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한인 1세들과 같은 운명은 인류역사에 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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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한인 1세들과 같은 운명은 인류역사에 더는 없다
  • 새고려신문 =안춘대 기자
  • 승인 2010.03.29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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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에 우리는 광복 65주년을 기념한다. 그와 관련하여 필자는 사할린한인계 과거사를 연구하는 사할린주한인노인협회 고문 정태식 사할린주한인이중징용광부유가족회 사무장과 만났다.

- 선생님께서 사할린에 오시던 이야기를 좀 해 주세요.

- 1943년, 내가 13살였어요. 어머니가 <조선에서 살기 힘드니까 아버지한테 가자>고 했어요. 때마침 아버지가 일하시는 니시사쿠탄(보쉬냐코워)에서 가족모집하러 왔다는 소식이 났었어요. 그래서 어머니가 며칠 동안 수속해서 어머니, 형님(16살), 나(13살), 여동생(8살) 4명이 배를 타고 오는 동안 아이들, 여자들은 배멀미를 해서 아무것도 먹지도 못하고 큰 고생을 했어요.

니시사쿠탄에 도착한 가족들을 클럽에 데려갔어요. 여기서 환영식이 있었죠. 그 클럽 건물이 아직도 있어요. 일본사람들이 각 가정에 집을 지정해주었어요. 여긴 전기도 있고. 어린 마음에 썩 든 것은 감자입니다. 9월 말에 우리가 왔으니까 우리보다 먼저 들어온 분들이 감자를 캐놓았어요. 여기 감자가 한국 고구마 같아요. 그래서 여기가 좋다고 생각했지요, 어린 마음에.

- 그때 부모들이 식품을 어디에서 구입했어요?

- 우리 아버지가 1939년에 니시사쿠탄 미쓰이 탄광으로 모집되어 힘들게 일을 했어도 노임을 현금으로는 못받았어요. 미쓰이 탄광에 광부들을 위한 상점이 따로 있었고 회사에 가족이 몇 명이라는 정보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쌀·간장·된장을 사면 전표가 회사 회계부에 들어갔어요. 거기서 식품값을 저금통장에서 감했지요. 저금통장을 탄광주인이 갖고 있었어요.

그리고 학생들을 비롯 누구나 할 것 없이 의무적으로 <애국저금>을 해야 했어요.

적립저금이 또 있었어요. 모집온 사람들은 이런 저금을 다 했어요. 2-3년 기한이 끝나면 저금을 내준다고 했지요. 이것이 바로 우리 1세들의 강제저금이라는 것입니다. 일본 사람들이 이 저금에서 한푼도 아무에게도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2-3년 기한이라던 것이 67년이란 세월이 흘렀잖아요.

- 어디에서 해방을 맞이하셨어요? 그 당시 선생님께서 계시던 곳의 상황을 잘 기억하시겠죠?


- 보쉬냐코워에서 해방을 맞이했어요. 남자들은 이중으로 징용당해 큐슈로 다 갔기 때문에 여자·어린이들만 촌에 있었어요. 여긴 전투가 없었어요. 단지 한번 폭격이 있었어요. 소련비행기가 폭탄을 탄광 광장의 집에 투하했어요. 우리가 피난갔다 돌아와 보니 광장의 집이 파괴되어 없어져버렸어요.

인명희생은 없었어요. 소련비행기가 일본인들을 놀래주려고 한 것 같아요.

소련군이 8월 18일에 우리가 있는 곳에 왔어요. 소련군을 보고서야 우리는 일본이 패전했다는걸 알게 됐어요.

일본 사람들은 끝까지 거짓말을 했어요. 일본이 전쟁에서 졌지만 일본사람들은 믿지 않았어요.

소련 장교들은 군복을 곱게 차려입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입은 옷은 형편없었어요. 힘든 전쟁을 해서 그렇겠죠. 마호르카(매운 담배)를 신문종이에 말아 피우는 것을 처음 봤어요. 마호르카는 주머니(담배쌈지)에 넣어 허리에 차고 다녔어요.

처음에 조선사람들은 소련사람들이 깨끗하다고 생각 안했어요. 우리는 집안에서 맨발로 다니고 장판을 깨끗이 닦고 거기에 이부자리를 마련하는데 러시아인들은 밖에서 신던 신발채로 방안에 들어갔어요. 잘때만 신발을 벗었어요. 지금은 모두가 모전을 장판에 깔고 벽에 걸어놓고 살잖아요.

- 부친과 형님이 이중징용당해 일본으로 연행되었다가 다시 가족을 찾아오셨다죠?

- 부친과 형님이 1944년에 구주섬으로 이중징용연행됐어요.

어려운 생활이 더 어렵게 됐어요.

일본이 패전한 후 1945년 8월 30일에 징용해제가 됐습니다. 그런데 일본사람들이 '사할린에는 아무도 없다. 남자들은 시베리아로 강제연행됐다. 가도 친척을 못찾는다.'이런 선전을 했어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죽으나 사나 처자식을 찾겠다고 강하게 결심한 사람들은 도둑배를 타고 사할린으로 돌아왔어요.

아버지가 돌아오신 날짜가 1945년 11월 6일이에요. 그 날짜를 내가 잘 기억하고 있어요. 그때 소련이 시월혁명 28주년(1917년 11월 7일-시월 혁명의 날. 기자 주.) 기념준비를 했어요. 그날 따라 눈이 내렸어요. 헌 작업복 같은 것을 입은 어떤 사람이 들어오는데 나는 아버지이신줄도 몰랐어요. 알아볼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어머니가 문 앞에 나가시더니 갑자기 울고불고 하잖아요.… 아버지가 돌아왔어요.

