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의 아이들 2막 - 9. 절대 만지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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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의 아이들 2막 - 9. 절대 만지지 마세요
  • 김태진 사무국장
  • 승인 2015.07.13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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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태진 한국문화국제교류운동본부 사무국장(전 맨해튼한국학교장)
  학교에서 교장 선생님과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말이 있다. ‘한국학교에선 한국말로?’ 아니다. ‘숙제, 일기 꼭 해오세요??’ 아니다. ‘지각, 결석 하지 마세요???’ 역시 아니다. 정답은... ‘미국 학교 물건은 ‘절대’ 만지지 마세요!‘이다. 이 말은 개학식 때 교장 선생님이 꼭 당부하는 말씀이고, 교사들도 교실에 들어가서 다시 반복 강조하며 첫 시간부터 쐐기를 박아야 할 만큼 꼭 필요한 말이다. 교육자가 학생들에게 ‘-하지 마라’는 부정적인 말을 자주 하는 것이 안 좋은 것은 알지만 이것은 우리의 생존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반복, 또 반복, 강조, 또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처음에 썼듯이 우리는 미국의 공립학교를 토요일만 빌려 쓴다. 즉 남의 집을 빌려 쓰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주인의 도구는 절대 만져서도 안 되고, 그러다 파손되거나 없어지면 엄청난 배상을 해야 하고, 잘못하면 쫓겨나서 집도 절도 없는 신세가 된다는 거다. 교장 선생님은 시간 나는 대로 과거 학생들이 미국학교의 물건을 만지거나 손상시킴으로 인해 힘겨웠던 이야기들을 해주셨다.
 
  “학교 사용하며 일어난 사건은 해도 해도 끝이 없어요. 한 번은 한 학생이 학급에서 실습으로 기르는 화초 잎을 ‘똑똑’ 다 따버린 적이 있었어요...”

  다들 놀라 눈만 둥그러니 뜨고 그 황당함을 교환하고 있는데, “그건 약과였지요. 교사 책상 서랍을 열고 교사가 완성해 놓은 성적표에 또 표시를 해서 성적이 엉망이 되게 한 적도 있었는 걸요. 너무 엄청난 일이었지요. 그 때는 우리가 먼저 나간다고 했어요...”
 
  학교 사용에 그렇게 생각지도 못한 심각한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사실에 모두들 충격을 받은 듯 얼굴이 굳어진다. 수업을 잘 해야 한다는 책임감 위에 교실 사용에 대한 문제가 얹혀져 그 부담이 무겁게 다가온다.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이들, 유난히 장난을 많이 치는 개구쟁이가 떠오르면서... 하긴 산만한 아이가 있든, 없든 교실 사용 시엔 항상 긴장을 할 수 밖에 없다.
 
  미국 초등학교 교실은 마치 어린이 놀이방 같아 책, 컴퓨터, 놀이도구, 학용품, 학생 작품 등이 다양하게 구비되어있다. 그 주에 무엇을 했나를 알 수 있을 정도로 수업 도구나 학생 작품이 진열되어 있는데 그런 것들은 우리들에게 커다란 스트레스를 준다. 호기심 많은 아이들이 만질까 걱정이고, 붙여 놓은 작품이 저절로 떨어질 때도 있는데 우리아이들이 떨어뜨렸다고 할까봐 다 제자리에 붙여 주어야 한다. 어떨 때는 책상이 4개씩 붙여져 있고 전지에 학생들이 공동 작업한 것이 놓여있다. 그러면 종이를 안전한 곳에 옮긴 후, 책상을 다시 배열하고, 수업이 끝나면 마치 고미술품 다루듯 학생의 작품을 조심조심, 원래의 자리로 잘 배치해 놓는다. 그렇기에 교실의 처음 모습을 잘 기억해야 한다. 좀 특별한 모양이거나 수업도구가 여기저기 즐비한 날은 처음의 상태를 그려 놓았다가 그 모습 그대로 원상복귀 시킨다. 그만큼 우리가 왔다간 흔적을 최대한 남기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가장 곤란한 것은 창문이었다. 어떤 날은 창문이 열려있는 날이 있다. 미국학교 교사가 일부러 열어 놓았는지 아니면 깜빡했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면 돌아갈 때 열어 놓고 가야 하는지, 아니면 닫고 가야 하는지 심히 고민된다. 마음 같아서는 열어 놓고 가고 싶지만 혹 비라도 와서 문제가 생기면 그 불똥이 한국학교에 튈까봐 유리창만은 원래 상태를 무시하고 꼭 닫고 가는 것으로 했다.
 
  교사들이 이렇게 교실정리를 철저히 하고 있는 동안 교장선생님은 다른 특별활동 교실이나 화장실, 카페테리아 등을 돌며 점검을 한다. 어느 날은 화장실 천장에 무언가가 붙어 있어 자세히 보니 젖은 휴지였다고 한다. 학생이 화장실에 비치된 휴지에 물을 묻혀 공처럼 만들어 천정에 던지는 놀이를 한 것이다. 긴 막대기로 그것을 다 때고 나니 목도 허리도 팔도 아프셨다는 들으며 왜 ‘교장 선생님’이 ‘고장 선생님’이라고 불리는지 알 것 같았다. 어쨌든 이런 ‘원상복귀’의 노력 덕분에 21가의 PS 104 Junior High School에서 15년 동안 한국학교를 잘 운영할 수 있었다.
 
