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길씨에 대한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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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길씨에 대한 추억
  • 물랭호텔
  • 승인 2004.04.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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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5 총선에 관한 뒷 이야기들을 열심히 모니터링하여 보았다.

아래와 같은 결과들이 관심을 끌었다.

. 유권자들의 "내 한표 행사" 정치의식이 굉장히 발전하였다.

. 40대 이전 연령 유권자들이 적극적으로 정치미래에 참여하는 바람직한 현상이 나타났다.

. 50년만에 처음 보는 '선거다운 선거' 결과였다.

. 한국인들은 미래에 대한 변화와 희망, 그리고 좀 더 정의로운 사회.부정부패가 적은 미래 한국사회 구현을 위하여 표를 던졌다.

-추미애씨의 앵벌이식 3보1배 선거운동이 참패하여 한국 정치수준이 달라졌음을 증명했다.

-김종필씨 등의 탈락으로 '세상 교체'가 한국에서 확실하게 실현되고 있다.

-민노당의 10석 국회 진출에 대한 여론은 기대 일색이다.



이야기는 9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선에 출마코자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후배 기자들중 상당수가 반대하는데.."

물랭호텔의 나라식당 한쪽 구석 자리에서다.

몇병짼가의 포도주를 앞에 놓은 식사 자리에서였다.

결국, 권영길씨는 내리 2차례 대통령 선거에 나가 수십만표씩을 받았고, 9년후인 오늘 국회에 진출했다.

권형은 처음 만난 것은 1970연대 초반이다.

그러니까 35년전의 이야기이다.

같은 신문사에서 월급 받는 기자로 일할 때였다.

술자리가 몇번 있었고, 정작 더 얼굴을 자주 대하게 된 것은 파리에서이다.

물랭지기는 다른 회사 주재원으로, 권형은 일간지 특파원으로 일할 때이다.

후에 물랭지기는 회사원 직함을 떠나 파리에서 가게를 하는 신분으로 바뀌었고, 권형은 특파원으로 일하는 10년 동안, 우리는 엄청 포도주를 많이 마셨다.

술 마시기는 물랭지기가 잠깐 서울에 다니러 갔을 때도 이어졌는데, 이틀낮.하릇밤을 두고 마시는 술자리로 임수경양 집에 찾아가서 뉴스를 통해서만 듣고 보던 임양을 만나게 되었던 것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임양이 어릴 때, 권형네가 임양 아버지와 담을 사이에 두고 살던 이웃사촌이었으며, 임양이 어려서부터 권영길씨를 작은 아버지처럼 따르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그때 들었다.

곧 이어 권형은 노동운동에 몸을 담기 시작했고,  그 이후의 권영길씨의 궤적에 대해서는 여러분이 더 잘 아시는 바이다.

다시 9년전의 대선 출마 여부를 놓고 대화할 때로 돌아가서, 물랭지기는 '찬성' 표를 던졌다.

내심으로는 말리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혼란한 정치판에 들어가서 어떻게 감당하려는 것인지...,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권형은 고난 당한 가족사의 회복을 위하여, 부인과 2세들의 명예를 위하여, 그리고 본인의 굳은 의지와 결심을 위하여, 당시로서는 무모하여 보이는 대선 출마에 물랭지기 또한 찬성표를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이, 한국은 너무 변했다.

좋게 변화한 것이다.

35년전이던, 9년전이던, 우리는 민노당이 2004년 4.15 총선에서 한국 정치판에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주체가 될 수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하였다.

그 중심에 우리 권형이 서게 되리라는 것 또한 마찬가지이다.

권영길씨는 이제 본인이 원하던 원하지 않던, 한국 정치의 미래가 두 어깨 위에 얹혀진 상황이 되었다.

권영길씨는 장점이 참 많은 사람이다.

한많은 가족사를 오랜 단계를 거쳐 한국 정치의 미래로 접목시킨 것이 그 모두를 증명한다.

다른 사람의 말을 끝없이 경청하고, 절대로 남의 단점을 말하지 않으며, 그러나 마지막에 단 한마디로 결론을 내어주며...

물랭지기로서는 인생의 가장 어려운 시절에 권형에게 아주 큰 마음의 신세를 진 적이 있다.

그때 권영길씨의 인간됨을 새로이 되새기는 기회가 되었다.

한마디로 '마음이 무한하게 큰 사람'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권형은 신문사 기자.특파원.노동운동의 세개 단계를 거쳐 이제 한국 정치판의 한가운데에 서게 되었다.

'2008년 제 1당.2012년 대권 성취'라는 민노당의 목표도 관심깊게 보았다.

권형 자신의 노력과 인내는 말할 것도 없지만, 한국의 유권자들이 권영길씨 같은 사람을 국회로 진출시킨 오늘 한국의 정치의식 풍토에서 물랭지기는 한국의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꿈을 꾸어보았다.

한국의 정치판이 여기까지 오는데, 왜 이렇게 많은 시간이 필요하였을까?, 하는 질문도 던져 보았다.


(*)


권영길씨의 정치적 소신이 프랑스에서 키워졌다는 것은 이미 일간지를 통하여서 꽤 소개되어진 바이다.

권형의 특파원 시절, 텔레비젼 3대를 켜놓고 뉴스를 모니터링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아마도 그 습관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리라.

국회에 진출하면 언론.매스컴 관련 개혁에 앞장 서겠다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이 또한 본인이 잘 알고, 또 그 필요성이 중차대한 마당에 기대되는 바가 크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5년만 국회에 일찍 진출하였더라면..., 하는 아쉬움이다.

그러나 정치는 현실.

이제 권영길씨 앞에는 10년의 세월이 남아있다.

새 한국 정치판 만세!

특히 '미래 한국의 주인' 젊은 세대들의 기대가 권영길씨 두 어깨에 쏱아지고 있다는 현실이 한편 두렵기도 하다.

그러고보니, 도대체 그동안 한국의 정치인들은 무엇을 한 것인지...

내일의 한국을 위하여 오늘의 한국은 할 일이 얼마나 많은가를 새삼 느낀다.


(**)


결과적으로 권영길씨와 민노당은 3김 정치를 마감시킨 장본인들이다.

YS 말기 때 노동법 반대로 권영길씨는 명동성당 투쟁을 거쳐 옥살이를 하여 YS 정부의 퇴장의 마당에 한가운데에 서있었다.

이번 4.15 총선을 통하여서는 DJ의 분신 민주당 몰락, JP 퇴장 등으로 한국정치의 새 장을 열게 한 주인공들이 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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