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한 시위, 한국과 일본의 양심세력이 협력해서 치유해야
상태바
혐한 시위, 한국과 일본의 양심세력이 협력해서 치유해야
  • 김지태 기자
  • 승인 2016.03.28 11: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국민대 일본학연구소 전임연구원 장박진 교수
국민대 일본학연구소 전임연구원 장박진 교수는 재일교포 3세다. 2002년 한국에 온 후 줄곧 국내거소증으로 재외국민임을 증명해 왔는데 최근 재외국민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았다. 재외국민이라는 표식이 붙어있긴 하지만 이제야 정식으로 한국 국민 취급을 받게 된 느낌이라고 그는 말한다. 재일교포들에게 한국의 주민등록과 영주권은 어떤 의미일까? 장 교수로부터 들어보기로 한다. 
 
 
장박진 교수의 아버지는 제주도 출신이다. 태평양전쟁 시기였던 1940년대 초 그의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갔다. 장 교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처럼 일제시대에 일본으로 간 사람들을 ‘올드커머’라고 한다. 특별영주권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1945년 8월 일본은 전쟁에서 패하고 연합군에게 점령됐다. 1947년 5월 연합국 점령 치하에서 일본은 ‘외국인등록법’을 시행했다. 이때부터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은 일본 국적을 가진 외국인으로 분류됐다. 1948년 한반도에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건국된 후 일본거주 한국인들은 국적을 상실하고 ‘조선적’이 됐다. 
 
대한민국에서는 1949년 1월 연합군 점령 치하의 일본에 주일대표부를 설립하고 외교활동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재일동포들의 재외국민등록이 시작했다. 한반도에 두 개의 적대적인 정부가 들어선 상황에서 동포들은 이념 갈등을 빚는 등 혼선을 겪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재외국민등록을 했다.  
 
“당시 재일교포 대부분은 남쪽 출신들이었어요. 어떻게든 남쪽 고향과 교류를 해야 하는데 조선적 상태로 있으면 불가능했죠. 그래서 재외국민등록을 하게 된 것입니다. 대한민국를 왕래하거나 전화 등을 하려면 한국 국적이 있어야 하니까요.”
 
1952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이후 일본이 주권을 회복하면서 재일동포들의 법적 지위에 대한 문제가 다시 불거졌다. 
 
“연합군 통치가 끝나고 일본이 주권을 회복했을 때 한반도는 전쟁 중이었습니다. 교포들 대부분 일본에 거주하고 싶어 했지만 외국인이다 보니 거주권이 없었어요. 그 대안으로 나온 것이 영주권입니다. 재일동포 60여만 명이 전쟁 중인 한반도로 갈 수 없었지요. 그래서 대한민국 정부에서 국적은 대한민국으로 하되 일단 일본에 남겨놓자, 하는 정책이 영주권 개념이에요. 즉, 대한민국 국적을 택해 재외국민등록을 하면 영주권을 줬던 것입니다. 당시 북한을 지지하는 동포들은 재외국민등록을 거부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재일동포의 재외국민등록은 주민등록 없이 거소권 형식으로 반세기 이상을 이어오다가 지난해부터 비로소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재외국민이란 기본적으로 한국 국적이죠. 외국 국적의 재외동포와 다릅니다. 식민지 시대에 일본으로 건너간 한국인들은 거의 대부분 재외국민, 즉 한국 국적이었어요. 일본으로 귀화를 하지 않는 한 법적으로 한국 국민입니다.”
 
재일교포 3세인 장박진 교수도 당연히 한국 국적의 재외국민이다. 일제시대에 건너간 할아버지와 아버지 세대는 한국에서 태어나거나 자랐기 때문에 한국으로의 귀속의식이 강했다. 그러나 그 이후 일본에서 태어난 3세들은 상대적으로 귀속의식이 약하고 일본에 쉽게 동화된 편이다. 일본인과 결혼하고 귀화하는 케이스도 많다. 그러면 일본에 거주하는 재외국민이 줄어들고 있는 것인가? 장 교수는 그렇지는 않다고 한다. 
 
