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에서 독도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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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에서 독도를 만나다
  • 김문백
  • 승인 2010.07.13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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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김문백 재 캄보디아 한인회 회장
캄보디아 프레아 비히어 사원
지금 이 시간에도 세계 여러 나라에서 크고 작은 영토 분쟁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다. 역사적인 맥락과 정치, 경제적 이유로 각국은 한 치의 양보 없이 대립하고 있다. 현재 지구상의 분쟁 지역 대부분의 분쟁이 지난 19~20세기 초반의 제국주의와 식민지 시절에 대부분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캄보디아와 태국의 접경 지역에 위치한 ‘프레아 비히어’도 그 중에 하나이다. 최근 이 캄보디아 사원이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을 자축하는 2주년 기념 행사가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에서 열렸다.

비슷한 시기, 때마침 시간이 나 새벽녘 프놈펜을 출발, 차로 반나절을 달려 프레아 비히어 지역에 도착했다. 현재 이 사원은 국제 실정법상 캄보디아의 영토에 속해 있다. 하지만 캄보디아쪽은 천길 낭떠러지이며 주 진입로는 태국쪽으로 나아 있어 아직까지 영유권을 두고 양국간 논란의 대상으로 남아왔다. 캄보디아쪽 출입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 케이블카를 설치하는 방법도 논의가 되었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보류된 상태이다.

따라서 현재로선 이곳에 가기 위해서는 험난한 산악지대를 거슬러 올라가거나 우회하여 태국 국경을 넘어 비자를 발급 받고 태국쪽 진입로로 다시 들어와야 한다. 나는 시간 관계상 태국 국경을 통한 진입로 길을 선택했다.

역사적으로 고증해보면 프레아 비히어 사원은 태국과 캄보디아 국경에 위치한 크메르 유적으로 10~12세기 걸쳐 크메르 제국이 건설한 사원이다. 십 여년 전까지만 해도 캄보디아 내전의 후유증으로 한 때 출입이 금지되었던 곳이나, 1998년부터 관광이 본격 허용되었다.

이 곳의 건축양식과 규모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인 앙코르 와트의 규모에는 못 미치나, 크메르인들의 예술적 재능과 솜씨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경내에서 바라보는 전망 역시 압권이다. 해발 650m를 넘는 산꼭대기에 위치해 있어 캄보디아 대평원이 저 멀리 지평선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산꼭대기에는 태국 동북부의 국경과 캄보디아를 구분 짓는 돈락크 산맥의 주봉이라 그 경관이 단연 으뜸이다.

그런데 수 십년간 비교적 잠잠하던 이 아름다운 사원을 둘러싼 소유권 싸움이 다시 불붙은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이는 지난 2008년 7월 프레아 비히어 사원이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정식 등재, 캄보디아 소유로 공식화 되었기 때문이다.

이 소식은 태국 전역을 벌집 쑤시듯 뒤집어 놓았다. 이에 반발하는 승려를 포함한 태국인 시위대 3명이 국경을 넘었다는 이유로 캄보디아 당국에 붙잡히기도 했다. 이를 핑계 삼아 태국이 군대를 이 지역에 배치했고, 캄보디아도 이에 대항, 병력을 투입했다.

양국간 감정이 극에 달하던 지난 2008년에는 양국이 배치한 병력이 최대 4,000여명에 달한 적도 있다. 유엔의 지원을 바라던 캄보디아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소집을 공식 요청하기까지 했다.

프레아 비히어가 있는 지역 일대는 1953년 캄보디아를 물러날 때까지 프랑스가 실효적으로 점령하고 있는 땅이었다. 그들이 떠나면서 원래 캄보디아 땅이었던 곳에 별 생각없이 대충 국경선을 그어버리는 바람에 얼떨결에 태국 땅으로 되어 버린 것이다.

이에 신생 독립 국가인 캄보디아가 미쳐 손을 쓰기도 전애 차리기도 전에 태국은 프랑스가 만든 엉터리 국경 구획 지도 한 장만을 가지고 사원 일대를 독차지해 버렸다.

그 후 10년 가까이 지나서야 겨우 사태를 파악하한 캄보디아 정부가 뒤늦게 반발, 1962년 국제사법재판소를 찾았다. 결과는 예상대로 캄보디아의 승. 하지만 태국도 순순히 굴복하지는 않았다. 사원은 돌려줬지만 주변의 땅은 내놓지 않았다. 이후 소소한 분쟁이 수면 아래 있다가 지난 2008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따라 폭발한 것이다.

사실 프레아 비히어는 1962년 국제사법재판소에서 9 대 3으로 이미 캄보디아 측의 손을 들어준 지역이다. 이미 법적으로 끝난 문제임에도 다시 이 문제가 국제 분쟁으로 다시 이어지게 된 이유는 바로 이 사원이 동남아시아 크메르 제국의 찬란했던 역사를 보여주는 역사적 유물로서, 그 주변경관이 워낙 빼어나 많은 관광객들이 찾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인정하는 세계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순히 양국의 사원 분쟁은 관광 수입과 자원 등 경제적 이유 등 표면적인 이익 때문만은 아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영토 분쟁은 자국민의 피를 끓게 한다. 곧바로 국내 정치의 문제로 연결되는 것이다. 그런데 유네스코가 분쟁이 뻔히 예상되는 지역에 무리하게 캄보디아 소유라는 ‘도장’을 찍어준 것도 일견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통상적으로 세계문화유산을 등재할 때, 유네스코는 국경 지역이나 다툼이 예견되는 유산에 대해서는 양국의 합의를 전제 조건으로 내세우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과 2년 전인 2008년 7월 여름, 돌연 태국 연립정부가 이 곳이 캄보디아의 문화재라는 것을 지지하는 공식성명을 전격 발표했다. 태국의 노빠돈 빠따마 외무장관이 양국간 공동성명에 서명까지 했다.

