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의 아이들 1막 - 3. 서울에서의 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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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의 아이들 1막 - 3. 서울에서의 재회
  • 김태진
  • 승인 2015.03.09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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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태진 한국문화국제교류운동본부 사무국장(전 맨해튼한국학교장)
  지금은 터널이 생겨 서울에서 동해까지 3시간 50분에 갈 수 있다. 하지만 예전엔 높고 험한 대관령 아흔아홉 고개를 굽이굽이 넘어야만 갈 수 있는 곳이기에 5시간 넘게 걸렸다. 토요일 퇴근길에 곧장 서울로 가도 만 하루를 채 집에 있지 못하고 다시 동해로 출발해야 할 만큼 멀었기에 서울 집에는 자주 오가지 못하고 한 달에 한 번 정도 갔었다. 가족을 뒤로하고 다시 외로이 넘는 대관령, 그곳은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거쳐야 하는 매번의 통과의례였으며, 횟수가 거듭될수록 두렵고 낯설었던 굽이굽이는 동해의 아이들처럼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쓸쓸한 바람이 부는 늦가을, 토요일 퇴근길....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가슴을 싸늘하게 후비고 들어오면서 가족이 모인 식탁이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나는 그 길로 무작정 서울행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리곤 겨울방학이 될 때까지 한 달 동안 매주 서울 집을 오고 갔던 기억이 난다. 그랬기에 서울로 돌아와 가족들과 매일의 생활을 나누니 정말 좋았다. 그러면서도 동해의 아이들이 보고 싶고 그 아이들 생각에 마음 한 구석이 늘 편하지 않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내 옆으로 하나씩 불러 모아 주셨다.
 
  명석이는 교사인 아버지의 전근으로 서울로 오게 되었고, 또 다른 아이들도 하나씩 하나씩 서울로 전학을 왔다. 그래서 내가 근무하는 중학교 바로 옆 고등학교에서 서로 소식을 전하며 생활을 나누곤 했다. 동해에 남아있는 아이들 소식도 전해 들으면서...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선생님. 생일 축하합니다~~”
 
  ‘훅’ 하고 분 케이크 위의 촛불만큼이나 3년 세월은 정말 금방 지나갔다. 뽀송뽀송 예뻤던 여학생들은 제법 숙녀 티가 났고, 까불기만 했던 꾸러기 남학생들은 어느새 의젓한 청년이 되었다. 그리고 가을이 아름답게 물들어가는 10월의 저녁, 내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의대에 들어간 명석이, 약대를 간 소정이, 간호학과를 간 명숙이, 자동차 정비학과를 간 민철이, 영문과를 간 지연이, 신학과를 간 정수, 호텔경영학과를 간 성훈이... 시골의 작은 학교치곤 유난히 똑똑했던 아이들이 많았기에 거의 서울로 대학 진학을 하였다.
 
  “선생님, 내년에는 우리 말고 남자 친구가 축하해 주길 기도합니다…”
 
  모든 아이들의 카드에는 누가 약속이라도 한 듯 그렇게 쓰여 있었고 나는 매해 그러한 카드를 받아야 했지만 어느 남자친구가 이보다 더 뿌듯하고 보람되게 생일날을 꾸며줄 수 있을까?
 
  “선생님, 생일날 저녁 영양가 없이 제자들만 만나고 있으면 어떡합니까?”
  “또 혼자 나오셨어요? 영실이 은철이는 결혼해서 애 낳았습니다...”
 
  매해 제자들의 놀림을 받으면서도 결혼의 절실함보다는 그들과 함께하는 흐뭇함에 나의 가을은 그렇게 보람으로 영글어 가고 있었다.  
 
  김태진 전 맨해튼한국학교장, ㈔한국문화국제교류운동본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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