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태극권협회장 한국인 김진권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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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태극권협회장 한국인 김진권 총재
  • 박정연 재외기자
  • 승인 2017.01.04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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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화교 아닌 한국인이 캄보디아 태극권 협회장 맡아 벌써 20년째

인도차이나반도 생명의 젖줄, 메콩강이 유유히 흐르는 수도 프놈펜의 새벽은 언제나 활기로 넘쳐난다. 동이 트기도 전부터 주변 공원과 공터는 늘 운동하러 나온 사람들로 북적인다. 캄보디아 스포츠의 ‘메카’로 불리는 프놈펜 올림픽 스타디움도 예외는 아니다.

정유년(丁酉年) 새해 꼭두새벽부터 찾아간 그 곳은 운동선수들보다 더 일찍 일어난 사람들의 열기로 언제나처럼 가득했다. 눈이 파란 외국인들도 여럿 눈에 띈다. 경쾌한 음악 리듬에 맞춰 열심히 에어로빅을 하는 사람들과 힘찬 구령소리에 맞춰 체조를 따라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선 삶에 대한 진한 애정마저 느껴진다.

잠시 고개를 돌려, 햐얀 단체복을 입은 채 열심히 기체조로 보이는 운동하는 한 중년여성의 등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태극권’이란 붉은 색 한자 글자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태극권은 익히 알려진 것처럼 중국 정통무예인 우슈중 하나다. 무술의 개념을 넘어서 병을 낫게 하고 건강을 유지하는데 큰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전 세계적으로 보급된 무술이다. 유연하고 완만한 동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기(氣)를 단전에 모아 온몸에 원활하게 유통시켜 오장육부를 강화하는 것이 특징으로, 수련 과정 중에서 스스로 치유하는 능력이 자연스럽게 생겨나게 된다고 한다. 기체조와도 비슷해 일명 '건강 체조'라고도 불린다.

그런데, 이날 이른 새벽부터 태극권을 수련하는 100여명 남녀 중 유독 낯익은 사람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오늘 만나기로 약속한 김진권 총재였다. 평소 개인친분 덕에 자주 봐온 그이지만, 이날 이런 특별한 장소에서 만나니 더더욱 반갑다. 그는 현재 캄보디아 태극권협회를 이끌고 있는 유일한 한국인이기도 하다. 태극권이 중국 전통 무술인 만큼 지도자는 대부분 중국본토나 화교출신이란 점을 감안하면, 그는 매우 특별한 이력의 인물임에 틀림이 없다.

▲ 20년째 캄보디아 태극권협회를 이끌어온 한국인 김진권 총재(사진 박정연 재외기자)

내전이후 정착하기까지 힘들었던 그의 삶

금년 나이 63세인 김 총재는 40대 초반인 지난 1997년 캄보디아에 들어왔다. 지금부터 정확히 20년 전 일이다. 현재 캄보디아 태극권협회 총재직을 맡고 있으며, 그가 가르친 제자 수만 캄보디아 전역에 수만 명에 이른다.

김 총재는 캄보디아 진출 초창기의 삶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들어온 지 몇 달이 채 되지 않아 내전이 일어났다. 내가 가르친 제자들 중에는 훈센총리와 라이벌 관계에 있던 왕당파소속 군인들과 정부 관료들도 여럿 있었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내전 중에 목숨을 잃은 제자들도 아마 여럿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전이 종식된 후에도 캄보디아를 떠날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태극권을 어떻게든 이 땅에 뿌리내리겠다는 생각뿐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교민사회는 불과 수십 명도 되지 않았다. 서로를 의지하며 정보도 주고받으며 사이좋게 지냈지만, 힘들기는 다들 마찬가지였다. 내전이 끝난 지 3년 후 아내가 들어왔다. 마음속으로 의지할 수 있는 큰 힘이 되어 주었다.”

김 총재는 그런 아내에 대해 지금까지도 늘 고마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시간을 다시 거슬러, 김 총재가 태극권을 처음 접한 것은 중고등학교 시절이다. 이북출신 부모를 따라 인천에서 성장하면서 운동이 좋아 태권도와 복싱을 배우기 시작했다. 마침 김 총재의 가족이 정착한 인천은 당시 중국화교들이 많이 살던 도시였고, 우연찮은 기회에 중국 태극권까지 배우게 됐다.