"너희들 잘 있었니?"하고 아버지가 물어봤어요. 그날 울기도 하고 웃기도 했어요.

- 선생님의 형님은 부친과 함께 사할린으로 왜 돌아오시지 않았습니까?

- 형님(17세)은 당시 장가도 들지 않았고 고향에는 조부모님들이 계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형님이 삼촌과 함께 조부모님이 계시는 고향 경북 의성군 안평면 대사동으로 우선 돌아가 있으면 아버지는 사할린에 와서 어머니, 동생들, 그리고 삼촌 가족들 모두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오겠다고 약속하고 큐슈탄광에서 이별했습니다. 이것이 1945년 9월 초였습니다. 그후 1983년까지 우리 형제들의 소식은 서로 모르고 살았잖아요. 1983년에 겨우 형님의 친필 편지를 받고 나는 형님과 상봉하려고 애써 1986년 10월에야 그것도 성취되었습니다. 부친은 직업병으로 1968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후에 나는 모자 상봉을 시키기 위하여 노력하였는데 1989년에야 겨우 어머님과 우리 가족 아들을 데리고 한국을 방문하여 우리의 한평생의 소원을 풀게 되었습니다.

형님부부 역시 1994년 가을에 우리가 살던 첼리놉스키촌도 방문하여 사할린 한인 생활, 우리 집 생활 형편을 직접 체험하셨습니다. 이렇게 우리 형제, 부모는 각기 다른 조건에서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나라가 약하고, 조국이 분단된 사실과 세계 정세가 우리가족을 이렇게 산산이 갈라놓았습니다.

- 보쉬냐코워촌에 조선학교는 언제 개교되었어요. 기억나시겠죠?

- 우리 보쉬냐코워촌에 1946년 3월 17일에 조선학교가 개교됐어요. 러시아말을 능통하게 하신 리 가브리일 니콜라예위츠 선생님이 조선학교를 개교하는데 크게 협조했어요. 유식하신 염성복 선생님은 포로나이스크사범전문학교 조선어과 1회 졸업생들이 교편을 잡을 때까지, 즉 1956년까지 교육분야에서 열심히 하셨어요.

- 패전 이후 사할린에 <신생명>이란 신문이 1948년까지 발간됐다고 하는데 선생님은 그 신문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 네, 이 신문이 <카라후토 신분>의 <신세이 메이>입니다. 즉 <신생명>이지요. 이 신문이 1945년 10월에 창간되어 1948년까지 발행됐습니다. 그 후 1949년에 <조선로동자>신문이 창간됐지요.

<신생명> 신문 크기가 현재 사할린 주요 신문인 <소베츠키 사할린>신문과 같았습니다. 러시아글을 능통하게 아는 일본사람들이 신문을 만들었어요. 통제는 소련 측에서 하고.
보통 제1면에는 스탈린 사진을 비롯하여 소련정책, 공산당 정치 등의 우월성, 소련 사회경제발전에 대한 선전기사들이 게재됐어요. 그리고 여러가지 보도, 광고도 나왔어요. 한번은 샤흐쵸르스크촌 북쪽 바닷가에 길이가 한 15미터 되는 큰 고래가 밀려 나왔다는 보도를 그 신문에서 읽었어요. 고래고기를 마음대로 뜯어갈 수 있었어요. 고래고기를 집으로 가져온 것이 잘 기억돼요. 고래고기가 맛있었어요.

- 선생님께서 <사할린 한국·조선인 문제 관련 자료집>을 펴내시려고 준비하고 계시는 줄 알고 있습니다.

- 이 책을 내 혼자서 내는 것이 아닙니다. 1991년에 사할린 한인 생활 역사 편집위원회가 주노인회 안에 조직됐습니다. 그런데 일을 미약하게 했어요. (이 말 끝에 정 고문은 <사할린 한국·조선인 문제 관련 자료 집>을 만들려고 수집한 자료들을 필자에게 보여주었다. 거기에 1936년 12월 말 남부사할린 학교 학생저금에 대한 자료도 기입되어 있었다. <사할린잔류 한국·조선인 문제와 일본 국회의원 간담회의 발족>, <이산가족 재회에 대한 대처>, <사할린 잔류자 영주귀국 지원 운동의 전개> 등 문건들로 책을 펴내려 하는 것이다.)

오늘날까지 사할린한인들이 자기 과거사에 대한 책을 발행하지 못했어요. 유감스럽습니다. 사할린 한인사회계의 아픔을 직접 겪은 사람들이 글을 남겨놓지 않으면 아무 것도 남지 않습니다.

정태식 고문은 1956년까지 일본성명을 갖고 있었다. 1946-1952년까지 임시 신분증 소지. 1952-1958년까지 비공민증, 1958년 소련 공민증 취득(우리 본성명으로 개칭). 이상과 같은 생활은 사할린 한인 1세들이 겪은 일반적인 생활이다. "이 모든 것은 일본·한국·조선, 그리고 구소련, 미국의 정책의 산물인 것이다. 전쟁은 종결되었으나 사할린한인 5만명의 운명에 대해서는 상기한 국가 지도부들이 큰 관심을 돌리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인류역사에서 2차례 세계대전이 있었지만 사할린 한인 1세들과 같은 운명은 더는 없다. 우리는 여기에서 교훈을 찾아야 할 것이다." (정태식 고문의 글에서 발췌했음. 기자 주).

- 감사합니다. 사할린 한인사회사에 대한 책이 반드시 발행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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