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쿠웨이트, 인도주의적인 왕과의 작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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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쿠웨이트, 인도주의적인 왕과의 작별
  • 공일주 중동아프리카연구소장
  • 승인 2020.10.0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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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일주 중동아프리카연구소장
공일주 중동아프리카연구소장

인도주의 왕, 쉐이크 싸바흐

- ‘쉐이크’는 걸프 국가에서 왕가 사람에게 붙이는 경칭

쿠웨이트와 아랍은 ‘인도주의 왕’ 쉐이크 싸바흐 알아흐마드 알자비르 알무바라크 알싸바흐(15대 쿠웨이트 왕, 쿠웨이트 독립 후 다섯 번째 왕)와 이별을 고했다. 쉐이크 싸바흐 왕은 아랍의 위기 때마다 중재를 했지만 아랍 국가의 내정에는 전혀 간섭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리비아에서 외국의 개입이 리비아 문제를 더 어렵게 하고 있다고 했다. 특히 터키가 리비아 문제에 개입한 것이 그렇다고 했다. 그는 리비아의 국민 대표들이 한 테이블에 앉아 평화를 논의하라고 촉구하고 리비아에 대한 베를린회의를 지원했다. 

문화 발전과 식량 위기에 대처

쉐이크 싸바흐는 문화와 학문발전의 리더였다. ‘알아라비(아랍)’라는 잡지를 창간하라고 직접 지시했다. 그동안 아랍의 문화인들이 이 잡지에 기고했는데 아랍에서는 유명한 문화지가 됐다. 그는 알아라비 창간호에서 “이 책은 모든 아랍인에 대한 쿠웨이트의 선물”이라고 썼는데 사실 아랍 각국에서 1,000~2,000원 안팎의 가격으로 살 수 있도록 쿠웨이트가 인쇄와 우송료를 부담했다. 현대 아랍 문화인이라면 이 책을 안 읽은 사람이 없고, 심지어 필자도 아랍에 거주할 때 자주 사보았던 잡지다.

그 책 속에는 아랍 문화와 문학이 주된 내용이라서 외국인들 중 아랍어 문학 전공자들이 즐겨 읽었다. 그는 세계 식량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펀드를 조성했고, 에너지, 환경, 기후변화에 관련된 학술연구를 지원했다. 

미소를 잃지 않았던 왕

그는 평소에도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가 4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30년 전 부인과 사별하고 사고로 아들을 잃고 외동딸은 질병으로 잃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을 대할 때 늘 미소를 잃지 않아서 모든 사람들이 그를 좋아했다.

세계 지도자들이 그의 서거를 슬퍼했는데 사우디의 살만 국왕은 “나눔과 성취의 여정을 걸어간 지도자”라고 평했고, 알씨씨 이집트 대통령은 “아랍과 이슬람 세계가 정말 귀한 분을 잃었다”고 애도했다. 메카와 메디나 모스크에서는 그가 사망한 후 그를 위한 특별 기도회가 있었다. 

쉐이크 싸바흐가 사망한 뒤, 그가 인도주의와 정치와 문화를 선도했기 때문에 아랍 지도자들 중에서 보기 드문 왕이라는 아랍인들의 평가가 이어졌다. 

오랜 외무장관과 뛰어난 중재자

그가 왕이 되기 전 40여년간 외무부장관(1963년-2003년)을 역임했기에 그가 왕이 되고 나서는 쿠웨이트가 안정되고 균형자 역할을 할 수 있었다. 1972년 예멘의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한 평화 합의를 이끄는데 참여하고, 1980년에는 오만과 예멘 간의 평화 합의를 이끄는데 성공했다.
 
영국이 중동과 걸프만에서 떠난 뒤 그가 걸프의 부흥 역사에 기여한 공로가 크다. 1963년부터 1991년까지 외무 장관으로, 1992년부터는 외무 장관겸 제1부총리로, 2003년부터는 총리로 그리고 2006년에 왕으로 즉위했다. 

하지만 그가 이런 국가 요직을 거치면서 여러 가지 난관에 부딪히기도 했는데 그 중에는 압둘 카림 까심의 위협, 공산주의와 민족주의와 혁명적 좌익세력 그리고 이란의 혁명 근위대가 조종한 시아파 운동의 위협과 맞서야 했다. 

아마도 현대 쿠웨이트역사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1990년에 침공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당시 쿠웨이트 정치권 안에서 쿠데타 음모가 있었고 쿠웨이트 내 무슬림형제단의 쿠데타 시도가 불발됐다. 그리고 2011년과 2013년 아랍의 혁명에서 쿠웨이트는 아랍에 휩쓴 혼란의 쓰나미를 함께 거쳐야 했다.
 
필자가 1995년 쿠웨이트대학교를 방문하고 언어교육원 부원장을 만나 우리나라의 아랍어과 학생들에게 아랍어 연수를 위한 장학금을 달라고 요청했는데, 그 뒤부터 수많은 한국 학생들이 쿠웨이트 언어교육원에서 무료로 언어 연수를 받았다. 이것도 분명히 싸바흐 왕의 문화 증진과 인도주의 정신에 대한 그의 열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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