“전후 특히 70~80년대 이후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많이 건너오고 있어요. ‘올드커머’과 구별해 ‘뉴커머’라고 하는 이주자들입니다. 이들은 일반영주권자들로 분류됩니다. 일본 이름도 없고 한국 이름을 쓰며 완벽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말 그대로 한국 국적의 ‘당연한’ 한국인들이에요. 그 후손들도 비록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당연히 한국 국적이지요. 이들 뉴커머들이 지속적으로 일본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재일교포 중 재외국민은 60여만 명 선을 꾸준히 유지한다고 봅니다.”
 
장 교수는 와세다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오사카시립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강사 생활을 했다. 전형적인 일본 교육을 받은 장 교수는 아버지나 할아버지처럼 귀속의속은 강하지 않았지만 ‘뿌리’에 대한 생각을 밀어낼 수가 없었다. 일본으로 귀화할 생각도 없었던 그는 한일월드컵이 열리던 2002년 한국행을 결심했다. 
 
“한국 사람으로서 한국에 대해 더 알고 싶었습니다. 특히 한국과 일본의 역사적 관계에 관심이 많았는데 자연스럽게 한일정상회담으로 전공분야가 정해졌어요.”
 
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대학원에서 한일관계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장 교수는 한일정상회담과 전후처리문제에 관한 전문가로 손꼽힌다. 그는 그간의 연구결과를 2014년 말 <미완의 청산 - 한일회담 청구권 교섭의 세부과정>이라는 저서를 통해 세상에 알렸다. 
 
해방후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서 청산하려고 한 청구권 문제의 전모를 밝히는 책으로, 한국이 일본과의 과거처리와 관련해 구상한 각각의 항목을 구체적으로 짚어내고 있다. 이 지면에서 저서의 전체를 소개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장 박사가 생각하는 한일정상회담의 핵심적 문제점만 살짝 들어보기로 한다. 
 
“식민지시대 청구권을 다룬 한일협정은 1951년부터 시작됐습니다. 박정희 정부에서 급속도로 추진되어 1965년에 타결됐는데 이 협정에서 많은 문제점과 한계가 있는 게 사실이에요. 특히 위안부 등 피해 당사자인 개인의 청구권 문제 해결에 있어서 한국 정부의 노력이 부족했다는 점입니다.”
 
즉, 당시 한국 정부가 자국민의 피해 구제를 요구할 수 있는 외교보호권을 적절히 행사하지 못한 채  ‘양국과 그 국민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라는 조항을 남겼고, 결과적으로 일본이 문제를 회피할 수 있는 여지를 줬다는 것이다. 이런 점을 지적하면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거나 ‘친일적’이라고까지 보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의 잘못한 점과 한계점들을 우리 스스로 조금씩 인식을 바꿔가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게 정 교수의 입장이다. 
 
“우리의 잘못을 인정한다고 일본측 주장을 두둔하는 게 아닙니다. 일본이 과거에 저지른 잘못은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데 분명한 것은 일본 내에서도 자기들이 과거에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세력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과 함께 문제를 해결해 나가고 아픔을 치유해 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일방적으로 일본만을 자극하고 때리는 메시지로는 문제 해결이 어려워지고 극우세력들만 더 자극할 뿐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장 교수는 최근 심각해 진 일본 내의 혐한시위를 매우 우려섞인 시각으로 본다. 
“혐한시위는 점점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한국사람들을 얕잡아 보거나 차별하는 건 있어도 이렇게 대로에서 ‘한국인들 죽어라’고 외친 적은 한번도 없었어요. 이런 극한 상황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은 한국과 일본의 공동 노력입니다. 더 이상 서로를 자극하지 말고 우리도 일본의 양심세력과 협력하여 문제를 해결해 나가려는 지혜와 의지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