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로 깨닫다] 동무를 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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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로 깨닫다] 동무를 그리다
  • 조현용 교수
  • 승인 2021.02.25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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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용(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조현용(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우리말에서 ‘동무’라는 말은 수난을 겪은 말입니다. 친구라는 뜻이지만 언제부터인가 사상을 나타내는 말처럼 되어 선뜻 사용하기 어려운 말이 되었습니다. 인민이라는 말도 비슷합니다. 동무도, 인민도 남한에서는 금기어가 되었습니다. 북한의 한국어 교재를 분석하다가 재미있는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서로의 이름을 묻는 장면이었는데, 북한의 표현은 ‘동무의 이름은 무엇입니까?’였기 때문입니다. 북한에서 한국어를 배워서 한국에 오면 문제가 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어릴 때는 가끔 동무라는 말을 친구 대신 쓰기도 하였으나 이제는 아예 동무라는 말을 쓰는 사람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동무라는 말이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동무는 끈질기게 우리 속에 살아있습니다. 동무만 따로는 안 쓰이지만 다른 말과 함께는 쓰이고 있는 겁니다. 대표적인 말이 바로 어깨동무입니다. 이제 어깨동무는 친구의 느낌은 사라지고, 서로 어깨를 손으로 감싸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어깨동무를 어깨 친구라고 바꾸면 아주 어색해집니다. 어깨 친구는 마치 조폭 같은 느낌마저 듭니다. 어깨가 조폭을 비유하기도 해서 그럴 겁니다. 어깨동무는 예전에 친한 친구들이 하던 행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요즘은 어깨동무도 잘 안 합니다. 행동도 세월을 따라 변한 것입니다. 이제 길에서 어깨동무하고 다니는 사람을 보기 어렵습니다. 취객이나 어깨동무를 할까요?

동무가 친구의 의미로 쓰이는 말에는 길동무가 있습니다. ‘길을 함께 가는 동무, 또는 같은 길을 가는 사람(표준국어대사전)’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비슷한 말로는 길벗이 있는데 그야말로 동무가 벗인 셈입니다. 그런데 길 친구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길동무는 함께 길을 가는 친구이기도 하지만 나와 같은 길을 가는 벗이어서 느낌에 따듯함이 있습니다. 서로 의지하고 위로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혼자서 하는 여행에도 그 나름의 멋이 있지만 아무래도 마음 맞는 이와 함께 하는 여행에는 따스한 즐거움이 있습니다. 

동무가 친구의 의미로 다른 말로는 말동무도 있습니다. 말동무도 다른 말로 말벗이라고 합니다. 말동무라는 말은 그야말로 말을 나눌 수 있는 친구입니다. 말동무가 필요하다든지, 말동무가 되어 준다고 하면 서로 외로운 마음을 달래 주는 일이 됩니다. 특히 힘들고 지친 사람에게 말동무는 귀한 친구입니다. 그렇게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도 아닙니다. 그저 세상을 사는 이야기를 담담하게 나누고, 가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넵니다. 말동무는 내 말을 들어주는 귀한 벗입니다. 물론 나도 그의 말에 귀 기울이는 벗입니다.

동무라는 말은 우리 속에서 거의 사라졌는데 길동무와 말동무라는 어휘 속에서 감정을 담아 살아있습니다. 문득 이은상 선생의 시에 박태준 선생이 작곡을 한 ‘동무 생각’이라는 노래가 생각납니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으로 시작하는 노랫말은 참다운 동무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 동무여/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라는 가사에서 동무는 서로의 슬픔을 사라지게 만드는 존재가 됩니다. 그리고 ‘저녁 조수와 같은 내 맘에/ 흰 새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떠돌 때에는/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로 노랫말이 이어집니다. 청라언덕에 백합 같이, 저녁 조수에 흰 새 같이 서로 힘이 되고, 함께 어우러지는 동무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하루하루가 참으로 어려운 세상입니다. 사람을 만나는 것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야말로 말동무가 그리운 세상입니다. 쌓인 괴로움을 훌훌 털어 버리고 길동무와 긴 여행을 떠나고 싶은 하루입니다. 동무들과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길을 걸으며 살고 싶습니다. 그러면 모든 슬픔이 사라질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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