태극권의 매력에 흠뻑 빠져든 김 총재는 이후 자신의 인생을 오직 이 무술에 걸기로 했다. 군복무를 마친 뒤 태극권 수련도장을 차렸다. 사업에도 수완이 좋았던 김 총재는 전국에 도장을 다섯 개나 세웠다. 배고프고 힘든 시절, 그저 운동이 좋아 시작한 일이 그의 천직이 된 셈이다. 나이 40대에 어느 정도 성공의 발판이 마련되자, 뜬금없이 욕심이 하나 덜컥 생겨났다. 태극권을 다른 나라에도 보급, 전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90년대 초 그는 무작정 베트남으로 떠났다. 하지만, 베트남은 화교들이 오래전부터 태극권을 위한 터전을 닦아놓은 상태였다. 덕분에 비교적 단시일 내에 나름대로 자리를 잡을 수가 있었고 협회도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었지만, 자신이 가진 사업가로서의 마인드가 동남아에도 먹힌다는 사실에 자신감으로 충만한 시기였던지라 그 정도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김 총재는 내친 김에 이웃나라인 캄보디아에도 진출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막상 와보니 상상했던 이상으로 모든 게 열악했다. 긴 내전을 끝내고 이제 막 시작하는 나라였기에 더더욱 그랬다. 한국전쟁 이후 우리가 살던 모습이 그대로 오버랩 됐다. 하지만, 힘이 들면 들수록 자신의 남은 삶을 바칠 땅은 한국도 베트남도 아닌, 캄보디아라는 생각이 더 강렬하게 들었다. 잘되던 국내 체육관 사업도 일부 정리하고, 베트남에서 벌인 사업도 포기한 채 캄보디아로 날아왔다.

▲ 김진권 총재는 캄보디아에서 가장 힘든 시절 아내가 가장 큰 힘이 되어주었다고 말했다.

무작정 도전한 캄보디아 정착기

하지만, 막상 와서 살다보니 실제 현실은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힘들었다. 항상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야만 했을 정도로 모든 게 열악했다. 당시 이 나라 사람들은 당장 끼니를 걱정해야 할 만큼 지지리도 가난했다. 믿었던 현지인들에게 속기도 참 많이 속았다. 몸이 지치니 마음도 지치고 어느새 캄보디아에 온 게 후회가 됐다. 너무 무모한 도전이 아니었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무술을 오래 연마한 무도인다운 끈기와 인내로 무작정 버티기에 나섰다. 날씨도 무덥고, 음식도 맞지 않았지만, 현지음식도 가리지 않고 체력을 위해 꾹 참고 먹었다.

그런데 정착한 지 채 몇 달도 되지 않아 큰 사건이 발생했다. 또 다시 내전이 일어난 것이다. 훈센총리와 왕당파간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었다. 시내 한복판에 탱크가 들어오고 여기저기서 전투가 벌어졌다. 매일 밤 총소리가 들리고, 군인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모습도 직접 목격했다. 여러모로 힘든 시기였다.

하지만, 다행히도 걱정했던 것보다 내전이 일찍 끝났다. 총소리가 멈추고 평화의 시대가 또 다시 찾아왔다. 마음의 안도는 되었지만, 그렇다고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길바닥은 여전히 거지떼들로 들끓었고, 오후 6시만 넘으면 전기가 끊기고, 도시 한복판이 온통 암흑으로 바뀌는 건 여전히 마찬가지였다. 지금처럼 한가롭게 노천카페에서 저녁식사를 즐기는 여유는 당시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불과 20년 전의 일이다.

힘들 때마다 캄보디아를 떠날까하는 생각도 순간 들었다. 하지만, 기왕 마음먹은 거 한번 해봐야 하지 않겠나 하는 오기가 발동했다. 마음을 가다듬고, 내전에서 살아 돌아온 군인출신 제자들을 끌어 모아 다시 태극권을 가르치고 중국 화교들을 불러 모아 무료로 태극권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중국인도 아닌 외국인이 태극권을 가르친다는 소문은 프놈펜 화교사회에 금새 퍼져 나갔다. 매일 새벽 프놈펜 왕궁앞 주변은 태극권을 배우려 모인 화교들도 가득차기 시작했다. 그 사이 협회도 새로 발족했다. 그렇게 시작된 태극권 보급이 벌써 올해로 20년째가 됐다. 어느새 회원 수만 전국에 수만 명을 헤아릴 정도다. 그야말로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이윽고 김 총재에 대한 소문이 외국까지 알려졌다. 중국 국영방송 CCTV를 비롯해 대만, 홍콩 등 유명방송매체들이 앞다퉈 그를 취재해갔다. 유명세를 타 캄보디아 현지방송국에도 자주 출연했다. 매일 아침 방영된 그의 태극권 체조 프로그램은 온 국민들이 따라할 만큼 캄보디아 국민 체조가 됐다. 당시 아침시간대 최고시청률을 기록했다. 이 방송사가 다른 기업에 인수되기 전까지 무려 4년간 하루도 거루지 않고 방영됐다. 그 덕분에 김 총재는 한국교민사회보다 현지사회에서 더 잘 알려진 인물이다. 적어도 중국화교들 중에는 그를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다. 캄보디아 현지에서는 그를 ‘마스터 킴(Mater Kim)’이라고 부른다. 그가 직접 가르친 캄보디아 선수들은 지난해 중국 광동성에서 열린 세계대회에서 단체종목 3위에 개인종목 금메달 10개 이상을 따는 등 큰 개가를 이루기도 했다. 청소년체육부 헹 추온 나론 장관은 김 총재와 입상선수들을 곧바로 공관으로 초청해 국위를 선양을 해준 점에 대해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배타적인 화교사회에서 지도자로 인정받은 유일한 한국인

