등록소’ 겸 ‘행정 업무’ 창고로 활용되고 있다. 무료배식과 난민등록 접수 대기줄엔 엄마들이 줄지어 서 있고, 기다림에 지친 아이들은 자원봉사자가 건넨 분필 몇개에 또래들끼리 깔깔대고 노닐며 그림 그리기에 열중이다.

낯선 듯 정겨운 모습이다. ‘그래. 너희들은 전쟁을 기억하지 말고, 폴란드에서 친구들과 놀았던 것만 기억하렴.’ 밝은 아이들을 바라보는 주변의 어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안도의 한숨과 미소를 머금고 있다.

난민 등록소 앞에서 기다림에 지친 아이들이 분필로 그림 그리기에 열심이다. (사진 심경섭 폴란드 크라쿠프한인회장)
난민 등록소 앞에서 기다림에 지친 아이들이 분필로 그림 그리기에 열심이다. (사진 심경섭 크라쿠프한인회장)
무료배식과 난민등록 접수 대기줄엔 옆에서 게임에 열심인 꼬마 (사진 심경섭 폴란드 크라쿠프한인회장)
난민등록 접수 대기줄엔 옆에서 게임에 열중한 꼬마 (사진 심경섭 크라쿠프한인회장)

필자가 거주하는 크라쿠프에서 우크라이나 피란민 최후방인 리비우까지 ‘338km, 4시간 40분’ 거리다.

현재 리비우엔 ‘고려인 협회 아사달 대책본부’ 상황실이 있다. 현지 30개 NGO단체들과 연합해 실향민이 된 고려인 동포들과 우크라이나 피란민 구제에 앞장서고 있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타국으로 피난조차 나서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이고, 턱없이 부족한 물자와 운송과정 중 포격과 러시아군의 구호품 약탈까지 자행돼 희생된 자원봉사자도 발생하고 있다’고 현장소식을 전해온다.

대책본부 대표의 카톡네임이 ‘우크라이나 Lza’다. 같은 슬라브어인 관계로 폴란드어의 ‘Łza (눈물)’가 아닐까 유추해 본다. 그는 조국의 참혹한 현실을 국민들의 눈물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필자는 그 눈물 뒤에 말하지 못하는 ‘동포들의 한숨’을 읽는다. 러시아 군사작전 지역이 공교롭게도 동포들이 밀집해 거주하는 키이우, 동부, 남부 지역이기 때문이다. 가장 막대한 피해를 보고 있는 지역이 바로 동포들이 그동안 일궈온 삶의 터전이다.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인의 눈물은 닦아주려 무수히 나서지만 정작 고려인 동포의 눈물엔 둔감하다. 한국에선 한국말 못하는 외국인에 가깝고 우크라이나에선 피부색이 다른 아시아계 소수민족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눈물 대신 ‘서러운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나 보다.

파란 하늘에 노란 개나리. 우크라이나 국기가 연상된다. (사진 심경섭 크라쿠프한인회장)
파란 하늘에 노란 개나리. 우크라이나 국기가 연상된다. (사진 심경섭 크라쿠프한인회장)

옛날부터 힘없던 우리네 조상들은 신세를 한탄하며 자신들을 ‘민초’라고 불렀다. 현재까지 우크라이나 고려인이 무수히 밟혀 고통을 호소해도 정작 귀 기울여 들어주는 이는 소수다. 그래서 필자에겐 우크라이나 고려인들이 하소연 할 곳 없어 말 못하는 현대판 ‘민초’로만 보인다.

파란 하늘 아래 도심 곳곳 노랗게 물든 개나리를 보고 있자니 ‘338km 저편에도 봄이 왔을까?’, ‘민초들은 오늘도 무사할까?’ 허공에 안부를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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