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나 탈북했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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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나 탈북했시요"
  • 미주 한국일보
  • 승인 2004.02.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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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아버지는 북한에 계시고 저는 남한에 왔습니다."

며칠 전 한국에서 불쑥 걸려온 전화 한 통화에 LA 한인타운 윌튼길에 사는 한재원옹(82)은 큰 충격을 받았다. 전화기로 흐르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북한을 탈출했다는 손자. 한국 전쟁 때 평양에서 처자식과 기약 없는 이별을 한 후 50여년. 한옹은 한번도 손자 얼굴을 본 적이 없지만 서로의 기억은 퍼즐 맞추듯 일치했다. 시시콜콜한 가족사까지 꿰고 있는 전화 속의 목소리에 한옹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손자 한모군은 지난해 8월 혈혈단신 북한을 빠져 나와 중국을 거쳐 한국에 도착했다. 어릴 적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한국에 있다는 할아버지를 찾아 나선 것은 당연지사. 그러나 한국 땅 어디에서도 할아버지를 찾을 수 없었다. 실의에 빠져 있던 한군에게 할아버지가 미국에 살아 계신다는 희소식이 날아들었다. 할아버지 한옹이 대한적십자 이산가족 상봉센터에 남겨 놓은 자신의 연락처가 이들의 만남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90년 미국으로 이민 온 할아버지의 연락처는 바뀌고 한군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사방에 도움에 청했다. 평소 한군을 돌봐주던 부산 사상경찰서 소속 경찰관이 한군의 사정을 부산 수영로교회 박윤성 목사에게 털어놓았고, 박 목사는 오렌지카운티 제일장로교회 이기영 목사에게 도움을 청해 본보 등에 할아버지를 찾는다는 광고를 냈다.
이 광고를 봤다는 한옹은 "믿을 수 없었지. 내 새끼 얼굴도 가물가물한데, 손자라니…"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분단 50년에 묻힌 말못할 이산의 개인사연이 드러나는 것이 내키지 않는 듯 사진 찍기를 거절한 할아버지는 "나 내일 손자 보러 한국 가야 한다니깐. 말할 시간 없어…"라며 23일 오전 고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태평양을 건넜다.

입력시간 : 2004-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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