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아랍 혁명 이후 두 번째 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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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랍 혁명 이후 두 번째 물결
  • 공일주 중동아프리카연구소장
  • 승인 2021.08.05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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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일주 중동아프리카연구소 소장
공일주 중동아프리카연구소 소장

주제에 앞서서 먼저 올림픽과 관련된 소식을 전하고 싶다. 8월 4일까지 도쿄 올림픽 메달 통계에 따르면 카타르(2), 튀니지(2), 모로코(1), 이집트(3), 요르단(1), 쿠웨이트(1), 시리아(1) 등 7개의 아랍 국가가 메달을 땄다. 역사적으로 아랍이나 무슬림 국가들(특히, 이란)에서 온 많은 선수들은 이스라엘과 경기하는 것을 보이콧했다. 금년에도 수단과 알제리의 선수가 이스라엘과 경기가 예상되자 자국의 선수를 집으로 보냈는데 이스라엘과 외교 관계가 없는 사우디아라비아 타하니 알까흐타니 유도 선수가 이스라엘 선수와 경기를 치른 일이 언론에 크게 보도됐다. 사우디아라비아는 국제 스포츠대회를 자국에 유치하는데 깊은 관심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아랍혁명의 두 차례 물결

튀니지의 아랍혁명 이후 이집트에서 일어난 아랍혁명에 대해 압드 알무님 사이드는 그 특징을 다음 네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청년들은 자유와 생존과 사회적 정의 그리고 인간적 존엄을 부르짖어 혁명에 대한 낭만적인 생각을 표출했다. 둘째, 이슬람주의 기치를 높이 들었는데 그 뒤에는 무슬림 형제단, 살라피, 지하디(이 두 용어에 대한 차이는 『이슬람과 IS』 책 참고) 등이 있었다. 혁명의 세 번째 측면은 전 정권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전면에 나섰다는 점이다. 네 번째는 혁명과 동시에 국가적 혼란이 발생해 각종 폭력이 난무했고 인명을 살상하는가 하면 여성에 대한 성희롱과 성폭력이 많았다.
 
이런 네 가지 측면이 아랍의 봄이 휩쓸고 간 모든 아랍 국가에서 반복됐다. 그리고 아랍의 봄의 두 번째 물결(mawja thaniyyah)이 수단, 이라크, 알제리, 레바논에서 일어났고, 최근에는 튀니지에서 일어났다. 두 번째 물결의 특징은 국가가 이런 국가적 파탄에서 스스로 구조되려면 종파 간 분리와 종교적 문제들 그리고 외국의 간섭에서 벗어난 후, 국민국가(dawlah wataniyyah)를 세우면 된다고 말한다. 

아랍혁명 이후 등장한 ‘국민국가’ 개념

일부 아랍 무슬림들이 생각하는 ‘국민국가’는 이데올로기의 다원화와 법치주의라고 한다. 그런데 중세 영국에서는 ‘국민국가’는 국민과 영토와 기관을 하나의 국가 통치권 하에 통합시키는 것을 의미했다. 정치적 이슬람과 이슬람 칼리파 국가를 부르짖던 무슬림들에게 ‘국민국가’는 지리적인 한계가 없었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아랍혁명 이후, 아랍인들이 ‘국민국가’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은 곧 아랍 세계에 정치적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국민국가’라는 말은 아랍에서 자생한 것이 아니고 유럽인들이 사용한 개념이었다. 이 말이 아랍 사회에 들어와서 아랍의 전통적인 정치 구조를 해체하는 말로 사용됐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아랍 세계에서 정치적인 변화는 영국과 프랑스가 아랍의 일부 지역을 점령한 결과였다. 

아랍혁명의 두 번째 물결

두 번째 물결은 금세기 첫 10년간 여러 물결들이 합세한 아랍 개혁 운동(tayyar al-islah)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다. 두 번째 물결의 첫 기둥은 국가와 사회의 급격한 변화를 필요로 한다. 또, 두 번째 물결의 둘째 기둥은 이런 급격한 변화가 건설과 발전이라는 국가적인 프로젝트를 통해서 이뤄진다. 셋째 기둥은 국민적 정체성에 근거한 현대화 과정을 체계화한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이 2013년 이후 이집트에서 그리고 2015년 이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구체화되지 못했다.

