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뉴욕 한인회장, "학력도 소아마비도 장애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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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뉴욕 한인회장, "학력도 소아마비도 장애가 아니었다"
  • 한겨레
  • 승인 2003.01.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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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1월 인천에서 배로 출발한 102명 한인들이 하와이에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로 도착한 지 올해로 1백년이 됐다. 지금 미국내 한인은 2백만명을 넘으면서 아시아계 이민 그룹 중 다섯번째 규모로 성장했다.

1970년대 들어 본격화한 한인들의 미주 이민은 하나같이 애절한 사연을 담고 있으며 이들 중 적잖은 수는 사업가나 전문가로 성장하면서 `아메리칸 드림'을 일궈냈다. 특히 2세 교육에 열성을 쏟은 결과 연방정부나 재계 등 미국사회를 움직이는 주요 기관 종사자가 점점 늘어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27년 전인 1976년 27살의 나이에 소아마비로 인한 불구의 몸으로 단돈 6백달러를 갖고 미국에 이민온 김석주(54) 뉴욕 한인회장은 개인적 사업 성공, 미국내 다른 소수민족들과 원만한 관계 형성, 한인사회 봉사, 미 주류사회에서 동포들의 영향력 신장 등에 기여한 점에서 두드러진 인물이다. 삐삐(호출기) 사업으로 점포 수십개에 연 매출 3천만달러에 이르는 사업을 일군 김 회장은 이제 한인동포들의 정치참여를 통한 미국내 발언권 강화에 열정을 쏟고 있다.

-왜 이민을 생각했나.

=장애인으로 살면서 교육도 못 받은데다 살아가면서 가정환경이 좋아질 희망도 없는 등 모든 게 절벽이었다. 난 일할 수 있다고 자부했지만 내 처지는 정말이지 가망성 없는 극한상황이었다.

-미국에 이민하면 삶이 달라질 것으로 생각했나.

=제일 확신을 가진 것은 기동성이었다. 장애인이 혼자 운전할 수 있는 자동차가 있다는 사실이 내 삶을 바꿔놓을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미국에 처음 도착해 무엇을 했나.

=혈혈단신으로 와 전자 2급 기능사 자격을 갖고 맨해튼의 차이나타운에 있는 전자 수리점에서 일하다 6개월 뒤 유대인 3형제가 운영하는 회사에 들어갔다. 그 곳에서 정말 열심히 일했고 주인은 1년여 만에 책임자 역할을 주더니 다시 1년이 채 안돼 기술부를 맡겼다. 기술자 고용, 직원 임금 인상, 해고 등의 일을 책임지도록 했으니 내게는 꽤 큰 일이었다. 주인 3형제는 영어도 못하는 나를 기술이 있고 성실하다는 것을 믿고 전적으로 신뢰했다.

-일하는데 장애가 지장이 되지 않았나.

=회사에서 사람들은 누구도 내가 목발에 의지해 움직이는 데 대해 단 한마디도 한 적이 없고 또 동정도 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제일 어려웠던 일 중 하나는 사람들이 혀를 끌끌차고 안됐다고 하면서도 차별하는 것이었다. 장애인은 아예 다른 인간으로 제쳐놓고 일을 할 수 없는 인간으로 여겼다. 미국에 대해 인종차별을 얘기할지 모르지만 한국에서는 인간차별을 겪었다. 미국에 살면서, 특히 유대인 회사에서 일하면서 나는 내가 장애인이란 생각을 깜빡 잊고 보통사람인 걸로 생각했다.

-개인사업은 언제 시작했나.

=우리 회사에 전자제품 수리를 맡겼던 대형 백화점들의 자체 상품이 없어지면서 일거리가 줄자 유대인 3형제는 내게 회사 운영과 관리를 거의 전적으로 맡겼다. 그래서 4~5년간 내 이름으로 회사를 운영하면서 텔레비전과 냉장고 등을 수리하는 일을 했다. 지금의 사업은 그 때 고객이던 사람들이 페이징(삐삐) 서비스 일을 하는 것을 접한 게 계기가 됐다.

