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의 아이들 1막 - 8. 넓은 세상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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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의 아이들 1막 - 8. 넓은 세상을 향해
  • 김태진 사무국장
  • 승인 2015.04.20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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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태진 한국문화국제교류운동본부 사무국장(전 맨해튼한국학교장)
  지인 중에 중학생 자녀를 둔 분이 있다. 요즘 그의 가장 큰 관심은 아이를 특목고에 보내는 것인데, 특목고를 가야 일류대학으로 가는 길을 선점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수많은 학원 및 학습 정보를 수집하여 자녀의 스케줄을 짜고, 아이는 그 스케줄에 맞추어 학원에서 학원으로 전전하며 학력 향상에 전념하고 있다. 교육에 있어 자신의 ‘성취동기’와 ‘자기주도적’인 학습이 매우 중요한 자양분이건만 부모의 극성(?)으로 정해진 목표와, 학원에서 입시를 위해 주입하는 교육이 얼마나 지속적이고 장기적인 교육 효과를 거둘 수 있을지 의심스럽고 안타깝다. 어쨌든 그 지인과 만나 특목고 이야기를 할 때면 늘 떠오르는 제자가 한 명 있다. 처음 ‘중3 담임’을 맡았을 때의 제자 혜진이다.

 
  혜진이...... 트럭 운전을 하는 아빠의 박봉에 공부방 하나 없이, 셋이나 되는 동생들 돌보느라 정신이 없으면서도 1등을 놓치지 않는 모범생이었다. 보통 공부 잘하는 학생들은 공부에 집중하느라 학생들과 두루 어울리기가 쉽지 않은데 혜진이는 달랐다. 아이들은 모르는 것이 있으면 교사보다 혜진이에게 묻기를 즐겨하였고, 혜진이는 친절히 가르쳐 주며, 친구들을 돕는 것을 아주 기뻐했다. 소외된 친구가 있으면 먼저 친구가 되어주었고, 중창, 학생회 활동 등 주어진 자신의 세상을 종횡무진하며 최선을 다하였다. 생각은 어른스럽고, 마음은 아이마냥 순수하고, 행동은 당당하고 야무진. 이 모든 것이 조화되어 있는 혜진이를 보면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가을로 치달을수록 3학년들은 입시공부에 박차를 가하고 원서를 쓰는 시간이 초조하게 다가왔다. 혜진이가 특차 전형인 ‘D 외국어 고등학교’에 응시하고 싶다며 상담을 하러 왔다. 그러나 당시 최고였던 ‘D 외고’는 혜진이에겐 역부족이었기에 나는 ‘H 외고’를 권하였다.
 
  “선생님, D외고는 저에게 벅찬 곳인 줄 알아요. 저처럼 과외도, 학원도 다니지 않은 학생에게 불리한 것도 알고요. 떨어질 각오하고 있습니다. 다만 ‘최고 중의 최고’의 아이들이 도전하는 세계를 경험하고 싶어요. 시험이 얼마 안 남았지만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당찬 혜진이 다운 태도다. 그러나 합격 가능성이 낮은 학교에 원서를 써주는 내 마음은 편치 않았다. 아무리 떨어질 것을 각오했더라도 상처를 많이 받을 텐데...... 그러나 혜진이의 눈은 계속 괜찮다고 힘 있게 웃고 있었다. 그 특유의 당당한 미소는 원서에 도장을 찍게 했다. 그래, 최고의 아이들과 겨루며 네가 겪지 못한 다른 세상을 경험하고 오려무나.
 
  “...... 선생님, 유난히 추운 아침, 엄마랑 ‘버스’를 타고 D 외고에 갔어요. 학교 앞은 고급 승용차 전시장이더군요. 저만 자가용을 타고 오지 않은 것 같았어요. 엄마랑 시선이 마주쳤어요. 그 어느 때보다 저와 엄마는 따뜻한 시선을 나누었어요. 말은 하지 않아도 서로에게 위안을 주는...... 엄마에게 먼저 가시라고 하고, 승용차 사이를 가로질러 아주 당당하게 들어갔어요. 아니, ‘당당해지자…’ 라고 저에게 다짐했지요. 교실에 앉았어요. 문이 열리고 멋진 코트를 입은, 귀족 티가 나는 학생이 걸어오더니 제 앞에 앉았어요. 그러자 주변의 아이들이 그 학생 곁으로 모였어요. 학교는 다른데 모두 아는 사이였어요. 같은 과외 팀이더군요. 딴 세상에 온 기분이었어요. 저 혼자 외톨이가 된 것 같기도 했고요......
 
  역시 시험은 어려웠어요. 교과서만 충실히 해서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어요. 하지만 최선을 다했어요...... 시험을 마치고 나오니 아침과 같이 고급 차들이 즐비했어요. 이젠 놀랄 일도 아니죠. 아침보다는 더 편안하게 승용차 사이를 당당히 걸어 나와 버스를 탔어요. 버스에 앉아 창밖을 보는데 선생님 생각이 났어요. 선생님이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싶어 하는 넓은 세상, 그 세상의 틈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지를 알려 주시고자 했던 선생님...... 제 수험표예요. 다른 아이들에겐 그냥 종이조각이겠지만 저에겐 특별한 의미를 주기에 떼어 왔어요. 선생님께 드리고 싶어서요. 학교와 집만 왔다갔다하던 저에게 다른 세상을 경험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짧았지만 아주 강하게, 더 넓고 치열한 세상을 보았습니다. 언젠가는 저도 그 치열한 세상으로 나가겠지요. 그 때 더욱 당당할 수 있도록 열심히 생활하겠습니다.”
 
  혜진이가 시험을 보고 온 다음날 내게 쓴 편지의 내용을 기억나는 대로 각색해보았다. 위의 양 보다 5배는 더 긴 혜진이의 편지를 그대로 옮겼으면 15세 소녀답지 않은 당당함과 성숙함을 엿볼 수 있었을 텐데 지금 내게 그 편지가 없는 것이 못내 아쉽다. 그렇지만 혜진이로 인한 감동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런 혜진이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아마도 혜진이 특유의 당당함과 끈기로 어떤 분야에서 일하든 ‘최고’를 향해 노력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혜진아, 선생님은 최고를 향해 노력하는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가 있다고 생각해. 첫째 부류는 위만 향해, 오로지 목표를 위로 정해놓고 그곳만 바라보고 가는 사람! 그런 사람은 자기 목표 외의 세상에는 관심이 없지. 보려고 하지도 않고. 오로지 탑(Top)의 자리가 인생의 전부인 양 시선을 뾰족하게 고정시키지...... 둘째 부류는 똑같이 위를 향해 가는 것이 목표이지. 그래서 열심히 위를 향해 가지만 그 목표 외의 세상에도 관심과 애정을 갖는 사람! 그런 사람은 위로 올라가면 갈수록 다른 세상을 더욱 잘 보려 하고, 잘 볼 수 있게 되지. 둥근 세상만큼 넓고 포근한 시야를 가지고.
 
  혜진아, 선생님은 우리 혜진이가 두 번째 부류의 최고자가 되리라 믿어. 그래서 지금도 너 자신과, 또 세상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겠지. 그러나 너의 마음은 늘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보며, 그 누구보다 넓은 시야를 가지려고 노력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된단다. 봄꽃 향기처럼 타인의 마음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면서.
 
  꽃들이 축제처럼 피어나는 아름다운 봄날, 당당함이 배어있는 너의 그 환한 미소가 정말 그립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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