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와 이민은 인간의 역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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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와 이민은 인간의 역사였다
  • 히스토피아 편집부
  • 승인 2003.02.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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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역사는 보다 나은 삶을 향한 끊임없는 이주의 역사였다. 이브의 '호기심' 때문에 "에덴의 동산"에서 추방된 그 순간부터 인간은 '차선의 대지'를 향한 기나긴 여정을 계속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원주민과 모국(母國)은 신화에 불과하다. 단지 정착민과 '고국'(故國)이 있을 뿐.

미국 이민의 원조 집단이 '인디언'이라면 유럽에는 켈트족이 있다. 오랜 세월 유럽의 주인을 자처했던 전사집단 켈트족 또한 '터'를 잡고 정착하는데 만족하지 않았다. 켈트 역시 새로운 대지를 향한 노정을 시작했고 그 결과물 가운데 하나가 '영국'이다. 이민 1세대인 이베리아인을 몰아낸 뒤 프랑스 브리타뉴 지방의 켈트족이 자리잡은 땅, 브리타니아/브리튼. 하지만 영국 역시 켈트족이 영원한 주인일 수는 없었다. 켈트족은 대륙과 영국제도 모두에서 라틴, 게르만, 슬라브족에 차례로 터전을 내준 비운의 역사를 경험했다.

한편 영국제도에서 번영의 터전을 마련한 뒤 오늘날 북아메리카와 오세아니아 대륙의 주류 사회를 형성하고 있는 앵글로색슨의 터잡기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로마제국의 붕괴 이후 잉글랜드의 주인이 되었지만 이들 역시 노르만 정복시대를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객지생활보다는 귀향을 권장하며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삶의 터전을 지켜나가는 것이 미덕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흔히 중세 유럽을 "머물러 사는 사람들의 사회"로 표현하기도 한다. 사실 머물러 산다는 것은 농경시대에 안정적인 노동력을 유지하는 수단이었다. 그래서 서양 중세의 교회조차 한 곳에 머물러 사는 사람들을 축복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서양 중세조차도 결코 정착으로 일관된 시대는 아니었다. 중세야말로 오늘의 유럽을 만든 이주와 이민의 시대였다. 게르만의 남하와 노르만의 유입. 프랑스 역사학자 뒤비(G. Duby)조차 중세인들의 "이민족에 대한 두려움"을 일반적인 시대 정서로 지적하고 있지 않은가. 중세가 유럽 대륙으로의 이주 시대였다면, 근대는 아메리카를 중심으로 한 타대륙으로의 이민 전성시대였다.

근대국가 가운데 사상 유래가 없는 인구 유출을 경험한 국가는 아마도 아일랜드일 것이다. 1840년대 800만의 인구를 가졌던 아일랜드. 아일랜드는 1850년대부터 1914년까지 약 400만 명이 이민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대다수가 미국행을 선택했던 아일랜드인들의 이민행렬. 이런 상태가 30년만 더 지속된다면, '아일랜드인 없는 아일랜드 땅'이 될 것이라는 당시 지식인층의 위기의식이 실감날 정도이다. 이민 선진국이었던 영국 역시 1850년대에는 157만 명, 1880년대는 325만 9천 명, 1990년에는 315만 명이 이민을 선택했다. 10년 마다 전체 인구의 10%가 유출된 셈이다. 이탈리아에서는 1860년대 2만 7천 명에 불과했던 이민 인구가 1880년대 100만 명, 1901-10년 사이 360만 명에 육박하게 된다. 1900년의 이탈리아 인구가 3300만 명 정도였음을 감안해 볼 때, 이탈리아 역시 20세기 최초 10년 동안에만 전체 인구 가운데 10%이상이 타국살이를 선택했던 것이다.

인류는 왜 새로운 대지를 향한 끊임없는 여정을 계속하고 있는가?

