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연극 입문기> 연극처럼 되살아난 나의 연극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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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극 입문기> 연극처럼 되살아난 나의 연극 인생
  • 임용위
  • 승인 2004.11.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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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잡은 직장은 백화점의 판촉실에서 촉망받는 광고 기획 담당자였고 꼬박 1년을 넘게 근무하는 동안 늘 생각은 서울 대학로의 굿판에 가 있었다.
4남 1녀의 장남. 아직 대학에 재학 중인 동생 둘과 대학에 곧 들어갈 막둥이 동생까지, 정년 퇴직에 가까운 아버님의 연로해 가시는 집안 사정에서 직장을 박차고 서울 상경이란 말은 결코 어울리지 않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나는 감행했다. 집안의 가장이 되었어야 하는 생각을 포기하는 대신에,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무작정 상경'의 길을 택했다.
그 순간부터 이어져 온 나의 20년 생활은 결국은 고달프고 고통스러운 나날들이 더 많았다. 나의 돌연한 선택으로 인해 나를 떠나보낸 가족들도 많이 힘들었지만, 식구들은 식구들 나름대로 각자의 생활을 개척해 나갔다.
대학로가 아닌 운니동(낙원상가 부근)의 극단 실험극장이 내가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달려간 곳이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실험극장으로 달려간 것이 참 잘한 결정이었다고 늘 생각한다. 말이 쉽지 실험극장의 문전에서 너 댓 시간을 배회하고 나서야 사무실에 들어가 겨우 나의 등장을 알려야했을 만큼 소심하고 나약하기 그지없는 촌놈이 당시의 나였다.
'난 배우가 되고 싶어서 광주에서 왔습니다. 뭐든 시켜만 주세요.'
이 말이 실험극장에 입단해 연극으로 입문하게 되는 인생의 첫 대사였다.

잘나가던 연극써클 배우

대학교 신입생 환영공연을 전대 극회에서 신입생 자격으로 주인공을 맡았을 만큼 나는 연기자로서 타고났다고 생각했다. 체홉의 '벚꽃동산', 아라발의 '싸움터의 산책'에서부터 창작극인 이상의 '날개' 등에 이르기까지 정통 영미 희극에서부터 희랍극, 세익스피어 극까지 수많은 작품에서 거의 주연을 도맡아시피 했던 게 나의 대학시절 써클 활동의 눈부신 성적이었다.
전국 대학연극제를 유치진의 '소'를 두 달 연습해 출전한 우리 팀은 중앙대 강당에서 대상을 받기도 했다. 그때 내가 맡았던 역은 개똥이. 서울 연극나들이에 단체의 일원으로 처음 나섰던 흑석동 캠퍼스에서 나는 서울 중앙무대의 히어로를 꿈꾸고 있었다.
당시 대학 3학년의 79년 가을, 농학 전공의 농대생인 나는 학사경고 퇴학조치라는 불명예를 미리 예감하고 곧바로 휴학을 신청해 군 입대 신청을 했다. 연극에 쏟아바친 열정에 후회가 없었던 만큼 공부에 소홀히 해서 얻은 결과에도 담담할 뿐이었다.
82년 4월, 남들보다 4개월 일찍 재대(대학생 특혜)하고 그 해 대학 후학기에 나는 전남대 인사대 계열에 복 전학신청을 했다. 교양과목 18학점을 입대 전 취득한 것이 인정돼 인문계 미달학점을 썸머스쿨에서 보충하고 사회학과 2학년 2부터의 대학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난 무섭게 공부에 전념했다. 입대전의 '연극써클' 대신 도서관에서 거의 파묻혀 지냈다. 5개 학기를 4학기만에 수료해 84년 코스모스 졸업에 성공하기까지 거의 20Kg의 살을 도적 맞아야 할 만큼 대단한 집념으로 버텨온 당시였다.

