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의 아이들 2막 - 20. 위대한 엄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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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의 아이들 2막 - 20. 위대한 엄마들
  • 김태진 전 맨해튼한국학교장
  • 승인 2015.11.30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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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ㄴ ㄷ ㄹ ㅁ ㅂ ㅅ  /  G  N  D  L M  B  S

▲ 김태진 전 맨해튼한국학교장
 “교장 선생님, 글쎄 우리 송이가 ‘한글 발음표’를 직접 만들어서 공부하고 있어요. ‘ㄱ’ 밑에는 알파벳 ‘G’를, ‘ㄴ’ 밑에는 ‘N’, ‘ㄷ’ 밑엔 ‘D’... 이렇게 말이에요. 그리고 제가 무심코 영어로 말하면 한국말로 해달라고 말할 정도로 한국어 공부에 열중한답니다...”

 여름방학 때 송이 어머님이 감격의 목소리로 전화하신 내용이다. 처음 한국학교에 입학해 한글을 배운 아이가 겨우 한 학기 배우고 스스로 표를 만들어 한국어 공부를 한다는 소식에 감격스럽고 감사해서 학교 누리집에도 글을 올렸던 기억이 난다. 송이는 미국인 아빠와 한국인 엄마 사이에 태어난 아이다. 그럴 때 아이의 얼굴은 거의 백인 모습에 가까운데 송이는 더욱 백인다운 용모로 어여쁜 금발인형을 보는 느낌이다.

 하긴 혼혈 학생들은 정말 모두가 다 예쁘다. 서구적 시원함에 동양의 아기자기함이 오묘하게 깔린 느낌이랄까? 그리고 유전적 관계가 멀어서 그런지 참 똑똑하다. 그러니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안다고 6살 나이에 한글발음과 영어발음과의 상관관계를 발견하여 표까지 만들어 공부하니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송이가 똑똑해서이기도 하겠지만 그만큼 한글이 과학적인 글자로 배우기 쉬운 문자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리라.

 송이 어머님이 처음 한국학교에 송이를 데려오시면서 했던 말씀이 기억난다.
 “교장 선생님, 제게 소원이 있어요... 송이가 자라서 인생의 고민이 생겼을 때 저랑 한국어로 이야기하기를 원해요. 영어가 아닌 한국어로요...” 

 그런 어머님의 남다른 각오로 시작된 공부인지라 방학을 맞아 집에서 실시한 한국어 교육도 남달랐다. 어머니는 두 달이 넘는 방학동안 송이가 한국어를 잊어버릴까봐 케이블을 신청했다고 한다. 틈만 나면 한국 프로를 보았고, 집중적인 한국어 청취로 송이의 실력이 일취월장하자, 엄마의 감격은 터질 듯 커지며 예쁘디 예쁜 딸이 더욱 사랑스럽다. 송이도 마찬가지다. 한국어를 공부하다, 혹은 한국 프로그램을 보다 모르는 말이 나올 때 척척 알려 주는 엄마가 정말 고맙고 자랑스럽고 위대하다. 송이에게 엄마는 소리 나는 ‘한영사전’이었던 것이다. 한국어 만능인 엄마가 곁에 있으니 한글 공부가 더욱 신나고, 송이에게 엄마는 또 다른 의미로 소중하고 중요한 존재가 되었다.

 이렇게 한국어를 매개로 모녀간 애정과 신뢰가 더욱 돈독해지자 뿔이 난 건 아빠다. 송이가 한국어에 재미를 붙이며 엄마와의 대화만 부쩍 늘어난 데다 아빠가 못 알아듣는 한국어로 자주 얘기를 하기 때문이다. 무슨 말을 했는지 물어보면 ‘아빠에겐 비밀!’이라며 엄마랑만 속닥인다고 하니 아빠로선 여간 서운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그런 송이가 귀엽기만 하건만 당하는(?)는 아빠는 그야말로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된 것이 속상하고 답답하기만 했을 거다. 위기의식을 느낀 아빠도 슬슬 모녀의 한국어 대화에 끼어들며 같이 배우기를 청하니 그 누구보다 송이가 제일 신나한다. ​