비옥한 땅을 찾아 '출애급'을 감행했던 게르만과 노르만의 '집단적 이주'. 게르만과 노르만의 출애급의 꿈 역시 '보다 나은 삶의 터전' 마련에 있었을 것이다. 출애급이 개인의 선택 문제가 된 근대 사회 역시 이민의 목적은 동일한게 아닐까.

유럽은 1848년 혁명 전후로 정치와 경제 모두에서 격변기를 맞이하게 된다. '짐이 곧 국가'였던 시대에서 평등한 개인의 주권시대인 '시민사회로의 전환'을 위한 진통들. 자본주의와 산업사회로의 이행과정에 나타나는 다양한 문제점들. '근대국가'를 출산해내기 위한 진통과정 속에서 경제적 위협에 민감한 시민계층이 항상 가장 큰 피해자였다. 아일랜드에서는 1846년부터 49년까지 계속된 '감자 대기근'으로 인구의 1/8에 해당하는 100만 명이 아사했다. 물론 가난 극복이 이민의 전부일 수는 없다. 정치적인 이유나 개인적 야망도 이민 결정의 동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일랜드의 경우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인구의 대량 유출을 경험했다. 감자 대기근 이후에 말이다. 19세기 후반 아일랜드의 뒤를 이어 가장 많은 이민을 경험한 이탈리아 역시 정치/경제적 위기가 연이은 출애급 행렬의 주요 원인이었다. 1861년 공업지대인 북부지방을 중심으로 한 통일 이탈리아 공화국 건설과 농업지대인 남부의 반발, 그리고 10여 년간 계속된 남북 내전. 이로 인해 이탈리아 남부 농업지대는 황폐화되었고, 뒤이은 저가 미국 농산물의 대량 유입은 남부지역 소농들의 파산을 양산해냈다. 결국 많은 남부 이탈리아인들은 새로운 터전을 찾아 이민을 선택했고.

그러면 '시련을 극복한 뒤' 출애급의 주인공들은 '애급'으로 귀향했는가? 연구 사례를 보면 절대적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 고국의 경제 조건이 주요 변수로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으로 보면 1860년-1930년 사이 이민한 스칸디나비아인들의 20%가, 영국과 웨일즈 이민의 40%가 역(逆)이민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구체적인 자료는 없으나 많은 연구자들은 산업화에 실패한 후 경제적 위기에 장기간 노출되었던 아일랜드의 경우 역이민의 비율이 현저히 낮았음을 지적하고 있다. 과연 이민과 '애급'으로의 귀향 포기는 고국에 대한 이적행위일까? 아일랜드의 경우, 대량 이민 이후 실질 임금 지수가 1855년-1857년에 105.1에서 1875년-77년에 164.6으로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자국의 인구 감소로 인해 도시 생계비용이 하락, 1850년-1890년대 사이 더블린에 거주하던 건축 기능공의 명목임금이 60%에서 80%까지 증가했다는 보고도 있다. 이밖에도 임금 소득 향상 정도를 측정하는 지표인 담배, 차, 설탕 소비와 1인당 저축액의 증가도 목격된다. 우체국과 은행 계좌 개설 인구가 아일랜드 내에서 1881년-1910년 사이 4배 이상 성장했으며, 예금 총액도 380만 파운드에서 1550만 파운드로 확대되었다는 연구사례도 있다. 1880년대 우체국과 은행이 서민들에게 여전히 낯선 것이었음을 상기해 볼 때 실제 순수 저축액의 수치는 더 높을 가능성이 있다.

이렇듯 서구 사회는 이주와 이민을 남은 자와 떠난 자 모두의 행복 증진의 기회로 활용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출애급'은 결코 회피와 도주가 아니었다. 오히려 위기와 당당하게 맞서려던 사람들의 의지와 삶에 대한 애착의 역사였다. "아픈 상처도 산 자만이 걸치는 옷".

오늘날 한국사회의 정치/경제적 위기도 '머물러 사는 사회'라는 신화 파기의 전환점이 되어야 한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도전, 그것은 '희망과 상생'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Tomorrow is another day!".


<자세한 사항은 www.histopia.com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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