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의 아이들 2막 - 26. 트로피와 트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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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의 아이들 2막 - 26. 트로피와 트럭
  • 김태진 전 맨해튼한국학교장
  • 승인 2016.06.09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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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태진 전 맨해튼한국학교장

“Once, there was a little boy. His father was a shepherd. One day…”

중1 때, 영어 교과서에 나온 이솝의 우화 ‘양치기 소년’의 첫 문구다. 내가 이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당시 영어 선생님께서 암기하고 구연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중1 때 처음 배우는 영어에 대한 낯설음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보다 재미있고 실용적으로 접하도록 하기 위한 선생님의 교육적 배려였던 것 같다. 

지금도 이 문구를 되뇔 때, 그 때의 감정과 억양이 그대로 재연되는 걸 보면 그 선생님은 언어 교육에 대한 소신과 일가견이 있었던 분이었음을 느낀다. 언어에 정의적인 요소가 녹아들어갈 때 진정한 점유가 된다는 연구들을 상기해 보면 말이다. 어쨌든 문법과 독해 위주의, 오로지 높은 점수를 얻기 위한 노동 같은 영어 공부의 기억 속에서 영어를 배우는 것에 대한 감성적 추억을 남겨준 유일한 기억이다.

한글학교 학생들도 어렸을 때부터 동화를 많이 암기한다. 바로 동화 구연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교사들은 여름방학 때는 가을학기에 있을 구연대회에 적합한 동화를 고르기 위해 고심한다. 내용도 재미있고 학생들 눈높이에 맞는 동화를 골라야 아이들이 외우는 데 힘들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 교육적인 교훈도 있어야 하니 적합한 동화를 고르는 일이 쉽지는 않다. 

동화가 정해지면 학생들의 한국어 수준에 맞추어 각색을 하고 학기 첫 주부터 암기하도록 숙제를 내 준다. 동화를 7~8부분으로 나누어 조금씩 미리미리 외우도록 하지 않으면 동화 한 편을 다 외우는 것이 쉽지 않다. 그것도 처음 한두 번은 잘 외워 오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양이 누적되니 중간에 포기하는 학생이 많이 나온다. 

나는 동화대회를 학생 지도에 전략적으로 이용하여 한국어 공부를 싫어하거나 성적이 좀 떨어지거나 혹은 소극적인 학생을 집중 공략하여 완주시키는 데 전력을 다했다. 이 때의 필수 조력자는 학부모다. 학부모가 도와주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외우기 힘들어 하는 학생을 가정과 학교에서 양면 협동 작전으로 어르고 달래며 ‘우리 아이 동화대회 출전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일단 한 편을 다 외우고 그곳에 감정과 표현력을 더하여 친구들 앞에서 발표를 하고 나면 그 변화는 상당하다. 자신감과 성취감 고취는 물론 한국어 실력이 일취월장하고 무엇보다 한국어에 대한 감정적 애착이 생기면서 한국어를 더욱 열심히 배우고 사용하는 계기가 된다. 학교에서는 동화 한 편을 다 외운 것은 상을 줄 만하기에 본상 외에 노력상도 마련하여 참가자 모두에게 트로피를 준다. 

유치반 학생들도 짧은 동화를 잘 선택하여 일찍이 무대에 서는 경험을 한다. 혼자 무대에 서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인 만큼 발표하다 울어버리는 아이 등 유치반 아이들과 얽힌 일화가 많다. 그 중 영수 이야기는 또 하나의 재미있는 동화이자 교사에게 주는 메시지 또한 담고 있다.

4살짜리 영수의 동화 구연 프로젝트는 아버지가 맡았다. 아빠가 들려주는 ‘사자와 생쥐’를 처음에는 재미있게 듣고 곧잘 따라 외우다가 금방 싫증을 내고 장난감이나 비디오테이프를 찾기 일쑤였다고 한다. 아빠가 동화를 들려주려고 하면 영수는 금방 알아차리고 도망가서 숨고, 다른 놀이를 하자며 조르기도 하여 포기하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고 한다. 그러다 생각난 것 하나,

“영수야, 동화대회에 나가면 ‘트로피’를 준대. 그러니까 아빠랑 같이 외워보자.”

그 말을 듣자 영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기대에 찬 표정을 지으며,

“트럭? 동화대회에 나가면 정말 트럭 줘요?”

아이가 아버지의 ‘트로피’ 발음을 ‘트럭’으로 잘못 알아들은 것이다. 아버지는 순간 기지를 발휘하여,

“응, 트럭 준대, 영수 트럭 받고 싶어?”

이후로 이 ‘트럭’은 영수가 동화를 끝까지 듣고, 한 줄 한 줄 외우게 하는 동기가 되었고 예전보다 빠른 속도로 동화를 외울 수 있게 하였다. 그렇게 해서 영수는 동화 외우는 것을 포기할 뻔한 위기(?)를 넘기고 ‘사자와 생쥐’를 모두 외웠다. 

드디어 동화대회 날, 영수는 트럭을 향한 일념으로 무사히 발표를 마치고 반짝이는 트로피를 손에 쥐었다. 더불어 꿈에 그리던 ‘트럭’도 받았다. 그리고 한국에 계신 할아버지, 할머니께 전화를 걸어 자랑스럽게 말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저 트로피랑 트럭 받았어요!~~~”

우리 아이들이 한국어를 발표하고 활용할 수 있는 장이 많이 마련되었으면 한다. 현지어보다 한국어를 사용할 시간과 기회가 턱없이 부족한 환경에서 한글학교뿐만 아니라 한인 공동체에서도 관심을 갖고 그들이 배운 한국어를 활용하는 여러 방안들을 모색해 보면 좋겠다. 그러할 때 보다 높은 자긍심과 성취감을 가지고 한국어를 신나게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트로피’보다 ‘트럭’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우리들의 교육적 마인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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