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예술은 "금으로 만든 컴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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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예술은 "금으로 만든 컴퓨터"
  • 오니바
  • 승인 2004.08.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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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리에서 만난 사람들2 빠리방문한 뉴욕거주 화가 강익중씨

출처 : 프랑스 동포신문 오니바 96년 11월15일자

뉴욕에서 활동중인 화가 강익중씨(37)가 이달초 빠리를 방문했다. "백남준과의 2인전" "3인치 화가"등으로 뉴욕과 한국의 화단에 신선한 충격과 함께 많은 화제를 낳고 있는 그가 바쁜 일정중에 빠리를 방문한 이유는 다소 엉뚱하다. 빠리에서 가장 값싸고 맛있는 음식을 하는 중국식당을 조사하기 위한 것이다.

이미 뉴욕판 중국식당 가이드를 1백부 만들어 휘트니 미술관에서 전시 판매를 했는데 반응이 좋아 빠리 런던 베를린판 가이드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강씨는 이를 위해 사흘동안 빠리 13구와 벨빌의 중국식당가를 순례했다. 강씨는 평범해 보이는 식당도 창문으로 한번 들여다 보고는 그 식당의 여러가지 수준을 알아내는 능력을 발휘해 동행자들을 놀라게 했다. 게다가 맛을 확인해야 했기에 하루에 다섯끼 이상을 먹어 몸이 풍선처럼 불었다고 한다.

이처럼 장난스러운 듯이 보이는 그의 빠리행각에는 다음 작품을 위한 모종의 구상과 계획이 담겨있는 듯이 보이는데 이에 대한 질문에는 완강히 "노 코멘트".

13년간의 미국체류 초기 가난한 유학생이었던 강씨는 맨하탄의 한국식품점과 뉴욕 인근의 뱌룩시장에서 야경원으로 하루 12시간씩 일을 했다. 이때 벼룩시장의 일터까지 가는 메트로에서의 긴 시간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방법을 생각하다가 3인치 정시각형의 캔버스가 그의 주머니와 손바닥에 꼭 맞다는 것을 발견했다. 곧 그에게 메트로는 움직이는 스튜디오가 되었다.

이렇게 시작한 가로 세로 3인치(7cm)의 화폭에 그린 5만점의 작품들이 이제는 거대한 기념비적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뉴욕의 휘트니미술관에서 여러차례의 초대전뿐 아니라 LA 현대미술관(MoCA)에서는 강익중작품을 영구소장하기로 하고 전용 전시실을 마련했다. 두 미술관은 미국의 동과 서를 대표하는 미술관이다. 지난 봄에는 13년만에 서울에 귀향하면서 전시회를 가져 한국화단에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아직 젊은 나이에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강익중씨의 빠리 중국식당 순례를 동행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로부터 여러 관심사들에 대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의 후견인으로 알려진 백남준씨와는 뉴욕에서 불과 수차례 만났을 뿐이나 그가 언젠가 "My son"이라고 자신을 추켜세웠는데 앞뒤를 살펴보지 않은 성급한 사람들이 실제 부자지간인 듯이 생각해서 난감했었다고 말하며 웃는다. 그러나 백남준선생이 자신의 정신적인 스승인 것은 틀림없으며 가장 존경하는 분이라고 말한다.

젊은 나이지만 풍수에서 주역에 이르기까지 중국고전에 관심이 많아 '기(기)'의 체계로 세상을 보는 눈을 갖게 되었다고도 말한다.

강씨는 실제로 조선시대 화가 강희맹의 17대손이며 강세황의 8대손이다. 강씨는 이 할아버지들의 기가 자신의 몸에서 실현되고 있는 듯이 느낄 때가 있다.

그는 간혹 뉴욕에서 미국인 가정에 초대받았을 때 처음 보는 그집 애들의 이름을 알아 맞춰 사람들을 놀라게 한 적도 있다.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다보면 어느 순간 이름이 떠오른다는 것이다.

흔히 '관조의 미학'이라고 일컬어지는 그의 예술관도 이런 경험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강씨는 이를 더 설명하기 위해 미국생활의 경험 하나를 들었다.

13년간의 미국체류중 초기에는 새로운 상황이 주는 새로운 체험의 힘으로 작품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5년정도 지난 어느때부터 이 힘이 바닥나 작품을 계속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미국의 전설적인 야구왕 행크 아론이 60대의 노인의 모습으로 그가 즐겨 보는 TV에 등장했다.

