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영원한 벗 ‘호머 베잘릴 헐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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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영원한 벗 ‘호머 베잘릴 헐버트’
  • 홍미은 기자
  • 승인 2014.10.16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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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버트박사 기념사업회-버지니아 한인회, 헐버트 박사 알리기 공동 협력

▲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와 미국 버지니아 한인회는 헐버트 박사를 미국사회에 알리는데 힘을 모으기로 했다. 사진은 왼쪽부터 홍일송 버지니아 한인회장, 이형모 헐버트박사 기념사업회 고문, 김동진 헐버트박사 기념사업회장.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한국의 영원한 벗 ‘호머 베잘릴 헐버트’ 박사를 미국 사회에 널리 알리기 위해 헐버트박사 기념사업회와(회장 김동진) 버지니아 한인회(회장 홍일송)가 힘을 모으기로 했다.

김동진 헐버트박사 기념사업회장은 15일 홍일송 한인회장을 만난 자리에서 "헐버트 박사가 그 옛날 구미 열강에 한국을 알렸듯 이제 박사의 업적과 한국사랑을 미국 사회와 한인 2세들에게 널리 알려 그 의미를 되새기고자 한다"고 밝혔다.

헐버트 박사(Homer B. Hulbert, 1863. 1. 26~1949. 8. 5)는 미국 버몬트주에서 출생하였으며, 1886년 23세의 나이로 대한제국 왕립 영어학교인 육영공원의 교사로 내한하여 교육분야 총책임자 및 외교 자문관으로 고종황제를 보좌했다.

1905년 을사늑약 후 고종황제의 밀서를 휴대하고 미국 국무장관과 대통령을 면담하여 을사늑약의 무효와 한국의 자주독립을 주장하고자 하였고, 이듬해 ‘한국평론’을 통해 일본의 야심과 야만적 탄압을 폭로하는 등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열사 등이 고종황제의 밀사로 참석하여 각국 외교관 및 언론에 을사늑약의 무효와 국권 회복을 호소하는 데 지원했다.

헐버트 박사는 일제 박해로 귀국하지 못하여 미국에 돌아간 후 40여 년 만인 1949년 7월 29일 대한민국 정부의 초청으로 8·15 광복절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내한하였다가, 일주일만인 1949년 8월 5일 86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평소 ‘한국 땅에 묻히고 싶다’는 소망에 따라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정부는 지난 10월 9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568회 한글날 경축식에서 헐버트 박사를 대신해 증손자인 킴벌 헐버트 씨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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