혁명과 선거 이후의 튀니지와 레바논

2011년 튀니지와 2019년 레바논의 아랍혁명 이후 국민들은 혁명에서 무엇을 얻었을까? 튀니지에서는 점차적으로 정치 지도자들이 바뀌었는데 반해, 레바논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더군다나 두 나라에서 정치적 행동은 전혀 바뀌지 않았고 국민이 요구한 개혁은 달성되지 않았다. 과거 10개월 동안 레바논에서는 정부가 없었으나 이번에 튀니지는 대통령이 정부를 해체시켰다. 사실 튀니지의 알메쉬쉬 정부는 해체되기 전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거의 마비되다시피했다. 튀니지 국가가 파국으로 빠져들고 있었을 때 튀니지 국민들은 매일 정치인들이 서로 비방하고 서로 중상하는 싸움판을 보고만 있어야 했다. 레바논에서도 1년 반 전에 이런 일이 반복되고 있었다.

2011년 이후 서구인들의 눈에는 튀니지가 변화를 보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튀니지에서 3번의 총선과 1번의 대선이 있었으나 그 결과는 의회가 서로 분열돼 가는 것이었다. 무슬림 형제단 소속의 알나흐다 당이 다른 정당과 연정을 통해 집권을 시도하면서 튀니지 의회는 정치적 투기장으로 변했고 대통령은 국가수반으로서 이런 정치적 싸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튀니지와 레바논에서 선거와 의회 활동이 실패한 것은 외세의 간섭 때문이 아니라 헌법적 질서와 법을 따르지 않고 권력을 갖고자 하는 욕망이 정치적 충돌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약자는 강자를 인정하지 않았고 선거에서 이긴 강자는 자신들이 모든 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종교적 그리고 종파적 성향은 그들의 우월감을 조장하고 있었는데 레바논에서 히즈불라가 그러했고 튀니지에서는 알나흐다 당이 그러했다. 그렇다면 민주주의 문화가 튀니지와 레바논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아랍혁명과 아랍인들의 선거가 있었지만 국가는 경제적 성장을 달성하지 못했다. 아랍의 일부 국가에서는 시민의 기본적인 자유가 박탈당했고 대부분 국가에서는 헌법이 지켜지지 않았고 사회적 안녕이 보장되지 못하고 종교에서는 서로 나뉘고 극단주의와 급진주의가 아랍인들에게서 사라지지 않았다. 

튀니지의 2차 물결에서 얻는 사실

라쉬드 알간누쉬가 이끄는 튀니지의 '알나흐다 운동' 당이 처음에는 무슬림 형제단의 노선을 따른다는 것을 숨기거나 부인했으나 결국 알나흐다 당과 알간누쉬가 무슬림 형제단에 속해 있었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가 시아파의 타끼야(자신의 신앙을 숨김)처럼 실제 자신의 모습을 깊이 숨기고 사람들에게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을지라도 실제 알나흐다 당은 무슬림 형제단에 속했다. 
 
총선과 대선을 마친 후 튀니지 총리는 카스바(까스바) 궁에 살고, 대통령은 카르타고(까르타즈) 대통령 궁에서 일하면서 이 두 궁 사이에 갈등이 증폭돼 갔고 그 결과 국민들의 생활에는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알간누쉬는 국회의장이 된 이후, 필요하면 새로운 정부를 전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무슬림 형제단은 어디로

지난 3월 터키가 이집트와의 외교적인 관계를 재개하는 것을 희망하자 이런 변화에 따라 무슬림 형제단 지도부는 터키를 떠나 그들이 활동할 무대를 찾고 있었다. 무슬림 형제단의 전 사무총장 마흐무드 후세인은 무슬림형제단 조직원들과의 만남에서 터키를 대신할 곳으로 영국을  제안했다고 알아라비야 네트는 전한다. 그들은 또한 캐나다, 네덜란드, 말레이시아도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무슬림 형제단의 국제동맹은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 대한 관심을 오래전부터 갖고 있었다.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지도부가 무슬림 형제단의 국제동맹(hilf ikhwani duwali)에 가입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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