 제니 역시 한국인 엄마와 미국인 아빠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러다보니 집에서 영어를 주로 쓰게 되고 한국어 실력이 같은 기간 다닌 다른 친구보다 많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게다가 주말이면 복잡한 맨해튼을 벗어나 롱아일랜드 별장에 가서 지내고 싶어 하는 아빠 때문에 결석도 많이 했다. 오직 엄마의 바람으로 한국학교를 다니다 보니 가족이 함께 움직여야 할 일이 생기면 무조건 결석이다. 이래저래 제니는 한국학교를 4년이나 다녔지만 다닌 기간에 비하면 한국어 실력이 약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꾸준히 다녀 중급반인 우리 반으로 진급을 했으나 여러모로 따라오기 힘들어 했다.

 그러나 제니 어머님은 서툴게나마 한국어를 하는 딸이 자랑스럽기만 하다. 바로 전 학기에는 ‘동화대회’에 출전해서 은상을 받았기에 이젠 아빠까지 합세하여 한국어 교육에 협조를 하며, 가족 모두가 더욱 신이 나서 한국학교에 온다. 그런 제니가 더 이상 한국학교를 오지 않겠다는 통보를 해왔다. 이유는 제니의 영어실력 때문이란다. 미국학교에서의 영어 실력이 자꾸 떨어져 학교에서 진단한 결과, 한국어를 동시에 배우고 있기 때문이란 결과가 나왔다. 학교에선 당장 한국어 공부를 중단하라는 통보를 했고, 제니 엄마는 눈물을 머금고 한국학교를 중도하차 시켜야 했다.​
 
 정말 한국어 때문에 그럴까? 그리고 정말 도중하차라는 방법 밖에는 없는 것일까? 이중언어에 대한 여러 가지 글들을 찾아가며 이중언어교육이 아동의 어휘력, 인지능력, 사고의 유연성 등 긍정적인 효과가 많다는 연구를 예로 들며 설득하였으나 정규학교의 전문가 선생님 주장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 한 학부모로부터 제니가 다니는 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맨해튼엔 사립학교가 무수히 많은데 그 중 제니가 다니는 학교는 ‘이중언어’에 배타적인 학교란다​. 그래서 아이에게 언어상의 문제가 발생하면 제2언어교육 때문이라는 결론을 많이 낸다는 것이다. 갑자기 억울한 마음도 들었지만, 미국에서 한국어는 소수언어(minority language)이고 또 주말 한국학교라는 곳이 당연히 미국학교에 비해 소수(minority)이니 이래저래 힘이 빠지는 일이다.

 세월이 몇 년이 흘러도 그렇게 한국학교를 중단한 제니 생각이 가끔 났다. 그러던 중 제니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나마 한국학교 다닐 때는 제니가 엄마와 한국말로 대화도 했으나 한국어과 담을 쌓게 되면서 이제는 한국어를 완전히 잊어버렸다고 한다. 게다가 제니 엄마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이야기가 또 하나 있다. 제니 엄마는 한국에서 대학 졸업 후, 미국에 유학 와 석사학위를 받고 직장 생활을 하다 미국인 남편과 결혼을 했다. 사업하는 남편을 도우며, 박물관에서 한국인 관광객을 위한 통역 일을 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분이다. 큰 키, 서구적인 미모, 세련된 차림이 돋보이는 분으로 한국학교에선 ‘일일 교사’로서 가르치는 능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멋진 분이 제니에게는 실력 없는 엄마로 비쳐진단다. 제니가 공부하다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엄마에게 물어보곤 하는데 엄마가 영어로 설명해 주는 부분이 그 아이 성에 차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엄마가 지식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뇌의 구조가 이미 한국어로 굳어져 있는 상태에서 배운 영어이기 때문에 오는 ‘절대적인 한계’이건만 제니가 그것을 알 리 없다. 그런데 제니의 눈높이에 맞춰 그 아이의 실력과 정서에 딱 맞게 가르쳐주는 아빠의 설명은 그야 말로 귀에 쏙쏙 들어오니 제니는 이제 모르는 것이 있으면 아빠에게만 물어본단다. 제니 눈에는 지식 수준과 상관없이 아빠는 유식한 사람, 엄마는 무식(?)한 사람으로 이분되어 버린 것이다.

