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안 드림’ 떨치고 ‘집중촌’ 꾸리는 중국 조선족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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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 드림’ 떨치고 ‘집중촌’ 꾸리는 중국 조선족 사람들
  • 시사저널
  • 승인 2003.03.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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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에서 벗어날 유일한 탈출구로 ‘코리안 드림’을 꿈꾸던 중국 조선족 사회가 최근 유례 없는 술렁거림 속에 달라지고 있다. ‘코리안 드림’이 깨질까 싶어서가 아니다. 이제 그들은 ‘코리안 족쇄’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한국에 대한 기대와 구애를 접는 대신 중국에서 살길을 모색하고 있다. 중국의 조선족 이주사 1백50여 년 이래 최초로 지식인과 공산당 기층 간부·기업가 그리고 한국인 등 조선족 문제와 관련된 모든 ‘민족 역량’이 한자리에 모이고 있다.

“중국 공민인 우리가 이 땅에서도 정당한 지위를 잃어버린다면 (한국으로) 산돼지 잡으러 갔다가 집돼지 잃는 격이 아닌가. 단지 동포라는 이유로 막무가내로 잘해 달라고 졸라대는 것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 우리는 이제 중국에서 경제적으로 성공해, 한국의 소외 계층과 북조선의 식량 문제 해결에 기여하며 살겠다는 쪽으로 발상 전환을 해야 할 때가 왔다.” 지난 1월9일부터 12일까지 중국 지린성 창춘 시에서 열린 ‘제9회 조선족 발전을 위한 학술심포지엄과 워크숍’에서 주요 발제자로 나선 이동춘씨(48·제9기 중국전인대 대표·백두산집단 회장)의 발언이다. 이씨는 시종일관 “중국 조선족은 철저하게 ‘중국 공민’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중국 땅에서 조상 대대로 지켜온 ‘땅뙈기’를 매개로 새로운 살길을 개척해야 한다”라고 역설했다.

“한국에 간 조선족들도 되돌아올 수밖에”

이씨의 이런 문제 의식에는 나름으로 근거가 있다. 조선족은 (한국으로) 나간 사람보다 (중국에) 남아 있는 사람이 더 많고, 나갔더라도 다시 돌아와야 할 처지이며, 이들의 영원한 조국은 한국이 아니라 ‘중국’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단기적인 처방보다는 중국에 뿌리 박을 장기적인 살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이씨의 지론이었다. 조선족의 문제는 이씨 지적한 대로 지금까지는 ‘한국에 있는 20만명 가량의 노무 인력 체류자들의 문제’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에 건너간 조선족은 중국 조선족 2백만명 중 10%에 불과하며, 이들 역시 돌아와야 한다. 결국 중국 땅에서 조선족이 살아 남으려면 바로 (한국에) 나가 있는 사람들까지 돌아올 수 있도록 조선족 사회를 발전시키는 길밖에 없다. 조선족 지식인들이 이구동성으로 ‘이제는 중국에 있는 조선족 문제를 이야기할 때다’라고 목청을 높이는 것도 바로 이같은 문제 의식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이 도달한 결론은 바로 ‘뭉쳐서 살자’는 것이었다. ‘조선족 집중촌 건설’이 최근 조선족 사회에서 가장 큰 화두로 떠오른 경위이다.

집중촌 건설 논의의 물꼬는 2002년 중국 지린성의 대표적인 조선족 신문인 <지린신원>이 텄다. 이 신문은 지난해 1월부터 ‘조선족 집중촌’에 대한 기획 기사를 1년여 동안 연재했다. 기획을 담당했던 한정일 기자는 “조선족 촌락이 해체되고 붕괴되는 것을 방치하다가는 중국 조선족 사회 전체가 붕괴하고 말 것이라는 심각한 위기 의식이 집중촌 건설에 대한 논의를 싹틔웠다”라고 설명했다. 기사가 연재되면서 중국 조선족 사회에서는 반향이 일기 시작했다. 지린 시 금풍촌은 이같은 반향이 얼마나 컸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금풍촌은 중국 선양의 만융촌과 더불어 도시 근교형 집중촌의 모범으로 꼽히는 마을. <지린신원>에 이 마을 소개 기사가 나간 이후, 촌민위원회 사무실은 문의 전화가 폭주해 한동안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이 마을 권기동 서기는 금풍촌을 조선족 집중촌으로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금풍촌은 다른 조선족 마을보다 여건이 좋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심각한 인구 유출로 해체 위기를 겪었다. 지금도 전체 3백70여 가구에 인구 1천2백50여명 규모의 이 마을 주민 중 2백명 이상이 한국에 가 있다고 한다.

