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의 아이들 2막 - 3. 나는 자랑스런 대한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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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의 아이들 2막 - 3. 나는 자랑스런 대한의 딸
  • 김태진 사무국장
  • 승인 2015.06.01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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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태진 한국문화국제교류운동본부 사무국장(전 맨해튼한국학교장)
  ‘한국’이라는 공통분모를 중심으로 한 우리들의 특별한 토요일! 부모님 손을 잡고 아이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고, 학교 정문에선 교장 선생님이, 학교 로비에선 담임교사들이 두 팔 벌려 학생들을 반긴다. 수업 시간에 맞추어 담임교사를 따라 자녀들이 교실로 들어가고 나면, 학부모들은 학교 내 카페테리아에 모여 일주일간 품었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는다. 마치 고향에 온 듯, 푸근한 마음으로.

  “어제는 아버님 제사를 지냈어요. 남편이랑 해규랑 같이 절하고 해규에게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 주었지요…” 
  “아니 해규 아빠도요?”
  “그럼요... 내가 한국의 딸, 그러니까 그는 한국의 사위! 당연히 해야지요. 술 따르고 지방을 태우고, 음복도 하면서 한국에서 지낸 제사처럼 했어요... 우리 남편 절하는 것은 제가 가르쳤는데 그게 힘든지 엉덩이가 이렇게 하늘을 봐요...”​

  몸 시늉까지 하며 말씀하시는 해규 어머님을 보면서 모두들 한바탕 웃었지만 마음은 진한 감동을 받은 눈치다. 해규 아빠는 유태인이다. 기독교보다 더 율법적인 유태인에게 절은 우상숭배에 해당하는 금기사항이 아닌가? 그런 분에게 한국의 절을 가르치고 함께 제사를 지내다니... 해규 어머님의 고국 사랑과, 자신의 문화를 지켜가는 당당함과 함께 타 문화에 대한 이해와 포용력을 가진 해규 아버지에게서 받은 감동은 신선한 충격이자 타국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

  세계 5대 인종, 160여 나라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미국. 한 때는 ‘Melting pot’이라 하여 미국이라는 용광로에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녹아들어 다시 새로운 국민으로 탄생되는 민족정책을 썼다. 그러나 지금은 ‘Salad Bowl’이라 하여, 하나의 그릇에 있지만 각자의 맛과 향을 잃지 않는 샐러드처럼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자신의 색깔을 잃지 않고 살아가도록 그 민족의 고유성을 인정하고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그것은 미국 이전에, 소수민족이 강하게 느끼고 실천해야 할 일이 아닐까 싶다. 내 자신의 색깔을 내가 밝히지 못한다면 결국 자신의 색깔은 소리 없이 다른 색깔에 흡수될 것이며, 어느 누구도 자신의 색깔을 알지 못할 것이니까. ​

  한국인 아내와 유태인 남편, 그리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과 함께 치른 “한국의 제사 의식!” 그것은 맨해튼의 한 아파트에서 일어난 다문화 사회의 풍경을 넘어 경이로운 감격으로 다가왔다.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만나 한 가정을 이루어 조화롭게 서로를 존중하며 살아가는 모습. 그 가운데서 재현된 한국의 문화와, 그것을 지킴으로 인해 나타나는 진정한 나의 모습, 나만의 가치... 침략 당하던 역사 속에서 고구려인의 기상이 말발굽 소리 내며 달려오는 느낌이랄까. 정말 해규 어머님이 고구려의 용맹무쌍한 무사처럼 멋있게 느껴지며, 동양의 작지만 강한 나라. 한국의 문화와 한국의 정신이 외국 땅에도 옮겨져 꽃피고 있다는 사실은 나의 마음을 더욱 당당하게 만들어 주었다. ​

  외국에 나가면 진정 애국자가 된다고 했던가... 곡선의 미학이 부드럽게 펼쳐진, 언제든지 안기고 싶은 친구 같은 한국의 산하, 산 따라 유유히 흐르며 여유로움을 지펴주는 강과 하천, 숭늉처럼 구수하고 순박한 농촌 마을의 인심, 된장에 호박잎, 불고기에 상추쌈, 비빔밥에 고추장... 고국에선 평범하게 존재했던 모든 것이 외국 생활에선 특별함이며, 그립고 소중한 것이 된다. 그것은 미국의 민주주의, 합리적 문화가 주는 편리함과 성숙함, 거대한 땅이 주는 다양함과 풍요로움으로도 채울 수 없는,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나만의 정서이자 가치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내 대(代)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녀들에게도 이어지기를 바라는 소중함이다. 마치 내가 키워온 가업을 자식이 물려받기를 바라는 마음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비록 외국에서 자라는 자녀이지만 타문화로서의 한국이 아니라, 현재 그들을 있게 한 뿌리이자, 그들이 지켜나가야 할 자신의 모습임을 깨닫기를 바라는 간절함이다. 그 마음이 한국학교를 세우고, 주말 아침의 한가로움을 반납하고 자녀들을 이끌고 한국학교로 모인다. 이러한 부모님들의 정성이 한국학교를 존재케 하고 더욱 발전시키고 있으며, 그로 인해 우리의 후세들은 자신의 색깔을 분명히 알고, 내가 누구인가를 당당히 밝히며, 세계 어디에 가든 조화로운 삶을 영유할 수 있을 것이다. ​

  학교 문집에 기고하신 해규 어머님의 바람은 모두가 바라는 후세의 모습이자 미래 사회가 원하는 인재라는 생각을 하며, 아침 잠 설쳐가며 아이들 손을 이끌고 오시는 모든 한국학교 학부모님께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바친다. ​

  “......제 아이는 제가 하는 말을 알아듣고, 제가 써놓은 글을 읽고 저의 사상을 알아채고, 제가 지내온 문화를 사랑하고 또 저의 영혼까지 이해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소녀 시절에 우리 어머니 시절의 향수를 맡았던 것처럼, 제 아이도 그 아련한 한국의 정취를 한글을 통해 조금이나마 맡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서울의 비원을 거닐며 제가 깊이 들여 마셨던 한국의 역사를 제 아이도 느끼면 좋겠습니다. 90년대 초, 한국 UN 가입 축하공연인 카네기 홀에서의 한국의 창과 무용, 그 때 들었던 ‘5천년의 소리’, 그 웅장하고 고고한 소리를 제 아이도 비상한 귀를 가지고 들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한평생 종손으로 사시면서 후손 없이 가신 아버님의 원을 받들어, 비록 뉴욕 하늘 아래 있는 딸이지만 정성껏 제사를 받들어 모시는 저와 같이, 제 아이도 저의 제사를 기억하고 받들어 주었으면 합니다. 광개토대왕의 기상을 읽고, 이순신 장군의 행적을 읽고, 한낱 기생이 목숨 바쳐 나라 구하는 이야기를 읽고 기지를 배우고 존경과 통쾌함을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우리 아이가 한국의 찬란한 문화와 고고한 전통, 그리고 숨겨진 비밀의 역사를 깨우치며 사랑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무도 오지 않는 제 아버님의 기일에 홀로 사흘 걸려 제사상을 차리고, 토요일엔 아이의 손을 잡고 한국학교에 빠지지 않고 갑니다. 저는 ‘대한의 딸’임과 동시에, 우리 아이가 ‘대한의 딸’이었던 엄마를 자랑스럽게 기억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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