그들이 갖고 있는 삐삐가 당시 기계 값 275달러에 월 서비스료 36달러였다. 기술자의 입장에서 물건을 분해하고 가격을 따져보니 너무 이익을 많이 챙기는 것으로 생각돼 제조회사를 직접 접촉해 보니 내 예상이 맞았다. 실제 비용을 보니 기계는 125달러, 월 서비스료는 9달러면 충분한 제품이었다. 이 때부터 공장 한쪽에 연구실과 설비 등을 차려 일을 벌여본 뒤 광고를 냈다. 1년 계약 조건으로 삐삐를 무료로 준다는 것이었는데 내 계산으로는 그래도 이익이 많았다. 당시로선 획기적인 이 광고를 보고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가입자 1천명으로 목표를 정한 것이 17만명까지 올라갔다. 결국 이 사업에 전적으로 매달리고 확장을 거듭한 끝에 가입자 수가 10만명을 넘어서면서 기계를 직접 만들고 송신사업소도 세워 전파를 직접 발사했다.

-경쟁업자가 많았을 텐데.

=가격이나 서비스에서 다른 업소들은 경쟁이 되지 못했다. 나는 특별히 가격을 싸게 한 게 아니었지만 서비스 시스템이 좋았다. 내가 기술이 있으니까 제품에 문제가 생겨 갖고 오면 그 자리에서 고쳐주거나 아예 새 것으로 바꿔줬다. 나는 직원들에게 손해를 보더라도 고객에게는 절대로 현장에서 문제점을 해결해 주도록 했다. 광고요금으로 한달에 몇 만달러를 쓰는데 왜 손님에게 몇달러를 서비스하지 못하는가 하는 게 내 생각이었다. 이로 인한 광고효과는 엄청나 소수민족 중 `리사 비퍼'를 모르면 간첩이라 할 정도로 뉴욕 일대에서 사업이 번성했다.

-히스패닉 등 타민족과 유대관계가 훌륭한 것으로 안다.

=히스패닉 지역에서 사업을 하면서 가난한 고객들에게 그저 물건만 파는 게 아니라 돕고 같이 생활한다는 생각을 했다. 지역내 행사가 있으면 함께 참여해 작은 도움이라도 주면서 마음을 트고 지냈다. 물론 처음에는 이들도 자기들 지역에 동양인이 들어와 영업을 하는 데 대해 경계심이 많았고 충돌이 없지 않았다.

그러던 중 우연히 동네 꼬마들이 스폰서를 요청했다. 이들은 소프트볼을 하는데 유니폼을 입고 싶다며 도와주면 유니폼에 `리사 비퍼'란 내 업소명을 써붙이겠다고 했다. 이들을 도와준 게 알려지면서 지역내 소수인종 사이에서 `리사 비퍼 미스터 김은 아이들을 좋아 한다'고 소문이 나면서 추가로 몇 개팀이 내게 유니폼을 요청했고 난 흔쾌히 응했을 뿐아니라 이들이 경기할 때면 콜라 등을 지원했다. 이 중 한 팀이 뉴욕주 대표로 남미 9개 나라가 벌이는 케리비언 토너먼트에 진출하면서 나를 초청했다. 그들과 함께 도미니크에 가니 부통령이 나와 있는 가운데 내게 시구를 하도록 했고 현지언론은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후 지역내 소수인종들과 뗄 수 없는 유대관계가 생겼다.

-한인동포들은 타민족과 잘 어울리지 못해 문제가 생기곤 한다.

=흔히 소수민족 이민자들에게 어려운 것이 언어와 문화라고 하지만 이를 초고속으로 깨뜨리는 게 열린 마음이다. 처음에는 누구나 경계심을 갖게 되지만 마음을 열고 따뜻하게 대하면 이들은 우리보다 더욱 열려 있다. 나는 지역사회에서 이들과 함께 어울리는 축제를 주관하는 등 다문화 페스티벌을 종종 열어 벽을 허물었다.

-뉴욕 이민사회에서 주류사회에 영향력이 큰 것으로 안다.