 만약 제니가 한국어를 아주 잘해서 엄마가 한국어로 설명을 해주었으면 제니 엄마가 무식(?)하다는 오명을 받지 않았으련만 제니에게 한국어는 이미 먼 나라 말이 되어버린 지 오래니 안타까울 뿐이다. 제니 엄마는 제니가 어렸을 때 한국어로 대화하던 그 때가 정말 그립다며 중간에 한글학교를 그만 둔 것이 못내 아쉽다고 하셨다니 전해들은 나의 마음도 안타까움과 아픔으로 가득 차게 된다.
 
 외국에 이민 간 한인 부모는 한국어 교육에 열심이고, 한국의 엄마들은 영어교육에 더 열성이다. 세계화 시대, ‘이중언어’ 교육에 집중한다는 면에선 같을 수 있으나 ‘한국의 영어 교육’과 ‘미국의 한국어 교육’에는 차이가 있다. 전자는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한 실용적 성격이 강하고, 후자는 아이의 ‘정체성’ 확립의 목적이 바탕에 깔렸다. 재외동포 후세들은 한국어 교육을 통해 부모의 언어뿐만 아니라 한국의 정서와 문화를 배우며, 그들 존재의 뿌리를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언어는 사람의 생각을 담는 그릇이기에 언어엔 그 언어를 계속 사용해 온 민족의 ‘정신’과 ‘문화’가 담겨있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끼리는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과는 다른, 그들만의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언어 연구자 카렌(Karen)은 한 언어를 언어구조적으로 완벽하게 한다고 해도 원어민에게 최적의 상태로 인식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그 사회의 범주 안에 자동적으로 들어가는 것 또한 아니라며, 그 수용의 상태가 바로 ‘언어정체성’이라고 말하였다. 제니엄마가 제니의 질문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다기 보다 제니의 나이 때, 그 정서로 배운 언어가 아니기에 제니 또래의 아이들만이 느낄 수 있는 ‘정서’를 영어에 실어 보내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 

 미국의 한 연구에서 세대 간 모국어 유지에 대한 조사를 했는데 이민자 2세대로 넘어가면서 이민자 가정의 모국어에서 영어로의 ‘언어전환’이 중국인이 26.3%인데 반해 한국인은 69.3%라고 하였다. 그러니 이미 3세대로 넘어가고 있는 현실에서 세대를 거듭할수록 ‘언어전환’의 비율이 높아질 가능성이 크기에 모국어 유지를 위한 노력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할 시기이다.

 동시에 재외동포 후세들의 한국어 교육은 개인적 차원에서의 이중언어 능력 외 민족적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일임을 다시금 인식할 필요가 있겠다. 한국어는 재외동포 후세들이 그들의 부모나 친척들과의 의사소통을 하는 기능 외에, 한민족의 사고와 역사, 관습과 생활을 세대에서 세대로 전승시키는 중요한 매개이자 문화유산으로, 재외동포들이 우리의 자랑인 한국어를 학습하는 것은 한민족의 문화유산을 계승하는 일임과 동시에 민족적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도 주말 아침, 졸린 눈 비비며 일어나는 자녀를 격려해 함께 손 붙잡고 한국학교를 다니고 있는, 우리의 수많은 송이 엄마들은 ‘유식한 엄마’는 물론, 존경받아 마땅한 ‘위대한 엄마들'이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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