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산책] 연개소문의 혁명과 대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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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산책] 연개소문의 혁명과 대학살
  • 이형모 발행인
  • 승인 2017.07.03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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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형모 발행인

기원 646년경에 고구려 서부(西部)의 살이 연태조가 죽자, 연개소문이 부친의 살이(薩伊) 직위를 이어받게 되었다.

 

연개소문의 부친 직위 승계

연개소문은 평소 격렬하게 당을 침공하기를 주장해 왔으므로, 영류왕과 대신, 호족들은 모두 연개소문을 평화를 파괴할 인물이라고 위험시하여 그가 부친의 직위를 이어받는 것을 반대했다. 연개소문의 정치생명을 끊어버리려는 것이었다.

소년 시절에 타향과 타국에서 두 번이나 종노릇하던 경력이 있는 연개소문은 습직(襲職)을 견제 당하자, 곧 자신을 굽히고 4부(四部) 살이와 기타 호족들의 집을 찾아다니면서 말했다.

“연개소문이 불초한데도 여러 대인들께서는 저에게 큰 죄를 가하지 않으시고 겨우 습직의 권리만을 박탈하시니, 이것만으로도 여러 대인들의 은혜가 한없이 큽니다. 오늘부터 저 연개소문도 힘써 회개하여 여러 대인들의 교훈을 좇겠사오니, 바라옵건대 대인들께서는 불초 연개소문이 부친의 직을 이어받게 하였다가 만약 잘못하는 일이 있거든 그때 가서 소인의 이어받은 직위를 다시 거두어 가십시오.”

여러 대인들은 그의 말을 듣고 불쌍하게 여겨서 서부 누살의 직위를 이어받도록 허락하면서, 연개소문을  평양에서 북방으로 쫓아내어 북부여에서 장성 쌓는 일을 감독하도록 했다.

당 태종의 간첩사건

당 태종이 고구려의 내정을 탐지하려고 자주 밀사를 보냈는데, 당나라 첩자는 매번 고구려의 나졸에게 발각되므로, 남해 바다에 있는 삼불제 국왕에게 뇌물을 바치고 고구려의 군사 수, 군대 배치, 군사용 지리 및 기타 내정을 탐정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고구려의 우호국인 ‘삼불제’국의 사자가 고구려를 방문해서 여러 가지를 정탐한 후 귀국한다고 하고는, 당으로 직행하다가 바다에서 고구려 해라장(해상 경비대장)에게 붙잡혔다. 해라장은 강개한 무사이자 연개소문을 천신같이 숭배하는 자였기 때문에 늘 조정이 연개소문의 주장을 채용하여 당나라를 치지 않는 것을 분개하던 차에, 다음 내용의 편지를 써서 첩자에게 주어 당으로 보냈다.

“해동의 삼불제국의 사자 얼굴에 글을 새겨 내 아들 이세민에게 말을 전하노니, 금년에 만약 와서 조공을 바치지 않으면, 내년에는 꼭 죄를 묻기 위한 군사를 일으킬 것이다. 고구려 태대대로 연개소문의 졸병 모”

당 태종이 이 사실의 진위 여부를 알려 달라는 밀서를 가진 당나라 사자를 고구려 영류왕에게 보내왔다.

연개소문을 처단하라 - 영류왕

영류왕이 이 일을 듣고 왕실 경호병을 보내어 해라장을 잡아 옥에 집어넣고 심문했다. 사실을 확인한 영류왕이 크게 놀라 서부 살이 연개소문 한 사람만 제외하고 각 부의 살이와 대대로, 울절 등 각 대관들을 그날 밤에 비밀히 소집하여 말했다.

“해라장이 당나라 황제에게 추잡스런 욕을 한 것은 오히려 작은 일이다. 연개소문이 늘 당을 치자는 주장으로써 군사들을 선동하여 조정에 반대하도록 하고 있으니, 그의 직위를 박탈하고 사형에 처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이전 같으면 한 번 명령을 내리고 졸병 하나를 보내어 연개소문을 체포할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연개소문이 서부살이(西部薩伊)가 되어 큰 병력을 장악하고 있으므로 그의 체포도 어렵게 됐다.

