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동포 위한 양로원 설립 10주년 기념 내한 오기문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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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동포 위한 양로원 설립 10주년 기념 내한 오기문할머니
  • 조선일보
  • 승인 2004.05.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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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레이스키 들에게 다시 관심을"

[조선일보 2004-05-26 18:12]


"고국땅 밟고픈 수많은 동포 아직도 사할린서 학수고대"
[조선일보 신지은 기자] 지난 25일 낮 경북 고령군 매촌리의 ‘대창양로원’ 1층 식당. 머리가 허연 노인 60여명이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다. 노인들은 모두 2차 세계대전 당시 일제에 강제 징용돼 사할린으로 끌려갔다가 ‘고향 땅에서 눈을 감고 싶어’ 영주 귀국한 동포들이다. 이 식당 안으로 작은 몸집의 한 할머니가 지팡이를 짚고 걸어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그 동안 모두 건강하셨죠?”

작지만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양로원의 적막을 깬다. 노인들은 식사를 멈추고 하나 둘씩 일어서 그녀의 손을 움켜잡았다. 재일동포 오기문(吳基文·94) 할머니. 지난 93년 사할린 동포를 위해 사재를 털어 자신의 고향인 고령에 이 양로원을 설립한 인물이다. 할머니가 “내가 매일 여러분들 건강하길 기도 드리고 있어요. 아프지 마세요”라고 말했다. 어떤 노인들은 그렁그렁해진 눈가를 손등으로 닦아냈다.

현재 아들·딸과 함께 도쿄 인근에서 살고 있는 오 할머니는 이 양로원이 사할린 동포들을 받기 시작한 지 10년이 된 것을 기리기 위해 30일 여는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24일 한국에 왔다.

광복 이후 ‘재일대한부인회’를 설립해 20년 동안 회장직을 맡기도 했던 할머니는 이렇게 회상했다.

“일본에서 해방을 맞았지. 일본 패망 이후 사할린에 갔던 일본인들은 속속 들어오는데, 같은 땅에 강제 징용돼 갔던 한국 사람들은 깜깜 무소식이더라고. 야, 그 추운 땅에서 얼마나 외롭겠어. 그 길로 내가 일본 총리공관에 자전거를 타고 수십 번 쳐들어가 ‘조선 사람들 돌려달라’고 시위도 하고, 재일대한부인회 회장 자격으로 일본 참의원들을 만나 설득도 했지.”

그 이후 각계의 노력 끝에 한·일 간 쟁점이었던 ‘사할린 동포’ 문제가 극적으로 타결돼 지난 92년부터 사할린 동포들이 모국에 돌아오게 됐을 때 오 할머니는 “결국은 러시아 카레이스키들이 돌아올 줄 알았다”며 ‘동포들이 외롭지 않게 여생을 보낼’ 보금자리 마련에 나섰다. 87년 할머니는 일본에서 자신이 살던 집만 남겨 둔 채 일본에서 포목상 등을 해가며 모은 10여억원의 재산을 정리하고 일본 경제단체의 지원을 받아냈다. 80을 넘긴 할머니가 현해탄을 수십 차례 오가며 건물 신축에서부터 복지법인·허가에 이르는 복잡한 절차를 마친 끝에 94년 대창양로원은 사할린 동포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오 할머니가 동포들을 위한 일에 이토록 앞장서는 것은 그녀 자신의 인생 역정과 무관하지 않다.

“나는 18살 때 남편 따라 일본에 간 뒤 25살에 남편을 여의고 70여년을 타국에 살면서 갖은 고생 다 해봤어. 그 때문에 사할린 동포들을 누구보다 이해할 수 있지. 말도 통하지 않는 메마른 땅에서 살아온 그들 사정은 나보다 100배는 더 하겠다 싶었지….”

오 할머니는 “지난 10년 동안 113명의 사할린 동포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며 “아직도 러시아 땅에서 고국을 그리며 지내는 사할린 동포들이 많다 하니, 그들이 죽기 전에 고국 땅을 밟을 수 있도록 힘껏 노력할 작정”이라고 말했다. 이곳에서 세상 떠난 동포들은 할머니 손을 거쳐 충남 천안시에 있는 국립묘원(墓園) ‘망향의 동산’에 잠든다. 오 할머니는 지난 1996년 공로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무궁화 훈장을 수상했다. .

오 할머니는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10년 전 영주 귀국 러시아 동포들에 대해 언론과 사회 각계에서 보였던 떠들썩한 관심이 사라진 것”이라며 “일본의 총칼 앞에 멀고 먼 땅까지 끌려 갔다가 겨우 돌아온 동포들에게 따뜻한 관심을 다시 보여달라”고 부탁했다.

(대구=신지은기자 ifyouare@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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