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한민족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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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한민족이 산다
  • 이현아 기자
  • 승인 2010.08.19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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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촌 건립 프로젝트 진행하는 조선족마을 ‘알라디’

절절 끓는 아랫목, 봉당에 얹힌 신발 한 켤레, 가지런히 이어지는 서까래. 바람이 일면 바람이 이는대로, 비가 오면 빗방울이 듣는대로, 자연 속에 사는 집, 바로 우리네 한옥의 모습이다.

중국 길림성 외곽에 차로 한 시간 거리 알라디마을에는 번듯하게 외관을 갖춘 한옥 십여채가 마을 한 가운데에 그림처럼 들어섰다. 비록 그 내부는 아직도 공사가 한창이라지만, 초가나 기와를 올린 집들 사이사이로 한국식으로 가꾼 채마밭을 걸어가노라면 여느 한국 시골의 한옥집 마당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한옥마을 건설로 제 2의 르네상스를 꿈꾸고 있는 조선족 촌락, 알라디마을. 거기, 온돌을 깔고 한옥을 짓는 우리 동포가 산다.

70년대 길림 경제발전 이끈 알라디마을

중국 시간으로 13일 오후, 알라디마을에서는 작은 언쟁이 벌어졌다. 당장 다음날 50여명의 방문단이 이곳을 찾아 구들 놓는 작업을 하기로 돼 있는데 미처 필요한 돌들이 모두 준비되지 않은 것이다.

한쪽에서는 “철골물로 대체할 수 있잖소”하는 의견이 나온다. 한국에서라면 당연히 그렇게 할 일이다. 그러나 중국의 사정은 다르다. “중국은 철골 자재 가격이 비싸요. 한국이랑은 사정이 다르지.” 김준봉 국제온돌학회 학회장의 설명이다.

자재의 시세 뿐만 아니다. 규격이며 종류까지 한국에서와는 전혀 다른 외부 사정들 때문에 한옥마을을 지어 올린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니 알라디마을 주민들이 뒷짐을 진 채 한국에서 온 이 사람들이 도대체 무엇을 하려는가 싶은 눈으로 호기심을 빛내고 있다.

알라디마을에 실습기지를 세운 국제온돌학회는 2010 학술행사 중 하나로 알라디마을 한옥 중 한 채에 우리의 전통 온돌(고래)을 시공했다. 모처럼 한국에서부터 찾아온 반가운 손님을 맞이하느라 조용했던 알라디마을은 체험단이 머무는 내내 떠들썩했다. 여전히 한국어를 사용하고, 한국식 풍습에 따라 생활하는 이들 알라디마을 사람들은 한국에서 온 방문단이 반갑고, 또 반갑다.


온돌시공이 한창인 한옥마을을 빠져나와 주민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가봤다. 김미옥 할머니(가명·62세)는 옆집 친구들과 함께 마작에 한창이다. 딸 둘에 아들 하나는 모두 한국에 나가 있고, 남편은 10여년 전 사망했다. 홀로 정부보조금과 자식들이 보내오는 용돈으로 생활하고 있다.

할머니 본인은 중국에서 나고 자란 동포 2세지만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 “이제는 조선족이 많이 없지. 다들 한족들에게 새를 주고, 외지로 나가 버렸어. 옆에 두 집도 한족들이 사는 집이야.” 고작 수십분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 벌써 정이 들어 버린 할머니는 대문까지 나와 손을 흔들었다.

일제시대 경상북도 주민들 수십명이 이곳 알라디마을에 자리를 잡았다. 길림 뿐 아니라 장춘, 연길 등 조선족 부락을 이룬 곳이 적지 않았다. 그 중 알라디마을에 유독 위세를 떨치던 시절이 있었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극에 달했던 이 마을에 위세는 대단했다”는 황유복 중앙민속대 교수의 설명이다.

태어난 지 7개월만에 고향인 안동 땅을 등지고 이곳 알라디로 왔다는 정승만 할아버지는 70년대부터 10여년간 중흥기를 이뤘던 알라디의 찬란한 시절을 기억하고 있었다. “중국 전체 부락 중 100대 모범마을로 수차례 지정이 됐지”라는 정 할아버지는 “상을 받은 건 셀 수가 없을 정도라니까”라며 자못 눈빛을 빛낸다. 할아버지 역시 6명의 자녀를 모두 한국으로 보내고 홀로 마을을 지키고 있다.

“공업도시인 길림이 70년대에 접어들면서 우리 식으로 치자면 ‘새마을운동’과 비견할만한 경제 개발 사업을 펼쳤어요. 그때 알라디에 벽돌공장이 들어서 길림에 필요한 벽돌 대부분을 제공했죠.” 황유복 교수의 설명이다.

알라디마을은 길림 지역 경제 부흥을 이끄는 근면함과 성실함으로 중국 전체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때 정점을 찍은 알라디 마을의 위세는 한때 700호를 넘겼던 가구수로 설명된다.

