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소리] 남북한과 주변4강 모두에게 기쁜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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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소리] 남북한과 주변4강 모두에게 기쁜 소식
  • 이형모 발행인
  • 승인 2015.08.11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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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과 남북분단

▲ 이형모 발행인
  해마다 8월 15일이 오면, 우리들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35년 강제점령에서 벗어난 ‘광복의 감격’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우리들의 손으로 싸워서 쟁취한 해방은 아니다’라는 말은 틀리지 않지만 적절하지 않다. 우리 민족은 치열한 ‘독립투쟁’을 통해서 독립 국가를 가질 자격이 있음을 세계만방에 보여 주었다.

  1905년 을사늑약 이전부터 고종황제의 외교적 노력과 의병들의 항일투쟁은 시작되었다. 의병들은 일본군에 의해 무력 진압되었고 고종황제는 초대총독 데라우치에 의해 독살되어 1919년 3월 1일 장례 날에 ‘독립만세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1910년 이후 일제강점기간 내내 국내와 만주, 연해주, 상해 그리고 세계 각지에서 항일독립운동은 불타올랐다. 최근에 이르러서야 자세히 알게 되었으니 통탄스러운 일이다.

  1943년 11월 23일 루즈벨트, 처칠, 장개석 3인의 카이로회담에서 “적절한 절차에 따라 한국의 자유 독립”이 약속되었으나, 38도선은 카이로회담, ‘얄타’나 ‘포츠담’ 어디에서도 언급된 적이 없다.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명분으로 신속하게 한반도에 진주한 소련군을 보고, 미국이 긴급히 38도선을 경계로 정하고 양국이 한반도를 분할하여 군정(軍政)을 실시했던 것이 분단선으로 고착되었다..

  정부수립과 한국전쟁

  남한에 1948년 8월 15일에 단독정부가 수립된 것은 3년 동안 천신만고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쟁취한 것이었다. 곧이어 수립된 북한 공산정권은 소련과 중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업고 ‘무력통일’을 목표로 1950년 6월 25일 침공해 옴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북한군은 T-34 소련제 탱크 242대와 170여대의 전투기를 포함한 200여대의 비행기를 보유하고, 병력은 20만 명을 넘어섰다. 그들에게는 준비된 전쟁이었다.

  탱크와 전투기는 전무했고 훈련받은 군대도 전투장비도 갖추지 못한 국군은 일거에 낙동강까지 밀려 ‘대한민국의 존립’은 풍전등화였다. 미국을 위시한 16개 우방국들의 참전과 많은 병사들이 피 흘린 덕분에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을 탈환한 국군과 유엔군은 압록강까지 전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공군의 30만 대병력 투입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전선은 한반도 허리로 고착되어 ‘분단 상황’으로 회귀하고, 승패 없는 교착상황을 확인한 양측은 1953년 7월 27일 휴전함으로 1,129일의 살육과 파괴가 멈췄다.

  6. 25전쟁으로 일본은 살아나고,

  남한과 16개 우방국 그리고 북한과 소련, 중국이 참전한 3년간의 국제전쟁으로 국군 62만, 유엔군 16만, 북한군 93만, 중공군 100만, 민간인 250만이 죽고, 이재민 370만, 전쟁미망인 30만, 전쟁고아 10만, 이산가족 1,000만 등 당시 남북한 3,000만 명의 절반을 넘는 1,900여 만 명이 피해를 입었다.  

  일본의 35년 착취로 빈손으로 독립한 한국은 6. 25전쟁으로 수많은 청년들이 죽고 모든 것이 파괴되어 완전히 ‘폐허의 땅’이 되었다. 한국은 절대빈곤 상황으로 바닥에서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일본은 6. 25전쟁의 병참기지로 선택되어 태평양전쟁의 패전국으로 피폐해졌던 경제를 회복하면서 미소냉전구도에서 동아시아의 중요한 거점으로 부상했다. 

  산업혁명과 경제민주화 그리고 정치민주화

  휴전이후 미소 냉전구도에서 ‘통일’은 불가능한 것이 되었고 ‘한미방위조약’으로 안보의 안전판을 얻은 것에 만족해야 했다. 이후 1960년 4.19혁명에 이어, 1961년 5.16군사쿠데타로 군부통치가 시작되고,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되고 새마을운동이 확산되면서 경제발전의 불이 타올랐다. 국민소득이 1962년 60달러에서 33년 만에 1만 달러가 되어 압축고도성장의 신화를 만들었다. 짧은 기간에 산업혁명과 경제민주화를 이룩한 것이다.

