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하이삼 븐 따리끄 아알 사이드’ 오만 새 국왕 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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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하이삼 븐 따리끄 아알 사이드’ 오만 새 국왕 즉위
  • 공일주 중동아프리카연구소장
  • 승인 2020.01.13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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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왕의 노선 이어받아 "평화적 방법으로 갈등 해결을 모색하고 선왕의 유업을 이어가겠다"
공일주 중동아프리카연구소장
공일주 중동아프리카연구소장

까부스 국왕 서거와 안정적인 권력 승계 

2020년 1월 11일 아랍과 서구에서 ‘지혜의 술딴’으로 알려진 오만의 국왕 까부스 븐 사이드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장례식이 끝난 후 그의 조카 하이삼 븐 따리끄 아알 사이드가 오만의 새 국왕으로 즉위했다. 그는 까부스 왕이 지명한 국왕(술딴)으로서 그의 첫 연설은 선왕의 노선을 이어가겠다는 것이었다.

한국의 어느 언론에서는 새로운 오만 국왕의 이름을 ‘하이탐 빈 타리크’라고 음역했는데 아랍어 발음에 근접한 이름은 ‘하이삼 븐 따리끄 아알 사이드’이다. 아랍어 단어에서 ‘타리크’와 ‘따리끄’는 초성과 종성이 다르므로 두 단어의 의미가 다르기 때문에 ‘따리끄’라고 해야 한다.

그리고 ‘알 사이드’가 아니고 ‘아알 사이드[ʔaːl saʕiːd]’가 아랍어 원음에 가깝고, ‘술탄’은 아랍어로 ‘술딴’에 가깝다. ‘술딴’은 권세, 증거라는 의미도 있지만 ‘살따나(술딴이 다스리는 국가)의 통치자’라는 의미이고 그런 경우 ‘왕’이란 의미를 갖는다.

까부스 왕은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그가 아프기 시작하면서 왕위를 누구에게 물려줄 것인가를 두고 고심했다고 한다. 그가 사망한 뒤 왕으로 즉위할 자는 왕의 가문에서 직접 결정하도록 왕가에 일임했고 만약 왕의 가문이 새로운 왕을 결정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서, 까부스 왕의 유언장을 보도록 했다.

그런데 이런 일이 그대로 일어났다. 왕가의 회의에서 차기 왕을 선임하는데 실패하면 까부스 국왕이 쓴 유언장을 상원 의장과 하원의장(86명 민선 하원의원의 수장), 대법원장, 그리고 군과 치안의 고위 장성이 모인 자리에서 개봉해야 했다.

1월 11일에 공개된 유언장에는 옥스퍼드 대학교를 졸업한 문화부 장관 하이삼 븐 따리끄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는 올해 65세이고 여러 공직을 거치면서 오만인의 사랑을 받는 인물이었다.

까부스 국왕의 발자취

까부스 국왕 때 오만은 대내외에서 여러 가지 도전들이 많았다. 그 중에는 문맹 퇴치, 미신 타파 등도 들어 있었다. 까부스 국왕은 여성 교육에도 힘썼는데 특히 정치 문제에서는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으려고 힘썼다. 그로 인해 오만은 주변 국가의 갈등을 해결해 주는 중립적인 길을 걸어갈 수 있었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이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을 때 오만, 수단, 모로코를 제외한 모든 아랍 국가들이 사다트의 평화협상을 반대했다. 까부스 국왕은 이스라엘과 외교관계를 맺지 않았지만 이스라엘 국가와 대화의 채널은 늘 열어두었다. 더구나 그는 이란과의 외교관계를 굳건히 했고 걸프 국가들과도 관계를 지속하면서 인도와 중국 그리고 아프리카 국가들과의 관계도 신경을 썼다.

1698년 아프리카의 잔지바르(아랍어로는 zanjibaar)가 오만의 영토의 일부가 됐지만, 1856년 사이드 븐 술딴이 죽은 뒤 그의 두 아들 마지드 븐 사이드와 수와이니 븐 사이드가 왕위 계승을 두고 서로 다투었다. 그 결과 오만과 잔지바르가 두 개의 영토로 나뉘었고 수와이니는 오만과 무스까뜨의 통치자가 됐으며 마지드가 잔지바르의 첫 술딴이 됐다. 그 뒤 잔지바르는 다른 국가의 보호령이 됐다가 1964년 이후에는 잔지바르가 탄자니아의 영토가 됐다.

까부스 왕은 예술과 문학과 환경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오만인의 인간성으로 대표 되는 가치로는 평화, 관용, 남을 받아들임 그리고 인종주의를 반대하고 어느 한도를 넘어서지 않는 것 등이 있다. 

1741년부터 현 국왕의 가문이 오만을 다스려왔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왕가의 하나로 알려졌다. 까부스 왕은 시민의식, 학문, 관용의 정신을 강조했는데 이것이 오만의 국가를 이끌어오는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고 이번 왕위 계승 과정에서 보듯이 긍정적이고 안정적인 권력 승계를 보여 주었다. 