=한번은 동네 소수민족들이 함께 가자고 해 처음 간 주민회의에 경찰서장과 지역 출신 하원의원이 와 주민들 의견을 경청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공직자를 선출하는 주민들은 이들의 진짜 주인이었다. 동네 주민들은 누구든 필요하면 불러 현안에 대해 의견을 묻고 민원을 제기했다. 정치가 주민생활과 이처럼 밀접하게 연관돼 있는 게 미국이다. 이것을 보고 나는 한인사회와 한인회장도 이제 친목단체에서 벗어나 정치활동을 벌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인회장은 이웃 정치인들과 많은 관계를 갖고 영향을 줄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정치를 하라는 게 아니라 한인의 이해관계를 알리고 관철할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지난번 주지사 선거 때 한인들이 선거운동에 개입한 결과 당선된 주지사가 현안으로 돼 있던 일반식당내 소주판매 허용 민원을 곧바로 받아들인 것은 한 예다.

-동포사회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단결이 문제다. 동포들 개개인은 참 우수하고 뛰어난 능력을 가진 분들이 많다. 그런데 이런 자질을 모아 한인사회 전체의 이익을 높이는 방향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한인사회에는 회장이 수없이 많다는 얘기는 이런 단점을 잘 보여준다.

-한국과 미국간 관계설정은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한미 주둔군지위협정(소파) 등 고쳐야 할 것은 고쳐 한국의 자존심을 지켜나가되 동맹으로서의 관계는 더욱 돈독히 해야 한다. 미국과의 관계는 세계화 차원에서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한국 정부에 당부하고 싶은 게 있다면.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사는 해외동포를 국익을 위해 최대한 활용하기 바란다. 미 연방정부나 주 혹은 시 정부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동포들이 있다. 가령 한국 정부 관계자들이 좀처럼 접근하기 어려운 미국쪽 인사들을 동포들은 쉽게 만나는 경우가 많이 있다. 6s 뉴욕/윤국한 특파원 gookhan@hani.co.kr


김석주씨는?


1949년 경상북도 영주에서 4남1녀 중 둘째로 태어난 김석주 회장은 다섯 살 때 부모가 이혼하면서 외가인 강원도 옥계에서 지내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서울로 올라왔다. 학비를 내지 못해 중학 1년을 중퇴하고 전자기술학원에 다닌 것이 미국땅을 밟는 계기가 됐다.

2급 전자기능사 자격을 따 청량리역 앞에서 전파상을 차려 일하면서 검정고시로 고교졸업 학력을 인정받았다.

이민 3년만인 1979년 간호사로 이민한 김 데레사(50)씨와 결혼해 2남1녀를 두었고 딸의 이름을 따 1987년 창업한 `리사 비퍼'로 크게 성공했다. 미 전국이민연합이 성공한 이민자에게 주는 `엘리스 아일랜드상', 뉴욕시장이 주는 소수민족유대관계상, 미국 보이스카웃연맹이 주는 `자랑스런 시민상', 한인회가 주는 `자랑스런 한인상' 등을 수상했다. 뉴욕/윤국한 특파원


인터뷰 뒤안길


30여년 전 `도무지 믿고 의지할 데라곤 없어' 두 번이나 자살을 기도했던 한 청년은 이제 남을 돕는 데 힘을 쏟는 자신감 넘치는 사업가로 변해 있었다. 지난 18일 뉴욕 시내 한 히스패닉계 밀집지역내 식당에서 네 시간 넘게 계속된 인터뷰 중 줄곧 솔직하고 자신의 일에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는 김 회장의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중학 1년 중퇴 학력에다 심한 불구인 그가 기업을 일구고 뉴욕의 50여만명 한인동포를 대표하게 된 것은 강한 의지와 노력, 성실성의 결과임을 알 수 있었다.

김 회장은 동포들의 정치력 신장을 주요 목표로 삼아 적지 않은 성과를 얻었다. 그의 노력으로 뉴욕시는 한글로 된 유권자 투표용지를 만들었고, 투표장에 한국인 참관인과 통역관을 둬 영어해득이 어려운 동포들의 정치활동을 지원하는 획기적 조처를 취했다. 뉴욕/윤국한 특파원

2003.1.27

▒ 게시일 : 2003-01-28 오전 11:2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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