"당신은 어떻게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길 수 있었는가"라는 앵커우먼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아론은 "나는 경기중에 나를 경기장이 아니라 관객석에 두어왔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강씨가 침체를 떨치고 작품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은 여기서 비롯됐다. 자신을 자신의 밖에서 바라볼 수 있는 힘, 일종의 유체이탈과 같은... 이때부터 자신뿐만 아니라 미국문화를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게 됐다. 미국의 거대한 힘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을 지켜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계기와 과정을 통해 주역과 같은 중국철학적 전망을 얻을 수 있게 됐으나 그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속에서의 작가의 역할이나 현대예술에 대해서도 박학한 지식과 확고한 주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현대예술을 설명하며 언젠가 샌프란시스코 인근을 여행하다 목격했던 풍차들을 예로 들었다.

날개 하나가 집채만했던 풍차들 수십개가 황야의 언덕위에 늘어서 있는 석양 무렵의 모습은 장관이었다. 이즈음의 설치예술 작품을 연상시키는 이 풍차들이 그러나 예술과 구별되는 것은 이 구조물들이 전력생산이라는 기능과 실용성에 그 존재의미가 바쳐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 실용성과 기능이 없는 채로 만들어진 풍차와 비교한다면 그 차이는 쉽게 드러난다. 그는 나아가서 이런 예도 들었다. 만약 외장과 부속품을 금으로 만든 컴퓨터라면...?

결국 강씨는 현대예술의 가장 강력한 특성은 기능이 없으면서 많은 물질이 소요되는 점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다소 어렵게 들리는 그의 현대예술관을 필자는 나름대로 해석해 보았다.

예술이란 현대인의 일상성과 고정관념을 깨뜨려 각성에 이르게 하는 그 무엇이 아닌가. 금으로 만든 컴퓨터라면 이런 기능을 충실히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5만점에 이르는 3인치 그림들이나 백남준의 비디오 예술도 그의 현대예술에 대한 정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게다가 3인치의 작은 그림들을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해 만들어지는 그의 작품은 상품을 무한정 대량생산하는 현대 문명의 특질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그 하나하나는 각기 다른 이야기를 포함, 그 문명속에서 살아가는 인간 개개인의 소중한 가치를 되새겨 보게 한다.

주어진 틀 안에 작은 이미지를 넣어 조각처럼 쌓아올린다는 점도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와 같다. 그리고 그 안에는 똑같이 자신들의 역사와 문화가 반영돼 있다. 수많은 화면에 갖가지 작은 장면이 망라되어 있다는 점에서 '비빔밥 예술'이라고도 불린다.

이외에 강익중씨와 사흘간 동행하며 그에게서 신변의 여러가지 에피소드들과 그의 세상관들도 엿들을 수 있었다.

지난봄의 서울전시회때에는 그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모교인 홍익대 미대 교수들이 전혀 참가하지 않아 동문들 사이에서 파문이 일었던 일, TV에 14차례나 불려다니며 일약 유명인사가 되면서 여대생들로부터 뉴욕의 집에까지 전화가 쇄도해 유명세를 치뤘다는 이야기, 최근 아이비 리그에 드는 뉴욕의 한 미술대학으로부터 교수직으로 초빙됐으나 고심끝에 거절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한국어의 외래어 표기법을 위한 한글 맞춤법 개정에 대한 그의 주장, 나아가 한국이 살 길은 디자인 개발이라며 언젠가 정부에 디자인부를 두어야 할 것이라는 주장등 이미 대가의 반열에 들어서고 있는 젊은 화가의 폭넓은 관심과 정신의 편린들을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떠오르는 태양이 갖기 마련인 함찬 기운이 감염되어오는 듯한 행복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강익중씨는 그의 말중에 아동어인 "딱, 딱"하는 부사를 사용하는 것이 놀라웠다. "내가 차이나타운에 딱, 도착해서 말예요. 그 식당에 딱, 들어갔더니 그여자가 나를 딱, 보고 있었는데요..."

해맑은 그의 얼굴뿐만아니라 그의 언어에도 어린이의 천진함이 스며 있었다. 80년대초의 대학시절 모습을 잘 기억하고 있는 필자에게는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듯했다. 그러나 그의 정신의 높이는 10년동안 변한 강산만큼이나 달라져 있었다.

(김제완·본지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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