  여느 때와 같이 아침이면 항상 분주하다. 미국 학교의 어떤 물건도 써서는 안 되기에 칠판조차 사용하지 않는다. 교무실 옆 창고(Storage Room)에서 하얀 칠판, 학습 도구와 자료를 꺼내고, 교실로 가서 준비해 온 수업 자료들을 붙이고 걸고... 수업 준비를 완료하고 기분 좋게 아이들을 맞으러 가려는데, 교장 선생님께서 심각한 얼굴로 미국학교 도우미(Helper)와 이야기를 나누고 계신다. 짐작으로도 안 좋은 일임에 틀림없다.
 
  “지난 주 백합반 교실에 있는 반짝이 2개가 없어졌다고 합니다. 12색 세트라서 한 개만 없어져도 금방 표가 나지요. 그 반 담당 교사가 없어진 것을 발견하고 교장한테 알렸고, 오늘 헬퍼가 한국학교 학생이 한 일인지 확인하기를 원했습니다. 교실에 가서 물어보니 쥬디가 자기가 가져갔다고 하네요. 그냥 호기심에... 금액은 1불도 안 되는 것이지만 이것은 아주 심각한 문제입니다. 쥬디 어머님과 함께 미국학교 교장을 만나 사과할 것입니다. 물론 2가지색뿐만 아니라 셋트로 12색 다 사주기로 했고요. 앞으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선생님들이 더욱 신경 써주시기 바랍니다.”
 
  “지난주에 국화반 교실의 화병이 깨졌습니다. 마침 국화반 정 선생님 아들이 깼고, 선생님은 정중히 편지를 써 다음 주에 똑같은 것을 사오겠다고 메모를 남겼다고 합니다. 정 선생님은 자신의 반에서 일어난 일이고, 자신의 아들이 일으킨 문제니까 개인적으로 해결하려고 하였으나 이것은 학교의 문제입니다. 제가 알았어야지요. 미국학교 교장한테 전화를 받았는데 저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알고 있었으면 제가 먼저 전화를 하는 등의 대비를 했었을 텐데 말입니다. 남의 학교를 사용하는 일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연이어 미국 학교 사용에 문제가 생기면서 우리는 알 수 없는 불안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미국 학교 교장이 다음 학기부터 토요일에 특별 과학 프로그램을 실시하기 때문에 학교를 빌려줄 수 없다는 통보를 해왔다. 오비이락(烏飛梨落)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개연성이 크다. 우리는 매주 긴장하며 교실은 유적지요, 물품은 유물이라도 되듯 다루었지만 개인주의가 발달한 미국에서 남이 내 교실을 쓰고 갔다는 것 자체가 교사의 입장에서 달갑지 않았을 것이고 작은 것에도 불평이 많았을 것이다. 그래도 미국학교 교장은 교사들의 불평을 막아주며 우리를 위한 배려를 해주었으나 일이 연달아 터지자 그 동안의 불만, 불편함이 복합적으로 밀려오며 결단을 내린 것 같다. 어쨌든 우리는 이사를 해야 했다. 방학 동안 교장선생님과 이사장님이 여름 뙤약볕을 맞으며 학교를 구하신 덕에 ‘02 가을학기부터 ‘PS 33’, 9th Ave. 27가로 옮겨서 수업을 하게 되었다.
 
  학교 짐이 그렇게 많은 줄 처음 알았다. TV, VCR, 음향 시스템, 20년간 받은 트로피들, 태권도, 무용, 서예 도구, 운동회 용품, 유아반 장난감, 엄청난 책들... 이삿짐센터를 불러 동쪽 끝에서 서쪽 끝으로 학교 짐을 옮기고 정리를 했다. 이번 학교는 Storage Room을 빌릴 수가 없어 지하 창고 한 칸에다 우리 살림을 차려야 했다. 지난 번 학교는 교무실 바로 옆에 있어 편했는데 이제 지하에서 수업도구를 챙겨 올라가야 한다. 엘리베이터가 있긴 하지만 층을 달리해 수업도구를 옮기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학교 주차장도 없어서 교사나 학부모 모두 주차 때문에 돈을 쓰든, 아님 학교 주위를 뺑뺑 돌며 시간을 좀 들여야 할 것 같다. 그러나 맨해튼에서 공립학교 빌리기가 쉬운 일이 아님을 알기에 불편함을 토로하는 것도 잠깐, 낯선 학교에서의 새 학기를 무사히 열기 위해 모두들 분주히 움직였다. 15년 East Side 시대를 접고, 새로이 펼쳐질 “West Side Story”(뮤지컬 제목 같지요?)를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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