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동포[아니따 최] 공훈예술인 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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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동포[아니따 최] 공훈예술인 되기까지
  • 신성준
  • 승인 2004.11.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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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유서 깊은 문화와 예술이 긍지로 살아 있는 나라.
러시아에서 에술과 문화는 사회를 움직이는 거대한 힘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가레이스끼(한인) 아니따 최가 정상에 우뚝 서 있다.

러시아 음악계에서 공훈연예인 칭호을 받은 한인3세 인기 여가수 아니따 최(33.모스크바 출생)는 동양인으로는 빅토르 최를 이어 두번째 대형가수이다.

그녀가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지난 96년 인기가수 알라부가초바의 공연에서 자신이 작사 작곡한 노래 “비상”을 부르면서부터이다.

80년대 당시.러시아 국민가수 빅토르 최(한인3세,카자흐스탄 출생)가 헌정곡을 불러 러시아 음악계에 최고의 인기와 한국의 최라는 이름을 알린 고려인 가수 빅토르 최였다.구 소련의 변화와 자유를 노래로 표현, 사회변혁을 갈망하는 젊은이들의 우상이 된 히트 곡목은 오늘날까지 그에 대한 기억을 잊지 못하고 있다. (“비상”의 가사에는 자유롭게.. 세상밖으로…날아라, 별들이 잠든 곳으로 ..내 너를 따르리)

아니따는 "진정한 가수가 되기 위해서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죠. 다행이 전 운이 좋아 27년 밖에 걸리지 않았지만요. 왜냐하면 이 장소(러시아 콘서트 홀)에서의 공연은 가수로서의 성공,행운을 의미하는 것인지 잘 몰랐어요. 그때 부른 곡이 빅토르 최에 대한 현정곡 <비상 designtimesp=14525>이었다"한다.

러시아 콘서트 홀은 유명 연예인,공훈예술인에게 주어지는 무대이다. 97년 아니따는 예전의 들러리 초대가수에서 당당한 공훈예술가수로 인정 받게 된 것이다.

이후 아니따 최는 어디를 가든 팬들의 둘러싸이는 유명세를 치른다.그녀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꽤 폭넓은 팬들을 가진 편이다.

눈코 뜰새 없이 바쁜 하루지만 아니따는 아들 정석이를 곁에 두어야 마음이 놓인다.남편 세르게이는 모스크바 시장 수석비서관, 남편의 이해가 없었다면 가수활동을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노래 하는게 꿈 이었다.
사범학교를 졸업했지만 교사의 길을 가지 않고 다시 음악원 학생이 된 것도 단지 노래를 하고 싶어서였고 음악에 대한 재능을 인정 받아 장학금을 받는 등 꾸준한 작곡과 작사로 자신의 능력을 키워나갔다.

남편 세르게이는 80년 로스토프 종합대학을 졸업하고 신문기자(시청 출입기자)에서 93년 지금의 모스크바 시장으로 당선된 루쉬코프를 만나 일약 수석비서로 발탁됐다. 지금도 아니따 부부는 자신들의 성공이 믿겨지지 않는다고 한다.

두 사람의 만남은 20살 음악도였던 아니따와 서른네살 노총각 세르게이는 축복속에 부부가 되었다.그리고 그 이듬에 아들 정석이가 태어났다. 그 당시 하루 종일 일해도 먹고 살기 빠듯했던 시절, 생활 비용을 벌기 위해 질그릇 공장에서 일했던 남편과 남대문시장과 루즈니끼 시장을 오가며 옷장사를 시작한 아니따는 그 돈을 벌어 가수가 되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노래를 세상에 알려야만 했고 음반과 뮤직비디오를 만들기 위해서는 만달러 라는 거금이 필요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 몰래 시작한 장사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믿을 수가 없다는 듯, 남편은 그 작은 여자가 어떻게 자기만한 그 무거운 상자들을 옮길 수 있었는지…. 시장에서 번 돈으로 아니따는 좀더 큰 수익으로 큰 사업을 구상했다.그것은 패스푸드점 이었다.당시만 해도 러시아 사람들에게 생소했던 패스트푸드점을 홍보하기 위해 아니따는 모델들을 선발해 일기예보를 섞은 패스푸드점 광고를 만들어 대대적인 TV홍보를 했다.

그녀의 마케팅 전력은 모스크바 TV에 새로운 광고 유형으로 자리잡을 만큼 큰 성공을 거두었다. 유명해진 패스트푸드점을 비싼 가격에 팔고 아니따는 작업실을 마련했다.

본격적으로 음반과 뮤직 비디오 제작 준비에 들어간 것이다.그런데 아무리 열심히 작곡하고 연습을 해도 소득이 없었다.정작 음반을 만들어 주겠다는 제작자가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이유는 그녀의 외모 때문이었다.당시 아니따의 몸무게는 96키로그램. 뚱뚱한 그녀의 몸매가 그토록 원하던 가수의 길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따는 지체 없이 다이어트를 시작, 결국 40킬로그램 감량에 성공했다.

노래를 하고 싶다는 그녀의 집념은 아무도 꺾을 수 없었다. 드디어 자신의 첫 음반을 제작하면서 아니따는 정식가수로 데뷔하게 된다.그리고 그녀의 첫 앨범과 뮤직비디오는 러시아 대중음악계에 커다란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한인3세가 대중문화의 중심에 서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남편의 정치적 영향력을 등에 업은 "반짝스타" 라는 비난이 한동안 그녀를 괴롭혔다.

러시아 공훈예술 가수로서 당당히 말하고 있는 아니따 "러시아는 거대한 예술문화를 가지고 있다.차이콥스키,까발렙스키,라흐마니노프 등 많은 유명음악인들을 세상에 선사했죠.전 이런 곳에서 살고 있는 것이 기쁘고 그런 예술문화에 제 음악이 조금이라도 속할 수 있다는 것이 제일 큰 기쁨"이라고 자평했다.

지금 러시아에는 까레이스키(한인)가 살고 있다.그들은 오늘 정상에 선 그들의 딸 아니따를 지켜보고 있다.지난 9얼22일 한국관광공사로부터 한국문화관광 홍보대사로 위촉되기도 했다.

아니따의 화려한 성공은 결코 아니따의 것만은 아니다.러시아에 살고 있는 한인 모두의 꿈이자 희망이기 때문이다.
모스크바=신성준기자<재외동포신문 designtimesp=14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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