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산책] 3.1운동과 세가지 독립선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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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산책] 3.1운동과 세가지 독립선언서
  • 이형모 발행인
  • 승인 2019.02.28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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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강화회의 김규식 대표 '서울에서 대한독립을 선언해 주시오'
▲ 이형모 발행인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

제1차 세계대전 막바지인 1917년 4월 미국이 참전을 결정하고, 1918년 1월 8일 미국 대통령 윌슨이 의회에서 ‘윌슨의 14개조 평화 원칙’을 발표하면서 세계 정의와 평화의 확립을 위해 ‘비밀 외교의 폐지와 민족 자결주의’를 선언했다. 

이 선언에서 윌슨 대통령은 공개적인 평화협정과 식민지의 주권 회복을 포함한 모든 요구에 대한 공정한 조정과 약소민족들의 독립을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강대국이나 약소국 모두에게 정치적 독립과 영토 보전을 보장할 수 있는 국제기구 창설을 제창했다.

파리강화회의와 ‘대한독립선언’의 필요성

1918년 11월 11일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종전의 사후처리를 위해 1919년 1월 ‘파리강화회의’가 열렸다. 전후처리 과정에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해 약소국들과 식민지들의 독립이 논의될 것으로 판단하고, 상해에 있던 청년 독립운동가들은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1918년 10월 경 여운형과 5인의 동지들은 파리강화회의에 가서 조선의 독립을 청원할 대표로 천진에 있는 김규식을 초청해 파견하기로 의논하고, 11월 ‘신한청년당’을 결성했다.

여운형은 김규식을 위해 중국 여권을 만들고, 여비를 모금했다. 파리까지 타고 갈 배편도 이미 매진된 상황에서 중국대표단의 여성 한사람에게 양보 받아 김규식이 출발할 수 있도록 도왔다.

파리로 출발하기 전에 김규식은 동지들에게 말했다. “내가 가서 일제의 학정을 폭로하고 선전하겠다. 그러나 나 혼자의 말만을 가지고는 세계의 신용을 얻기가 힘들다. 그러니까 신한청년당에서 서울에 사람을 보내어 대한독립을 선언해야 되겠다. 가는 그 사람은 희생을 당하겠지만, 국내에서 무슨 움직임이 있어야 내가 맡은 사명이 잘 수행될 것이고, 우리나라의 독립에 보탬이 될 것이다.”(부인 김순애의 회고)

무오독립선언서는 ‘대한독립선언’

김규식이 출발하자 신한청년당은 장덕수를 국내로 보내 이상재, 손병희 등과 접촉해 김규식의 파리강화회의 파견 사실을 알리고 국내에서 대한독립을 선언해야 할 필요성도 함께 설명했다. 여운형은 만주를 거쳐 블라디보스톡으로 가서 이동녕, 문창범, 박은식, 조완구 등을 만나 독립운동의 방략을 의논했다.

첫 번째 독립선언서는 무오독립선언서이다. 만주와 연해주에서 1918년 12월 소앙 조용은이 ‘대한독립선언서’를 작성해 김규식, 김좌진, 이동녕, 이동휘, 이범윤, 이상룡, 이승만, 이시영, 박용만, 박은식, 신채호, 안창호, 허혁 등 민족지도자 39인의 서명을 받아 1919년 2월 1일에 발표했다. 무오년에 작성되어 '무오독립선언서'로 불리는데, 민주공화국으로서 정치, 경제, 남녀평등의 국가 건설을 지향하는 심오하고 확고한 이상이 담겨 있다.

동경조선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서’

무오독립선언서에 이어 2.8독립선언서는 동경의 조선유학생들이 1월 6일 웅변대회에서 독립운동 실천을 위한 실행위원 11인을 선정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그들을 중심으로 조선청년독립단이 조직되고, 2월 7일 춘원 이광수가 독립선언서를 기초해 11인 실행위원이 서명했다.

2월 8일 오전 조선청년독립단은 독립선언서 결의문 민족대회소집청원서를 각국 대사와 조선총독부, 일본 국회의원과 신문사, 잡지사에 우송했다. 오후 2시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600여명의 조선유학생들이 모여 유학생학우회 총회를 개최했다. 백관수가 2.8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김도연이 결의문을 발표했다.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께 대회장은 '조선독립만세'를 부르짖는 함성으로 가득 찼다. 이어서 가두시위행진을 시도했으나 일본경찰은 2.8독립선언 주도자 27명을 체포했다. 이에 굴하지 않고 남은 유학생들은 2월 12일, 28일에 히비야 공원에서 조선 독립을 외치며 가두행진을 벌였다.

3.1운동과 ‘기미독립선언서’

일제의 수도 동경에서 조선유학생들이 외친 2.8독립선언은 3.1운동에 강력한 도화선이 되었다. 3월 1일에 미리 계획했던 대로 서울과 평양, 의주, 선천, 안주, 원산, 진남포 등 7개 도시에서 동시에 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됐다. 육당 최남선이 ‘조선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민족대표 33인 중 29인이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 모여 세브란스 의전학생 서영환을 통해 독립통고서를 조선총독부에 전달했다. 오후 3시 한용운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일본 경찰에 스스로 체포됐다. 한편 탑골공원에서 민족대표를 기다리던 학생들은 2시 30분에 따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두 갈래로 나뉘어 행진하며 시위를 벌였다.

그 날 이후로 하루도 쉬지 않고 만세 시위는 전국의 도시와 농촌으로 확산됐다. 3월 1일~7일에는 평안남도에서, 3월 중순에는 함경도와 경북, 전북에서, 3월 13일에는 연변 용정에서 만세 시위가 벌어졌다. 전국 220군 가운데 211군에서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교사와 학생, 지식인들이 선언서 등의 유인물과 시위 경험을 각 지역에 전파했고, 비밀결사를 조직해 시위를 조직하고 주도했다. 민족대표들의 독립청원 형식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청년 학생들은 민족의 주체 역량으로 독립을 쟁취할 것을 주장했다.

3.1운동은 3.1혁명이다

3.1운동은 비폭력운동이고 민족자결 독립운동이며 대한민주공화국을 지향하는 혁명이다. 전국적으로 빈부귀천, 남녀노소, 내외동포가 함께 참여했다. 1910년 일제강점으로 대한제국이 붕괴되고 1919년 1월 21일 고종황제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깊은 좌절에 빠졌던 대한의 백성들은, 민족자결주의가 선언된 국제사회의 격변에 발맞춰 독립만세운동으로 나라를 되찾고 백성이 주인 되는 나라를 건설한다는 소망으로 민족정신이 새롭게 깨어났다.

특히 무오독립선언서에는 남녀빈부를 평등케 하고, 지우노유(知愚老幼)의 평등을 명시함으로, 정치적 평등, 경제적 평등, 남녀평등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지적 능력 차이나 연령의 고하를 포용하는 평등사회를 목표했다. 후기 조선사회의 부패와 적폐를 일소하고 선진문명국가로 발돋움하는 혁명이 아닐 수 없다. 그 토대 위에 1919년 4월 11일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졌다.

3.1혁명의 이상은 100주년이 됐어도 그 실현이 크게 미흡하다. 아직도 남북분단 상황이다. 지금은 100년 전 애국선열들이 선언했던 새 나라를 이루기 위해 이념, 종교,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망라하고, 남북한과 재외동포 모두가 함께 평화와 통일의 길로 전진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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