사실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중국인 화교들은 중국인 특유의 근면함과 성실함 덕분에 사업적으로 성공을 거둔 경우가 많다. 대신 이들은 중국인의 피가 흐리지 않으면, 친구나 사업파트너로 인정하지 않는 매우 배타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런 관점에서만 본다면, 한국인에게 자국의 무술을 배운다는 사실이 중국화교들 입장에선 무척이나 자존심 상하는 일일 수도 있다.

김 총재 역시 정착 초창기부터 그런 점을 전혀 모르거나 이해 못하는 바도 아니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힘들지만, 이들의 신뢰를 쌓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중국어도 열심히 배웠고 이들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어느 순간부터 그들도 닫혔던 마음의 문을 서서히 열기 시작했다. 김 총재로부터 태극권을 배우고, 꾸준한 수련을 통해 제자가 된 중국화교들은 이후 거꾸로 김 총재에게 많은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

김 총재 역시 바로 그 점에 대해서만큼은 자부심이 커보였다.

“중국화교가 아닌 사람을 자신들의 커뮤니티 구성원으로 인정하는 건 아마 캄보디아에선 오직 나뿐일 겁니다.”

옆자리에 함께 있는 김 총재의 부인도 웃으며 함께 말을 거든다.

“화교출신 제자들이 어려울 때 쌀도 보내주고 이것저것 어려울 때마다 매번 말없이 도와줘서 지금까지 이 나라에서 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부인 역시 남편을 내조하며 언어도 잘 통하지 않은 이 나라에 살면서 그간 겪었을 고생이 미뤄 짐작이 간다.

김 총재 부부는 “40대 젊은 때 왔는데 벌써 60대가 되었다”며 함께 웃는다.

힘든 시절을 겪으며 캄보디아에서 중고등학교와 대학까지 무사히 마친 두 장성한 아들이 김총재에게는 가장 큰 자랑거리이자 그동안 살아온 인생에 대한 보상이자 댓가라고 생각한다.

“살 집도 장만해줬고, 제 몫을 하며 살만큼 자식들도 잘 커주었다. 이제는 아들 장가보낼 일만 남았다”며 또다시 웃는다.

올해 20년이 된 캄보디아에서의 삶, “이제 은퇴를 고려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100여명에 이르는 수련생들을 대상으로 한 시간 넘게 태극권 지도를 마친 김 총재의 얼굴은 땀방울조차 흐르지 않고, 오히려 이른 아침 햇살에 더욱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이 60대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피부도 깨끗하고 활력도 넘쳤다. 평생 자기관리를 철저히 해온 김 총재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 총재는 “태극권은 다른 사람과 공격을 위한 그런 무술이 아니다. 건강을 위해서라면 반드시 추천하고 싶다. 특히 50대부터는 무조건 운동을 해야 한다. 태극권은 무리한 체력운동으로 기를 소모시키지 않고 오장육부를 튼튼하게 해주기에 나이와 상관없이 더없이 좋은 운동“ 라며 인터뷰를 마치는 순간까지 태극권에 대한 애정 어린 홍보와 예찬론을 빼놓지 않았다.

“캄보디아에 뿌리를 내린 지 올해로 벌써 20년이 되었다는 점에서 나한테는 매우 뜻깊은 한해가 될 것 같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불모의 땅에 태극권을 알리고, 한국인으로서, 이만큼 일군 사실만으로도 솔직히 보람되고 기쁘다. 그동안 길러낸 이 나라 제자들이 여러 국제대회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고, 협회 조직도 탄탄해졌다. 내가 없더라도 캄보디아에 태극권을 보급 발전시키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다. 이제는 캄보디아에서의 삶도 차츰 정리할 시기가 다가오는 것 같고, 서서히 은퇴도 고민할 때가 된 것 같다”

어쩌면 다소 쓸쓸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대목이었건만, 김 총재는 특유의 넉살좋은 환한 웃음으로 잘 넘기며 이날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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