“20년 전만 해도 마을이 북적댔다. 학생 수도 3백명이 넘었고, 그 중 3분의 1이 대학에 진학할 정도였다. 그러나 점점 한국으로, 도시로 돈벌이를 나가면서 상황이 악화했다. 현재 남아 있는 학생은 50여 명이다. 지린 시에도 원래 조선족 학교 1백57 곳이 있었으나 지금은 40여 곳만 간신히 명맥을 잇고 있다. 그나마 3년 후에는 또 20 곳이 없어질 것이다. 학교가 없어지다 보니 학생들이 한족 학교로 가고 있다. 우리 마을에서도 이러한 문제들이 누적되면서 자연스럽게 조선족 집중촌을 만들자는 목소리들이 나온 것이다”라고 권 서기는 설명했다.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집중촌 건설을 위한 실험에 들어간 금풍촌은 유리한 교통 입지 조건, 넓은 토지, 그리고 값싸고 질 높은 잉여 노동력을 내세워 기업들을 유치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이미 2백만 위안(3억원)을 투자해 농업 시범 단지를 꾸려놓았다. 조만간 중국과 외국의 합자 기업과 일본계 독자 기업(사기업)이 들어설 예정이다. 주민 유출 때문에 다른 조선족 촌락들과 마찬가지로 국가로부터 무상 불하(기간 30년)받은 토지가 불모화하고 있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금풍촌 촌민위원회가 선택한 방법은 이들 버려진 땅을 집체 관리하는 것이었다. 놀고 있는 땅을 기업 등에 임대하거나 농촌 기업으로 전환하면, 땅도 살리고 일자리도 만드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선양의 만융촌이나 헤이룽장성의 하이린 시 신합촌은 땅을 산업기지화해서 조선족 집중촌을 꾸리고 있다. 중국의 조선족 마을 가운데 가장 성공적으로 땅을 활용해 농촌 집체 기업을 만든 모델로 거론되는 신합촌은, 이곳에 ‘백두산집단’이라는 집체 기업을 만든 이동춘씨의 발상에서 비롯했다. 즉 도시 근교에 자리잡은 마을의 지리적 여건을 활용해 도시에 인접한 땅을 농경지에서 아예 2·3차 산업 기지로 바꿔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곳을 다시 공업 단지·아파트 단지·문화 오락 구역·공원과 민속촌 구역으로 나누어, 촌민들로 하여금 마음대로 골라잡게 한 후 재분배한 것이다. 선양시 만융촌도 비슷한 발전 모델을 지향하고 있다.

이밖에 현재 논의되고 있는 조선족 집중촌 모델로는 중국 최대의 코리아타운으로 유명한 선양의 서탑거리 식 ‘도시 중심형’, 지린 시 아라디촌처럼 도시 외곽에 있지만 중심에 집중촌들을 끼고 있는 ‘중심촌형’ 등이 있다. 현재 조선족 지도자들은 ‘한·중(중·한) 합작 교류를 활성화하는 온라인 창구’로 활용하기 위해 ‘차이나-코리안 닷컴’이라는 인터넷 사이트를 준비하고 있다. 온라인을 통해서도 고국과 교류하면서, 이같은 ‘교류의 힘’들을 조선족 집중촌 건설 사업에 보태겠다는 것이다.

‘동북아 한민족 경제 네트워크’ 초석 될 수도

현재 조선족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은 한국 정부가 산업 연수 인력 확대나 체류 기간 연장 등 ‘더 많은 취업 기회’를 제공한다고 해서 해결될수 있는 것이 아니다. ‘중국 공민’인 그들의 문제를 ‘한 핏줄’이라는 감상적 차원으로만 접근해서는 안된다. 따라서 중국 조선족 사회가 스스로 모색하는 집중촌 건설은 합리적인 해법 가운데 하나이다. 한국의 ‘두레마을’이 중국 옌볜 등지에 세운 대규모 생태 농업단지는 조선족 집중촌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 어딘지를 암시해 준다. 선진 농법을 기반으로 고부가가치 농산품을 생산해야 중국 조선족 사회 해체를 막고, 한국에서 돌아온 조선족들을 품을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 중앙민족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 임진철 객원연구원(47)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동북아 한민족 경제 네트워크’ 건설을 주장한다. “21세기는 동북아의 시대다. 중국이 거대한 시장과 전세계에 걸친 강력한 화교 네트워크를 발판으로 떠오르고 있듯이, 우리도 한민족 나름의 경제 네트워크를 형성해야 한다. 만일 남북한, 그리고 중국과 러시아 연해주 일대에 흩어져 있는 한민족의 역량을 하나로 결집할 수 있다면, 우리도 화교나 유태인 부럽지 않은 번영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중국 조선족 사회의 발전은 이같은 원대한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초석이 될 수 있다. 중국 조선족은 이미 그 꿈을 실현할 준비를 진행중이다. 선양시 근교에 자리한 만융촌 입구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조선 민족의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열심히 배우고 부지런히 일하며 떳떳하게 살아갑시다.’

글·박현숙 (중국사회과학원 박사 과정)사진·노순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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