오만, 정치적 중개자 역할을 계속할 수 있을까?

지리적으로, 아랍만의 초입에 위치하고 있는 오만은 호르무즈 해협과 오만 해가 마주하고 있어서 이란과 미국 간의 갈등이 지속되는 동안, 오만의 역할이 컸다. 중동과 아랍 국가들 중에서 이란과 이스라엘과 돈독한 관계를 갖는 국가는 없다. 순니 아랍 국가들 중 이라크와 시리아 그리고 오만을 제외하고는 이란과 우호적인 관계를 갖는 나라도 없고 요르단과 이집트를 제외하고는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은 아랍 국가도 없다.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걸프 지역의 정치적 갈등의 파고가 높을 때 오만은 아랍과 걸프 국가의 정치적 현장에서 중립적인 노선을 걸었다. 오만은 미국과 이란이 충돌하는 상황에서 대화의 다리를 놓아주었다. 그동안 오만은 이란과 끈끈한 관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2014년 11월 이란과 미국 간의 공개적인 대화에도 초대됐다.

오만 국왕은 하산 로하니 이란대통령과 회담을 한 첫 번째 세계 지도자이자 아랍 지도자였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대화를 위해, 2018년 10월 마지막 주에 이스라엘 총리 네탄야후를 오만으로 초청했고, 그해 10월 22일에는 팔레스타인 대통령 마흐무드 압바스를 오만으로 초청했다.

오만은 이스라엘과 외교적인 관계를 갖고 있지 않았지만 활발하게 외교적인 대화 채널을 열어 왔다. 그 이전에도 1994년 이스라엘 라빈 총리가 오만을 찾았고 1996년 이스라엘과 오만의 합의로 무역 대표 사무소를 오만에 열었으나 2000년 10월에 폐쇄했다.

시리아 문제에서, 오만의 외교력은 다른 아랍국가나 걸프 국가보다 상당히 독보적이었다. 아랍 국가들이 모두 시리아와 단교했으나 오만은 시리아와 긴밀한 관계를 지속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국왕 하이삼 븐 따리끄가 선왕과 동일한 외교적 행보를 보여줄지 아직은 확실하지 않다. 요르단의 후세인 왕이 줄타기 외교의 명수라고 불렸지만 그를 뒤 이은 압둘라 국왕은 아버지 후세인의 외교적 역량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란과 미국 간의 갈등이 지속되는 한 오만의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우리나라가 오만과의 외교적 관계를 공고히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다.

새 국왕, 오만의 미래를 위한 경제 개혁 절실

까부스는 그의 아버지를 이어서 1970년 7월 왕으로 즉위한 이후, 오만의 부흥을 꾀하고 오만의 발전과 현대화를 모색했다. 그래서 국가 발전 계획을 시행했고 오만 국민의 생활수준도 높아졌다. 1970년대 오만에는 3개의 학교뿐이었고 무스까뜨, 쌀라라 두 곳에만 병원이 있었다. 까부스 국왕은 국가 통합을 위해 힘썼고 국가의 제 부문에서 지속적인 발전을 이루도록 총력을 기울였다. 공정, 평등, 시민 의식을 높이고 국민들이 안전하게 살 수 있게 힘썼다.

하지만 2014년 까부스 국왕이 발병한 이후로는 국왕은 예전과 같이 국정을 챙길 수 없었다. 일부 아랍인들은 까부스 왕 이후의 단계에서 오만이 불확실성이 증폭되는 것이 아닌가하고 우려를 보낸다. 그러나 까부스 국왕이 발병한 뒤 그가 국내와 해외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오만 공직자들은 자기 자리를 지켰고 오만은 국가의 안정을 유지시켜 왔다.

이번에 즉위한 '하이삼 븐 따리끄' 국왕은 오만 국민들의 생활 향상과 경제 통합을 실현하는데 힘쓰겠다고 했다. 아랍 언론에 따르면, 새 국왕은 영국에 유학해 영국 문화에 영향을 받았고 그의 성품은 조용하고 진솔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고 했다.

그는 왕으로 즉위한 뒤 행한 첫 연설에서 국가 간의 평화적 공존과 선린관계를 유지하겠다고 했다. 기존의 국가 간의 협약과 합의를 준수하겠다고 하면서 평화적인 방법으로 국가 간의 갈등을 해결하고 UN과 국제사회에서 실질적인 회원 국가로서의 역할을 다할 것이라고 했다.

오만의 2040 비전은 장기적인 경제 개혁에 관한 것인데 오만이 ‘원유 의존 이후의 새로운 경제 단계’로 진입할지는 2040 비전의 성공 여부에 달려있다. 걸프 지역에서 긴장 수위가 높아지고 있는 현 상황에서 새 국왕이 곧바로 즉위한 것은 오만의 리더십을 필요로 하는 국가들에게는 좋은 조짐으로 보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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