결과적으로 그것이 유네스코 등재를 가능하게 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이후 태국 헌법재판소에서 태국-캄보디아의 공동성명에 서명한 외무장관의 행위는 위헌이라는 판결까지 나왔다. 가뜩이나 인기 없던 집권 연정은 더욱 국민의 지지를 잃어갔고, 사막 총리가 권좌에서 물러나는데 결정적 빌미를 제공하였다.

반대로 캄보디아에서는 분쟁 지역이던 곳에 국제기구의 승인을 받아 ‘국민의 자존심’을 세워준 현 정부의 인기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결국 2008년 그 해 캄보디아 총선에서 1985년 이래 23년째 집권하고 있던 훈센 총리가 80% 이상의 압도적 지지로 무난히 총리직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이 대목에서 의심이 가는 부분이 있다. “왜 태국 총리가 ‘주권 포기’라는 비판까지 무릅쓰며 캄보디아에 유리한 행동을 했을까”하는 점이다. 추측성 루머가 하나 있다. 이른바 ‘탁신 전 태국 총리 연계설’이다. 탁신이 집권 당시 캄보디아에서 대형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있는데, 이를 위해 프레아 비히어를 양보했다는 설이다.

실제로 태국 전 총리 탁신은 쿠데타로 망명하기 전인 2007년 5월 훈센 캄보디아 총리를 만나 대규모 자본을 투입, 태국 국경에서 가까운 캄보디아 코콩주(州)에 금융지구, 항구 등을 갖춘 신도시를 건설하기로 합의한 적이 있다.

또한 공동성명으로 물의를 일으킨 노빠돈 외무장관 역시 탁신 총리의 자문 변호사 출신이다. 정황상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연계설이다.

국경 영토 분쟁이 본격화된 2008년 이후 최근까지도 양국 진영간의 크고 작은 전투가 빈번히 발생했고, 십여 명 이상의 군 희생자들을 만들어내는 등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 상황까지 치닫기도 했다.

하지만, 얼마 전 태국이 반정부소요사태로 국민들의 관심이 온통 자국내 문제로 쏠리면서, 양국간의 격한 감정이 상당히 누그러진 듯하다. 이를 입증하듯 최근 프레아 비히어 주변의 모습은 우리에게는 혼란을 느끼게 할 만큼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가는 길에 우연히 만난 슬리퍼와 운동화 차림에 여유로운 표정을 한 병사들이 태국 군인과 서로 농담을 주고받고 있는 모습이 놀랍기만 했다. 한국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 의 한 장면이 순간 떠올랐다.

프레아 비히어 사원의 계단을 오르며, 나는 다시 한번 독도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세상 모든 일 그렇듯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다양한 접근 방식이 있다. 그중엔 과거 영국이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벌였던 포클랜드 전쟁같은 극단적인 무력시위로 영토를 쟁취하는 방법도 있다.

그렇지만, 적어도 우리가 동북아지역의 영구적 안정과 진정한 평화를 원한다면 물리적 충돌과 같은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일본이 걸고 넘어 질 때마다 일일이 대응하고, 매 사안마다 일희일비 (一喜一悲)하는 것도 자제해야 한다.

우리는 보다 냉정하고도 체계적 대응이 필요하다. 감정에 치우쳐 일장기를 태우고, 일본대사에게 돌을 던지는 등 극단으로 치닫는 것은 국제사회에서 지지는 커녕, 실리는 물론 명분마저 잃는 우를 범할 소지가 높다.

독도와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 등에 대해서도 적극적이되 차분하면서도 장기적 전략 차원에서 접근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히 양국 간 교류의 기초를 허물어뜨리고, 일본 우익에 명분을 주는 행동은 절대로 피해야 한다. 일본 상품 불매 운동이나 일본인의 골프장 출입금지 조치 역시도 사실상 전략적 대응으로 보기 상당히 어렵다.

편협한 역사관이 결국 자기 발등을 찍는 일임을 일본이 깨닫도록 하는 유연한 대응이 요구된다. 그러자면 들끓는 국민감정을 일본 등 외국 시민단체와의 연대활동이나 정부·시민단체 간 유기적 연계로 승화시키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그동안 그래왔듯이 독도가 한국 땅이라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국제사회에 알리는 작업도 중요하다. 눈치 보지 않고 국제 사회에 당당히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만큼 우리 정부가 외교적 역량을 키우는 일 역시 우리 국민들이 진정 바라고 있는 바 이다.

온몸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마침내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프레아 비히어 사원 정상에 올라섰다. 이런 저런 상념에 답답하던 차에 상쾌한 공기가 가슴속 폐부까지 들어온 느낌이다. 고개를 들어 저 멀리 지평선 끝까지 펼쳐진 캄보디아의 광활한 대평원을 내려 다 보았다. 그 너머로 갈매기 날고 푸른 바다 넘실대는 바다 한 가운데 아름다운 섬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의 땅 독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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