  1987년 6.10 민주항쟁으로 오랜 군부통치가 막을 내리고 민간정부가 들어섰다. 그 이후 ‘자유선거에 의한 정권교체’가 자리 잡아 한국은 ‘정치민주화’를 이룩했다. 2차 대전 이후 수많은 신생독립국가 중에서 한국은 유일하게 경제민주화와 정치민주화를 달성했다. 원조 받는 국가에서 원조 하는 국가로 바뀌었다.

  세계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그러나 전 세계에서 분단을 극복하지 못한 유일한 국가로 남아 있다. 국력에 상응하는 국가적 자존감을 인정받지 못하고, 주변 4강의 눈치를 보느라 겨를이 없다. 따라서 한국인의 개인적 위상도 경제적 위상에 비해 보잘 것이 없다. 국가나 개인이나 ‘주도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존엄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 모두가 ‘통일’을 하지 못한 탓이다.

  왜 통일을 하지 못할까?

  70년 긴 세월, 얼마나 실망했으면 이제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도 노래하지 않는다. 여러 자리에서 뜻있는 인사들이 ‘통일 강연’을 한다. 통일비용도 이야기 하고 북한 정권이 특별히 악해서 통일이 어렵다고도 한다. 처음에는 그럴 듯하게 생각했는데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다.

  통일이 아무리 어려우면 만주와 연해주에서 일본군과 싸우던 독립군보다 힘들겠는가? 안중근 의사와 윤봉길 의사 보다 힘든 상황일까? 6.25전란으로 모든 것을 잃고 바닥에서 국민소득 3만 불로, 1조 달러 무역대국으로 나라를 일으키는 일보다 힘들겠는가?

  결정적으로 남이나 북이나 ‘통일 의지’가 박약한 것 같다. 정치집단들이 통일이나 국민 복지보다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와 현상유지에 관심이 큰 것이다. 그동안 들어 온 통일에 대한 정부당국자들의 설명들도 ‘통일하기 어려운 이유’들이 대부분이었다. 어떻게 하면 통일될 수 있다는 이야기는 별로 들은 기억이 없다.

  그렇다면 혹시 통일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통일할 의지가 없는 것은 아닐까? 광복 70주년을 맞이해서, 지금은 우리가 심각하게 자신을 돌아봐야 할 때다. 평소에 그냥 넘어 갔던 부분들도 고쳐서 생각해 봐야 한다. 통일의 전략과 전술과 해법의 첫째 요소는 ‘통일의지’이다. 둘째도 ‘통일의지’이다. 셋째도 ‘통일의지’이다.

  우리는 왜 통일해야만 하는가? 

  우리는 왜 통일해야만 하는가? 대한민국이 정치, 경제, 군사, 외교, 문화적으로 국가적 존엄성을 회복하고 보통국가로 대접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한국은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불이익을 넘어서, 이제는 ‘인구절벽’과 ‘취업절벽’ 앞에서 경제적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점증하는 위기감으로 국민들은 ‘북한을 살리고, 남한도 웅비할 수 있는 적절한 시대적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국가의 잠재력’이 빠르게 고갈되고 있는 현실을 외면하고, 오래되고 진부한 ‘정치 학예회’를 반복해서는 어떤 개인이나 세력들도 살아남기 어렵다.

  남북한과 주변4강에게 기쁜 소식

  주변 4강이 찬성 반대하는 것은 우리의 통일의지와 그에 따른 노력에 달려 있다. ‘통일 한국’은 한중일 3국이 협력할 수 있는 전제조건이다. 동북아 3국의 협력은 ‘동아시아 시대’의 전제조건이다. 동아시아 시대로의 순탄한 발전은 세계평화와 번영의 가장 큰 요소이다.

  한국이 통일하는 것은 남북한과 한인들에게만 좋은 일이 아니다. 주변 4강과 동아시아와 세계 각국에게 모두 ‘기쁜 소식’인 것이다. 이 좋은 소식을 널리 알리고 커다란 공감을 불러일으킬 일꾼들은 없을까?

  광복 70년 이 아침에 우리들 자신과 후손들의 희망찬 미래를 위해 함께 기도하자. ‘통일의지’를 마음에 새기자. 한민족의 광복을 완성하는 ‘통일’을 부르자. 큰 소리로 함께 노래하자. 모두 함께 손잡고 통일을 향해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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