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엘라의 계곡에 거꾸로 걸린 조기(弔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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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엘라의 계곡에 거꾸로 걸린 조기(弔旗)
  • 이 완
  • 승인 2014.12.15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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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조국의 이상을 믿는 퇴역 군인 아버지는 아들을 설득해 군에 입대시킨다. 명예로운 군인이 되길 바라는 아버지의 기대를 안고 아들은 이라크전에 파병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느닷없이 아들의 탈영 소식이 전해진다. 의문스럽게 실종된 아들을 찾아 나선 아버지는 결국, 국가가 무책임하게 벌인 전쟁의 후유증으로 아들이 허망한 죽음을 맞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폴 해기스 감독의 영화 <엘라의 계곡> 줄거리다.

이 영화는 국가라는 괴물에 의해 희생당하는 힘없는 개인의 참담한 비극을 그리고 있다. 아들 죽음의 실체를 알게 된 아버지는 그동안 조국에 충성했던 자신의 가치관에 혼란을 겪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믿음을 짓밟은 조국에 항의하기 위해 미국 국기를 거꾸로 달면서 영화는 끝난다. 참고로, 미국은 <국기에 관한 법률>에서 ‘생명과 재산에 위험이 예상되는 긴박한 재난을 알리는 신호일 경우에는 예외로 국기를 뒤집어 달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구약성경 <사무엘서>에 등장하는 ‘다윗과 골리앗’이 싸움을 벌인 장소가 바로, ‘엘라의 계곡’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엘라의 계곡에서 무릿매와 돌멩이만 들고 괴물 같은 거인 앞에 홀로선 작은 소년을 생각해보라. 신(神)의 비호를 받는다지만 그 순간, 어린 소년이 얼마나 두렵고 외로웠을지.

올 한 해를 되돌아보면, 우리 국민이야말로 엘라의 계곡에 홀로 버려진 다윗의 모습이었다. 겁에 질린 무능한 왕국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야수 같은 적장 앞에 어린 소년을 내세운 무책임과 침몰하는 배를 눈앞에 두고서도 단 한 명의 생명도 구하지 못한 무능한 우리 정부가 무엇이 다를까. 지난 4월 16일, 맹골수도의 차디찬 바닷물이 304명의 고귀한 생명을 서서히 삼켜갈 때, 우리는 각자 마음속에 대한민국의 재난을 알리는 조기(弔旗)를 거꾸로 달았다. 그날의 비극은 자연재해가 아닌 국가로 인해 야기된 개인의 희생이었다.

그로부터 계절이 세 번 바뀌었다. 하지만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뒤로도 판교 환풍구 추락사고 등 재난의 망령은 끊임없이 우리 주위를 맴돌고 있다. 정권담당자들은 두 번의 선거가 끝나자 세월호 사태를 애써 외면하려는 느낌마저 든다. 대통령의 국회 시정연설에서도 세월호 사태와 유족들을 향한 위로의 말은 단 한마디도 없었다. 관리 능력이 없으면 공감 능력이라도 있어야 할 텐데 그마저도 보이지 않는다는 언론의 지적이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진상규명’ 요구는 유족의 권리이자 인간의 권리다. 국가의 존재 이유는 바로 이러한 국민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함이다. 자식을 잃은 부모들의 절규도 외면한 채 ‘네 탓’만 하다가 세월호 사태 200일이 돼서야 겨우 부실한 특별법에 합의했다. 하지만 진실이 제대로 밝혀질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그것은 그동안 검찰수사와 감사원 감사 결과가 사고 원인과 구조 실패, 정부의 무능한 대응을 제대로 파헤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리는 권력의 동반자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힘을 편드는 것이 법의 생리여서일까.

울리히 벡은 《위험사회》에서 성찰 없이는 위험이 반복되며, 그런 사회는 ‘재앙사회’가 된다고 했다. 통렬한 반성과 철저한 진실규명만이 무능한 정부의 책무를 일깨우는 길이고, 그 길이 제2의 세월호 참사를 막는 길이다. 국민을 위해 국가가 존재한다는 단순한 진리도 잊고 사는 현실이 슬프다. 올해도 저물어 가는데, 국민의 마음에 거꾸로 걸린 조기(弔旗)는 언제쯤 내릴 수 있을까.

이 완 독서신문 책과 삶 편집인

 

<※외부 필진의 기고/칼럼은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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