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유럽한인동포의 반유신운동과 반독재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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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유럽한인동포의 반유신운동과 반독재운동
  • 김해순
  • 승인 2004.08.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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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유럽한인동포의 민주화운동 1
 

재유럽한인동포의 민주화운동 1  


김해순 (재독 사회정치학 박사)


재유럽한인동포의 민주화운동은 전반적으로 볼 때 독일에서 가장 활발했고 규모도 컸으며 가장 오래 지속되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독일에 동포가 가장 많이 살고 있었고 그들의 두드러진 정치의식과 활발한 정치활동 그리고 연대성에 기인한다고 본다. 그밖에도 당시 제3세계의 운동을 물심양면으로 돕고 많은 배려를 아끼지 않았던 독일정치단체를 빼놓을 수 없다. 그 결과 재유럽동포의 민주화운동은 독일을 위주로 발전되었다고 보아도 과히 틀린 지적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재유럽한인동포의 반유신운동과 반독재운동을 위주로 논해보려고 한다.


재유럽한인동포의 반유신운동과 반독재운동

재유럽한인동포의 민주화운동의 시작은 1972년 10월 비상계엄선포와 11월 유신헌법이 발표된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사건이 있기 전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자 온 세계의 시선이 집중되어 통일에 대한 기대는 상당히 고무적이었다. 그러나 유신정책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선거로 이어지고 1973년 8월 김대중씨의 도쿄 납치사건이 알려지자 통일에 대한 밝은 기대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대통령특별선언과 국회해산에 따른 학생데모와 소요가 계속되는 정치적 흐름을 직시하면서 국외 동포들도 조국의 장래를 우려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해외에서 국내신문을 빨리 받아볼 수 없었다. 국내에서 잇따라 일어나는 정치적 사건으로 치열한 열기는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야 유럽에 닿았다. 정보 역시 자유롭게 제공하고 받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받은 정보도 정확한지 아닌지 분간할 수도 없었다. 철저한 냉전시대에서 받았던 반공교육의 영향으로 동포들은 정치적 모임에 마음놓고 참여하지도 못했거니와 그 당시 정치적 흐름도 이런 모임을 억제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럽한인동포 중 몇몇은 유신과 정치적 사건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얻고자 노력하면서 조국의 발전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독일에서는 1973년 11월말과 12월초에 8명이 비밀리에 만났다고 김성수(재독 학자) 박사는 회고한다. 그들은 대부분이 학생이었으며 광부도 몇 사람 참여했다고 한다. 이 모임이 초석이 되어 ‘민주건설협의회’가 독일에서 1974년 3월 1일에 삼일절을 기해서 탄생되었다. 그 해 3.1절이 55해를 맞아 55명이 반독재에 대한 성명서를 냈다. 유럽에서 반유신운동과 반독재운동은 그 당시 스웨덴에서 유학하던 김영두씨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한다.

 

사실상 1974년 1월에 ‘대통령긴급조치`가 발표되고, 유신헌법의 개정을 주장하거나 조치위반행위를 하는 사람, 심지어 이 정책을 비방하는 사람에게도 가중한 처벌이 내려졌다. 이들을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한다는 규정이 나오자 동포들은 서로 터놓고 이야기할 수도 없었다. 물론 국내단체만큼 직접적인 정치적 압박이나 법적인 처벌이 가해지거나 인권을 유린당했던 것은 아니지만, 자유롭게 반유신운동에 참여하고, 토론하고, 정보를 쉽게 주고받을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 운동의 가담자는 ‘공산주의자`나 `빨갱이’로 낙인 찍혔고 일반 동포들은 그런 사람들을 피하며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대통령긴급조치에 의해 민주인사와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 관련자를 처벌하는 엄청난 사건과 박정희 3선 개헌으로 열띤 반대투쟁이 계속되는 여파는 재유럽한인동포를 활발한 반유신운과 반독재운동으로 이끌어갔던 것이다. 그 동안 노동자가 개인차원에서 이 운동에 참여하다가 1975년에는 노동자연맹이 재독노동자의 단체의 명의 아래 합세했던 것이다. 노동자는 당시 체류자 중에 숫자적으로 가장 많아서 점차 민주화운동에도 그들의 영향력은 커갔다.

