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평아, 어찌 네가 오지 않니? 내가 아직 할 말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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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평아, 어찌 네가 오지 않니? 내가 아직 할 말이 남았다”
  • 이현아 기자
  • 승인 2010.08.19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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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동포 역사 기록하는 용정조선족문화관 김광평씨

몇해 전 함경북도 출신 중국동포 김옥자 할머니는 결국 고향땅을 밟아보지 못한 채 숨을 거뒀다. 김 할머니가 사망 직전까지 용정 조선족 문화관의 김광평씨를 찾았다는 전언이 뒤늦게 빈소를 찾은 김씨에게 유언으로 남았다.

김씨는 김할머니의 기억을 떠올리며 끝내 눈물을 떨궜다. 그 역시 1944년 연변 돈화에서 태어난 중국동포다. 어린 시절 가난 때문에 오른쪽 눈을 실명했다는 김광평씨의 왼쪽 눈동자에만 발갛게 눈물이 맺는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일주일이 지나서야 할머니를 찾아뵀어요. 그새 돌아가셨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죠. 친구 분이 제 팔을 붙잡고 김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날 찾았다고 울며 말씀하시더군요. 땅을 쳤어요. 내가 왜 좀 더 빨리 찾아오지 않았나, 내가 왜 돌아가시기 전에 한 말씀이라도 더 기록해두지 못했나, 하고요.”

김광평씨가 김옥자 할머니를 생전에 만난 것은 3,4회 정도다. 하지만 아무리 쏟아내도 할 말이 더 남았다는 김옥자 할머니의 아쉬움은 쉽사리 김광평씨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렇게 남은 회한이 김광평씨가 지금 하고 있는 조선족 역사 기록의 작업을 계속하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광평아 네가 어찌 오지 않니. 내가 아직 할 말이 남았는데’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하셨다는 말씀이 귓전에 남아 있어요. 그걸 생각하면 잠시라도 쉴 수가 없어요.”

그 이후로 김광평씨에게는 쉬는 날이 없다. 그가 타고 다니는 오토바이의 주행기록이 4만5,000㎞를 훌쩍 넘어섰다. 그의 자동차는 그 배가 되는 거리를 달렸다.

김광평씨의 다리에는 조선족 노인들을 급히 찾느라 서둘다 피하지 못한 사고의 흔적이 훈장처럼 남아 있다. “한 분을 만나 이야기를 들으면 또 다른 한 분을 일러주십니다. 그 분을 찾아 또 달려가죠. 오늘 돌아가실지 내일 돌아가실지 기약이 없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제가 한 시라도 쉴 수가 있겠습니까. 이분들의 서러운 기록이 하릴없이 사라지게 둘 수는 없지요.”

새카맣게 탄 얼굴에 한 쪽 어깨가 주저앉을 정도로 무거운 카메라 가방을 둘러맨 김광평씨. 그 또한 초로의 몸 여기저기가 성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곳곳의 조선족 역사를 찾는 일에 잠시의 주저함이나 망설임이 없다. 본인의 입으로 “미친 짓이죠”라며 허허 웃는다.

70년대 용정지역 홍보 관원으로 일하게 되면서부터 지긋지긋한 농사일과 가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는 김광평씨는 생전 처음 접하게 된 카메라를 통해 새롭게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생겼다.

그에게는 한민족 누구에게나 낯설지 않은 배움에 대한 절절한 욕망이 있었다. “도시 관청에서 일하며 공부하며 사진을 찍었어요.” 그 열정이 헛되지 않아 공무원으로서의 그의 이력은 탄탄대로였다.

“용정시 교육부에서 저를 데려가려고 미리 내정한 상태였는데 문화체육부에서 저를 나꿔채 간 거죠.” 운명처럼 용정시 문화체육부 관장이 된 일에 대해 그는 이렇게 술회한다.

그가 맡게 된 일은 용정시내 문화 관련 종사자들을 교육하고 그들의 자료를 수집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1991년 김광평씨는 안정된 공무원 자리를 박차고 나선다. 공무원으로 일하며 접하게 된 그 지역 조선족의 지난한 역사가 그의 옷소매를 잡아 당겼기 때문이다.

“그 일대에 조선족이 많아요. 그들의 문화를 기록하는 것도 제가 해야 했던 일이죠. 수년간 그 일을 하다보니 내가 이럴 때가 아니구나, 싶더라구요. 지금도 쉴 새 없이 그 기록의 산증인들이 돌아가시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게 뛰어들었습니다.”

김광평씨는 차분하게 자신이 조선족 역사 기록 수집에 나선 동기를 설명했다.

현재 그는 한반도 전역에서 일제에 의해 강제로 집단이주된 조선족 부락 및 개인의 역사를 수집하고 있다. 그렇게 기록되고 있는 역사는 향후 조선족 문화 및 역사를 연구하는 데 소중한 자료로 사용될 터다.

“용정시 역사 기록 어디에도 조선인 집단이민에 대한 한 마디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중국 전역에 그렇게 많은 한민족이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뿌리를 내렸는데도 말입니다.”

그는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져가는 한민족 집단이민의 서러운 역사가 못내 아쉽다.

“무주에서 집단이민을 온 정해일 씨는 여기에 와 살 집을 짓자마자 고향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반세기가 지나서야 아버님 산소를 찾는 길에 동행했어요. 그렇게 서럽게 우시더군요.”

고향을 등진 사람들, 가족과 생이별한 사람들, 이민자라는 차가운 시선 속에 꿋꿋이 삶의 뿌리를 내린 사람들의 안타까운 기록이 오늘도 김광평씨의 손끝에서 한민족의 역사가 돼 써내려지고 있다. 14일 중국 길림에서 만난 김광평씨는 독립기념관에서 오신 분과 만날 약속이 돼 있다며 총총히 사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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