이제 연개소문이 새로 장성 쌓는 역사를 감독할 임무를 띠고 출발할 날이 멀지 않으므로, 머지않아 그가 왕에게 숙배의 인사를 올리기 위해 궁중에 들어올 것이니, 그때 그의 반역죄를 선포하고 왕의 명령으로 잡는다면 일개 장사의 힘으로도 넉넉히 연개소문을 묶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여, 각 대관들이 어전에서 물러나와 비밀히 그날 오기만을 기다렸다.

연개소문의 선제공격 - 혁명

그 어전회의 비밀이 어디로부터 새 나갔는지 연개소문이 이를 알았다. 연개소문은 ‘먼저 손을 쓰는 자가 상대를 제압한다’는 계책을 써서, “북방으로 출발하기 전 모일에 평양성 남쪽에서 열병식을 거행하고자 하니 대왕과 각 대신들이 친림하심을 바랍니다.”고 왕에게 보고하고 각 부에 통고했다.

초청받은 대신들은 참석하지 않으면 연개소문이 의심을 품게 되니 갈 수 밖에 없다고 하여 참석을 결정했다. “오직 대왕만은 존엄을 지키어 왕국 경위병을 데리고 왕궁에 계시면, 왕의 위엄에 눌리어 감히 어쩔 수 없을 것이다.”고 의논했다.

그날 모든 대관들은 질서도 정연하게 연개소문의 열병식장으로 갔다. 경쾌한 군악 소리에 인도되어 군막 안으로 들어가 술을 두어 차례 마셨을 때, 연개소문이 갑자기 “반역의 무리를 잡아라” 하고 외치자 사방에서 대령하고 있던 장사들이 번개같이 달려들어 칼, 도끼, 몽둥이로 일제히 치고 때렸다.

대관들도 거의 모두 백전의 무사들이었지만, 겹겹이 포위된 중에 병력의 수가 너무 차이가 커서 벗어날 수 없었다. 순식간에 대신‧호족 등 수백 명이 한꺼번에 육장이 되었고, 열병식장은 선혈로 물들었다.

연개소문은 즉시 휘하 장사들을 거느리고 대왕의 긴급명령이 있다고 칭하고 성문을 지나 궁문으로 들어갔다. 막아서는 왕궁 수비병을 칼로 치고 궁중으로 돌입하여 영류왕을 찔러 넘어뜨리고 다시 그 시신을 칼로 쳐서 두 토막 내어 수채 구멍에 던지니, 대왕의 호위병들은 모두 연개소문의 늠름한 위풍과 신속한 행동에 놀라서 하나도 저항하는 자가 없었다. 20년 전 수나라 장수 래호아의 수십만 군사를 일격에 섬멸하여 지략과 용맹을 날리던 영류왕은 의외로 무참하게 연개소문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무소불위의 권력자 연개소문

연개소문은 영류왕의 조카 보장을 맞아들여 대왕을 삼고, 연개소문 자신은 ‘신크말치’라 칭하여 대권을 장악했다. 보장왕은 비록 이름은 왕이라 하였으나 아무런 실권이 없었고, 연개소문이 실로 실권을 가진 대왕이었다.

연개소문이 정권 최고위직 ‘크말치’ 위에 「신」 자를 더하여 ‘신크말치’라 칭하고, 정권과 병권을 총람하였다. ‘살이’의 세습을 폐지하고 연개소문이 자신과 친한 자로 임명하였으며, 4부 살이의 평의제를 없애고, 관리의 임면과 승진, 국탕(나라 곳간)의 출납, 선전‧강화 등 국가대사를 모두 신크말치의 전단으로 하였으며, 왕은 단지 공문서에 국새만 찍을 뿐이었다.

연개소문은 고구려 9백 년간의 장상과 대신들뿐만 아니라 그 어느 제왕도 가져보지 못한 절대 권력을 가진 한 사람이 된 것이다. ‘영명한 신크말치’ 연개소문의 통치로 고구려는 막강한 나라가 되었으나, 하루아침에 학살당한 수백 명의 대신 호족들의 죽음은 ‘벌족 공치’의 나라 고구려의 국력 손실이기도 했다. 연개소문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괜찮았으나, 그의 사후에는 국가통치세력의 인재 공백이 회복할 수 없는 뼈아픈 현실로 나타났다.

*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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