 

재독운동권은 국내의 운동권처럼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이루는 데 미군의 한반도 주둔을 걸림돌로 보았다. 이들은 1978년 한반도미군철수를 요구하는 데모에서 유신철폐를 외쳤으며 유럽인의 이목을 한반도 미국정책에 집중시켰다. 1979년 10월 26일 박재규씨에 의해 박정희 대통령 피살사건이 알려진 다음 날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는 반유신 시위행진과 성토대회를 가졌다. 그리고 나서 10월 30일에 주독대한민국대사관을 40여 명명이 점령하였다. 역사상 처음 있었던 사건으로 기록된다. 점령자는 노동자와 학생 그리고 지식인으로 구성되었고, 1963년부터 1967년까지까지 주독대한민국대사를 지냈고, 외무부장관을 역임한 바 있고, 미국으로 망명했던 최덕신 대사도 동참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저격사건으로 국외에서도 유신체제와 반독재정책이 종료될 것으로 믿고 마치 ‘서울의 봄’이라는 생각을 갖는 사람도 개중에는 있었다. 그러나 1980년 광주사건으로 인해 민주주의를 평화적으로 재건하고 민족통일을 역사적 대업으로 안고 발전을 지향하는 기대는 그 힘을 잃어갔다. 그리고 그 자리는 분노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찢어진 깃폭”이 전달된 것이다. 광주사건의 한 목격자의 보고문이었다.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학생들과 지성인 그 밖의 여러 동포들이 모여서 글을 읽고, 공수특전단의 만행에 분노했으며 피바다가 된 광주의 상황을 상기했다.

 

그리고 곧 이어 재유럽한인동포들은 광주시민, 학생들과 손잡고 민주화운동에 연대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광주의 만행이 적힌 편지를 유포하여 광주사태의 진상을 외국에 널리 알리기로 했다. 세계의 여론을 이끌어 내는 데 중요했고, 국내의 정치압박과 인권유린을 차단하는 데 한 수단으로 보았던 것이다. 특히 김대중씨 사형선고가 알려지자, 석방운동에 나섰다. 독일운동권과도 연대를 꾀했고 주요한 국제기구 예를 들어 국제사면위원회와도 긴밀한 연락을 주고받으며 민주인사를 구출하는 데 전력을 다했던 것이다. 재독한인의 민주화운동은 이전에 보지 못했던 질적 그리고 대중적인 차원으로 부상했던 것이다.

 

독일에서 해마다 개최되는 5월 메이데이 시위에 가담하고 행진하면서 우리 동포들은 조국의 민주화를 주제로 삼았다. 재독한인민주화운동권은 조국의 운동권과 점차 긴밀한 연대를 형성해 나갔고 독일의 민주화운동권과도 돈독한 관계를 성립하였다. 해외한인민주화운동이 활발할수록 인권탄압 정책은 가중되었다. 민주화운동인사들은 당시 의식적이고 진보적이었다. 그래서 ‘좌경용공분자’ 또는 ‘북한의 끄나풀’로 지목 받았다. 이러한 눈길은 한인동포들 사이에도 골이 깊게 파고들었다. 민주화운동을 적대시했던 동포와 운동권 사이에 상호불신감과 적대감이 커갔기 때문이다. 당시 대사관을 위주로 조직된 한인회와 운동권은 서로의 모임과 활동을 비방했고 때로 오도된 정보를 확산시키기도 했다. 양분논리의 사슬에 얽매어 불신풍조가 파다했다. 

 

재독동포의 민주화운동은 여러 면에서 특성을 보이며 많은 기능을 담당해 왔다. 이 운동은 조국의 민주화운동의 여파에 대한 반응이었다. 운동지사는 조국의 민주화운동을 유럽의 운동과 부분적으로나마 연결하여 유럽의 현장에서 힘을 모아 세계의 한국에 대한 여론형성을 위한 하나의 교두보로서 그 역할을 수행했다. 한국의 민주화를 위한 세계적인 흐름을 긍정적으로 이끌어 가는 데도 그 역할이 주어졌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들은 조국통일운동과 노동운동의 기수였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조국으로 돌아가는 길이 막히게 되었다. 상당수의 인사들이 30-40년 이상을 고향 땅을 아직도 밟아보지 못하고 있다. 그 동안 그리던 조국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민주인사들도 있다. 이들의 땀과 의지, 노고와 공산주의자로 또는 빨갱이로 낙인 찍혀 겪은 수모는 조국이 민주주의로 발전하는 데 한 몫 했음을 우리는 주지해야 할 것이다. 현 문민정권은 민주화운동지사들이 대다수인 만큼 해외의 민주화인사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들의 정치적 명예회복은 정당하고 긴급한 정책현안으로 받아들여야 하고 이들의 조국방문을 막는 국가보안법은 시정 극복되어야 한다. 민주인사들이 조국에서 여생을 보내며 활동할 수 있도록 선처하고 배려해야할 뿐만 아니라 정책적, 제도적으로 대책이 강구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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