당시 3,000여명의 조선족이 모여 살았던 알라디마을. 그러나 개혁개방 후 많은 조선족 주민들이 마을 외곽으로 빠져나가면서 현재는 500여명의 조선족 주민만이 남았을 뿐이다.

과거의 융성했던 시기를 자랑처럼 간직한 알라디마을에 새로운 도전이 시작된 것은 지난 2009년이다. 알라디마을이 속한 용담구 정부는 알라디 마을에 총 2억여원의 투자금을 들여 한옥민속촌 건립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제 1기 공사가 중국인들의 손에 지난 11월 마무리됐다. 단순히 한옥마을 건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학교, 복지회관, 상업구역 등 마을을 탈바꿈시키는 대규모 프로젝트다.

“과거 경제발전을 이끌었던 알라디마을의 역사적 가치를 극대화시키는 의미의 프로젝트”라고 황 교수는 설명한다.

중국 정부가 소수민족 문화 보존에 배타적이라는 편견이 있던 터라 조심스럽게 중국 정부의 또 다른 진의가 있는지를 물었다.

황 교수는 “오히려 중국은 소수민족의 문화를 존중해 이들을 적극적으로 포용하려는 편”이라고 말한다. 더욱이 경제발전의 훌륭한 본보기를 보였던 알라디 마을에 대해 중국인들이 갖는 애정은 각별하다.

알라디마을, 두 번째 도약을 꿈꾼다

구들놓기 체험단이 마을에 들어선 날 마을에는 온통 흙파는 소리, 돌 나르는 소리가 시끌벅쩍하다. 각종 카메라를 짊어진 취재단 십여명이 벌써부터 한옥마을 입구에 진을 치고 취재가 한창이다.

알라디마을의 한옥촌 건립 소식은 인근 지역 주민들의 관심사이기도 하다. 알라디마을이 과연 과거의 경제 부흥을 이끌던 모습을 되살릴 수 있을지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것이다.

소란한 상황 속에서도 구들놓기 체험단의 손길은 차분하게 분주하다. 물에 시멘트와 흙을 개고, 이를 집안으로 옮기는 이들의 움직임에는 잠시의 쉼도 없다.

이렇게 알라디마을의 한옥촌이 조금씩 모양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꼼꼼하게 뜯어보면 여전히 한국의 전통가옥과는 다른 부분들이 있어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벽으로 돌아가며 낸 유리창이나, 따로 봉당이 없이 실내의 복도로 방문을 다시 열고 방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 구조가 그렇다.
황유복 교수

알라디마을 프로젝트는 건축인들에게는 또 다른 실험이다. 지난 해 한옥촌 건립에 들어간 중국 정부는 이를 보다 구체화시키기 위해 황유복 교수의 자문을 구했다.

황 교수는 한국 현지에서 한옥과 관련한 다양한 전문가들을 중국으로 불러 들였다. 북경공업대학교 김준봉 교수는 황 교수가 사사한 제자다. “처음 여기 와서 중국사람들이 지어 놓은 한옥을 보니 기가 막히더군요. 하나부터 열까지 다시 손을 봐야 하는 부분이 많았어요.” 당시의 소회를 김 교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러나 김 교수는 이내 그 같은 생각들이 새로운 시작의 단초가 됐음을 고백한다. “그렇게 일을 하다 보니까 이것이 우리에게는 얼마나 새롭고 도전적인 경험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들의 눈을 통해 우리가 보지 못했던 부분, 생각하지 못했던 시도들을 할 수 있으니까요.”

전통 한옥이 가진 멋스러움과 장점들을 고스란히 살리면서 현대에 맞지 않은 각동 한계들을 과감하게 탈피한다. 그것이 한국의 전통 한옥 전문가들이 녹록치 않은 현지 사정에도 불구하고 알라디마을 한옥촌 건립에 몰두하는 이유다. 그렇게 건립되고 있는 알라디마을의 한옥은 무엇보다 ‘삶’을 목적으로 한다.

“조선족 마을을 재건하려는 여러 시도가 있었지만 그 결과가 모두 좋지는 않았습니다. 알라디 조선족의 문화를 복원하고 그들의 생계를 책임질 수 있는 지속 가능한 사업을 개발하는 데에 이번 프로젝트의 궁극적인 목표가 있습니다.” 황유복 교수는 이번 사업이 전시용 한옥촌을 만드는 데 머물지는 않는다고 강조한다.

한민족의 전통 콘텐츠를 갖고 삶이 꾸려지는 마을로서 역할하게 될 알라디마을의 새로운 도전이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마을 주민들은 온돌을 놓으러 온 체험단에게 돼지 한 마리를 잡아 대접했다. 늦은 밤 마을을 빠져나오려니 “살피꽃밭 가득 살살이꽃 / 욜그랑살그랑 흔들리고 있었습니다”라는 어느 시인의 노래처럼 벌써부터 코스모스가 하늘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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