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엄마의 아픈 손가락, 고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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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엄마의 아픈 손가락, 고려인
  • 심경섭 민주평통 중동부유럽협의회 폴란드 자문위원
  • 승인 2022.04.05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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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경섭 폴란드 크라쿠프한인회장<br>
심경섭 민주평통 중동부유럽협의회 폴란드 자문위원

폴란드로 쏟아져 들어온 200만이 넘는 전쟁난민 속 ‘우크라이나 국적 고려인들’ 200여명이 대사관을 통해 방문취업비자를 이미 받아 한국으로 무사히 들어갔거나 대기 중에 있다.

중앙아시아까지 떠밀린 고려인에 대해서는 어설프게나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더 멀리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 몰도바 등 유럽 동부지역까지 떠밀려 와 살아야 했던 고려인들에 대해 뒤늦게 인지하고 그간의 무관심에 대한 반성과 배우는 마음으로 글을 쓰게 됐다.

경주마와 같은 일상을 살다 보니 가까운 이웃도 신경 쓸 여력이 없는데 북한 동포, 심지어 조선족, 고려인, 한국계 재외동포들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는 게 쉽지만은 않다.

바람은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힘없는 나라를 조국으로 둔 탓에 머나먼 타국으로 국적도 없이 쓸려나가 삶의 터전을 일구며 살아가야 했던 민초들, 그 중에 ‘고려인’이라는 화두를 잠시나마 던져 보고자 한다.

‘조선인의 디아스포라’

구한말 굶주림을 못이긴 조선인들이 연해주 일대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한반도와 연해주, 만주 일대의 패권 쟁탈전인 러-일 전쟁(1904-1905)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1910년 조선이 일본에 의해 강제 합병되자 졸지에 나라 잃은 조선인들이 연해주, 사할린 일대로 건너가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며 살게 됐다.

1917년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소비에트 정권이 들어섰다. 소비에트 연방(소련) 스탈린 집권시기인 1937년 가을 무렵 연해주와 사할린 일대에 살던 옛 조선인 소수민족 집단 17만 2천여명을 ‘일제의 스파이’라는 조작된 명분으로 낙인찍어 ‘옛 조선인의 디아스포라’가 시작됐다. 열차를 통해 중간중간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허허벌판에 덩그러니 내던져졌다. 

현재 고려인 분포도를 살펴보면, 러시아를 필두로 '카스피'해의 동쪽해안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그리고 서쪽해안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등이며, 심지어 동유럽권 몰도바, 벨로루시(1,200명), 우크라이나(1만명)까지 터를 잡고 살고 있다.

1945년 조선은 해방을 맞이했지만 강대국의 대결과 내부 권력다툼으로 6·25 사변이 터져 동족이 두 동강 나버리며 한쪽은 ‘대한민국’이고 한쪽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 부르게 된다.

유라시아 일대에 강제 이주돼 소련인으로 동화돼 살아가던 동포들은 1988년 6월 전소련고려인협회를 발족하며 중립적인 ‘고려인’이란 명칭을 사용하게 됐다고 한다.

이들은 소련 연방 체제 소수민족 억압정책으로 고유의 민족 언어와 문화는 무시된 채 러시아어를 사용해야 했고, 러시아식 문화를 흡수하면서 소련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1980년대 소련 내 페레스트로이카의 열풍 속에 소수민족들이 깨어나기 시작했고,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소련 참가를 기점으로 소련연방 내 고려인들에게 달라진 한국의 위상이 전파되며 민족정체성을 되살리기 위한 움직임이 일게 됐다.

하지만 1991년 소련연방체제가 붕괴되고 15개 국가로 분리 독립하면서 또 다른 문제점에 봉착하게 된다.

얼마 전까지 소련인이라 불렸던 이들이 각기 독립한 나라의 국민이 됐고, 러시아어가 아닌 독립한 국가의 언어와 문화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처지가 돼 또다시 시련과 혼란을 겪고 있다.