배우로서의 사형선고

실험극장의 궂은 일은 도맡아하면서 버텨온 힘이, 사회학과 시절의 코피를 펌프질해서 물 쏟아내듯이 쏟아내고 학점 따기에만 전념했던 경험이 버팀 몫이 되었던 것 같다. '신의 아그네스'가 수년간 롱런의 힛트를 치고 있었던 당시의 실험극장에서 내가 하는 일은 고작 포스터를 붙이러가거나 공연이 끝난 막 뒤에서 기라성같은 선배들의 의상과 소품들을 챙기는 일이었다.
윤석화, 윤소정, 이정희 선배는 결코 그들의 시선에 내가 포착되지 않았다. 그래도 행복했다. 연극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집단에 가장 가까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하루하루가 설레고 고달프지만은 않았던 나날이었다.
실험극장의 대표작 '에쿠우스'를 연습하는 과정에 처음 캐스팅 배우로 참여하는 행운을 가졌다. 그 전까지 몇 편의 단역배우로 한 두 마디의 대사에 의존하는 무명의 배우이기는 했지만, 내심 에쿠우스의 알란 역에 캐스팅되는 3대(1대 강태기, 2대 최민식) 주인공의 욕심을 노려보고 있는 터였다. 캐스팅이 결정되는 날 나는 '배우로서는 소질이 없는 사람'으로 연출가 윤호진씨에게, 배우로서는 사형선고와도 같은 얘기를 들었다. 지방 사투리가 고쳐지지 않는다는 수백 번의 지적을 바로잡지 못하고 알란 역은 외부에서 공급된 최재성에게 낙찰되었다.
오로지 배우가 될 일념으로만 버텨왔던 나는 모든 연극에 대한 희망을 송두리째 떨어버리고 실험극장을 나왔다. 당시 나의 나이는, 더 이상은 다른 극단으로 옮긴다한들 받아줄 리 만무한 너무 늙은 무경력자의 30세였다.
결혼, 사업, 여행, 이런 것들의 평범한 일상에 묻혀 극히 평범한 생활은 시작되었다. 연극에 대한 미련은 가슴속에서 서서히 지워져갔다. '아가씨와 건달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대작을 간간이 관객의 입장으로 보곤 했던 나는 이미 무대에 오르거나 무대를 꾸미는 연극인으로서의 희망은 이미 내 인생에 더 이상 없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연극과도 같은 부활

멕시코에 오기 전, 한국에서의 마지막 몇 달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을 만큼 비참하기 그지없는 나날들이었다. 아내와 자식(당시는 두 사람조차 큰 부담의 짐이었다)외에 붙잡고 의지할 지푸라기 하나 없이 딱 죽고 말면 십상일 만큼 세상에서 버려진 내가 어떤 생각으로 희곡 한 편을 완성할 수 있었을까? 유서 하나를 장문으로 남긴다는 심정이었을까? 거침없이 써 내려간 글은 단 열흘만에 하나의 희곡작품으로 완성이 되었지만 거의 1분 1초도 쉼 없이, 먹지도 자지도 않고 컴퓨터 자판에 매달리며 지낸 열흘 간의 시간 속에서 태동한 작품이었다.
멕시코로 향하기 전날 난 대본으로 완성한 작품을 실험극장의 김성노 연출가에게 집어던지듯이 인계하고 돌아왔다. 무대에 올려진다는 건 상상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한번 훑어보기라도 한다면 다행이다 생각하고 나는 더 까마득하게 한 때의 실험극단 소속배우였다는 걸 잊어버리고 장도에 올랐다.
그 후로 6년의 세월이 지났다. 3년 전에 김성노씨는 내게서 인계 받은 '무화과 꽃'을 내가 한국을 떠난 3년 뒤에 실험극장 창단 40주년 기념 공연으로 무대에 올렸다. 나는 나대로 그들은 그들대로 서로가 하는 일이나 장소를 모르고 작가 없는 작품을 1999년 가을무대로 올렸던 것이다.
3년이 더 지나 앙콜 공연으로 '무화과 꽃'이 공연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극히 우연이었다. 연출가 김성노씨와의 통화로 알게 된 희곡작가로서의 등단은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서 나라는 존재를 수소문해서 찾은 김 선배의 집념 이상으로 내게 큰 의미로 다가왔다.
내가 가야 할 길이 엉뚱하고도 순식간에 이루어진 멕시코 한인사회의 일각에서 결코, 엉뚱할 수도 순간적이지도 않았던 세월의 장시간 침묵 속에서 나는 나 나름대로 글쓰기에 전념해오며 트레이닝 작업을 펼쳐왔다는 생각이 든다.
난 여유를 가진다. 그리고 이미 행복해질 대로 행복해진 나를 발견한다. 한편의 '무화과꽃'이 결코 피지 않을 꽃으로만 여겼던 나의 연극에 대한 인생은 소리 없이 그렇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그 높고 고귀한 장소로 인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임용위/극작가(오늘만큼은 '작가'라는 네임을 붙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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