1999년이 돼서야 한국에서 재외동포법, 2007년 방문취업제가 도입돼 미흡한 수준이긴 하나 고려인들이 한국으로 복귀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 만들어졌다.

지난 날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한국을 떠난 우리네 삼촌 고모들처럼 고려인들은 현재 ‘코리안 드림’ 속에 한국을 찾고 있다.

모국으로 귀환한 고려인들은 귀화나 재외동포비자(F-4 체류 무제한)를 발급받기도 하지만 우크라이나처럼 불법체류 위험국가로 분류된 고려인들 경우 방문취업비자(3년+1년 10개월 추가) 발급만 가능하고 3D 단순노무 업종에 국한에서 종사할 수 있을 뿐이며, 같은 생김새와 같은 한국식 성만 쓴다는 것뿐 언어장벽, 문화적 차이, 경제적 어려움, 외국인 신분과 사회적 차별 등으로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고려인 3,4세대는 여기서도 저기서도 환영을 받지 못하고 있어 정체성에 상당한 의구심을 품고 있다 한다. ‘나는 누구인가?’

어떤 이는 자신을 한국인, 어떤 이는 러시아인, 어떤 이는 현재의 국적 국민이라, 어떤 이는 ‘한국인도 러시아인도 현재의 국적 국민도 아닌 고려인’이라 자신을 칭한다.

국어사전적 정의상 고려인은 ‘주로 옛 소련 지역에 사는 우리 겨레’라고 정의돼 있다.

2022년을 살아가는 현재 1937년은 멀게 느껴져도 불과 85년이란 시간적 차이일 뿐인데 50만이 넘는 고려인과 그들을 품어야 할 모국 간에 간극이 너무나 벌어진 느낌은 왜일까? 85년의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 서로의 지혜를 모아야 할 때이며, 차별과 배척이 아닌 한민족으로 인식하는 사회적 분위기와 국민적 관심이 절실히 요구된다.

‘750만 해외동포’라 말한다. 엄밀히 따져보면 재외한인과 재외한국계동포의 합산이다. 재외한인은 대한민국 국적이라 주관심 대상이지만 외국 국적 소유자인 한국계 동포에 대한 지원은 아직도 해결해 나가야 할 과제가 많다. 지금까지 정부와 민간 차원의 많은 노력들이 현지 또는 국내에서 이뤄지고 있지만 재외한국계동포 3,4세들의 정체성 혼란을 막기엔 역부족이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국가적 지원과 더불어 우크라이나 고려인이 소수민족으로 또 다른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더 세심하게 살피고 지원해야 한다. 힘없는 소수민족은 전쟁 때마다 본토인들과 달리 차별과 탄압의 이중고를 겪어왔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바이다.
  
우크라이나에서 고려인들은 4,412만명 중 1만명에 불과한 소수민족이다. 그리고 또한 11만 명에 달하는 러시아 내 고려인들이 이 전쟁으로 피해를 보지 않도록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우크라이나 고려인들에 대한 정부의 지원과 국민적 관심은 단지 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 소수민족으로 살아가는 우크라이나 밖 고려인들과, 만주족, 그 외 다른 대륙에 거주하는 재외한국계동포들이 대한민국의 행보를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생사에서도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이 오면 내 주변 사람들의 적나라한 실체를 보게 돼 옥석을 가리게 된다. 그간 재외동포라 칭했던 것이 공허한 말이었는지 진정 가슴으로 동포로 여겼는지가 판가름 나는 시험대 위에 서 있다. 

코로나와 전쟁이 필자의 눈엔 한민족을 대통합할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로 보인다. 멀리 볼 것도 없이 이번 코로나라는 공공의 위기 앞에 정부와 민간이 적극적으로 상호협력해 그 어느 나라에서도 따라 할 수 없는 응집력을 보여준 것이 바로 우리 대한민국이다. 

이제 이 위기를 ‘대통합의 절호의 기회’로 인식하고 ‘고려인이 엄마의 아픈 손가락’임을 증명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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