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골 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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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골 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했다!
  • 하석건 객원논설위원
  • 승인 2003.10.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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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골 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재신임발표 이후 프랑스의 샤를르 드골 대통령의 역사적 사례가 국내언론에서  인용된다.
현대 프랑스 역사의 영웅으로 지금도 여전히 국민들의 추앙을 받고 있는 샤를르 드골 대통령은 1969년 봄에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실패한 뒤 곧바로 대통령 직에서 물러났다.
드골 대통령의 사례는 노 대통령의 재신임 정국에 중요한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드골 대통령의 국민투표 실패와 그의 사임이라는 사건을 전후한 사건의 전개과정을 다시 살펴보자.      
드골은 자신에 대한 신임문제 자체를 국민투표의 대상으로 내세운 것은 아니다. 그는 1969년 4월 27일 몇 가지 개혁법안들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그러나 결과는 찬성 47.59%, 반대가 52.41%(투표참여율은 80%)로 실패였다.
드골이 물러나게 된 것은 이 국민투표에서의 실패가 직접적인 계기였지만, 사건의 발단의 더 앞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68년 5월에 발생한 프랑스 학생운동과 곧바로 이어진 대규모 파업을 동반한 노동운동 그리고 정부의 혼돈스러운 대응들이 드골 장권에 심각한 위기를 불어왔다.        
무엇보다 5월 사태를 보는 드골 대통령의 인식에 문제가 있었다. 그의 눈에 비틀즈는 일은 안하고 쓸데없는데 젊음을 낭비하는 청년들로 보였고, 미니스커트와 장발도 일부 몰지각한 불량배들의 소행으로 보였다.
학생들은 드골을 비난하는 것을 넘어 조롱하기 까지 했다. 그들의 반항과 저항 또 그들을 열광시키는 진보적인 사상들도 결코 생산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새로운 사고와 변화를 갈망하는 요구는 거침없이 분출됐다.  
식민주의, 냉전, 전쟁, 대량소비와 인간소외, 군비경쟁 등 전후의 다양한 모순이 자유와 혁명의 도시인 파리에서 이렇게 터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노동자들마저 파업을 무기로 정부를 압박했다. 어쩌면 시기에 편승하는 기회주의일 수도 있다. 여하튼 사태는 심각해졌다.        
위기를 해결하는 방안을 둘러싸고 드골대통령과 퐁피두 총리 간에 갈등이 발생했다. 짧은 시간동안 일어난 이같은 사태에 대해 야당과 노조의 지도부조차도 통제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퐁피두 총리는 노조대표와 협상에 성공했지만 노조원들은 이 협상안을 수용하지 않았다.
우파 총리와 내각은 물러나고 대신 야당인 좌파의 미테랑이나 망데스 프랑스가 총리를 승계해고 내각을 맡아야 할지도 모른 상황이다.
드골은 회심의 카드를 준비했다. 5월 30일 드골은 독일에 주군중인 프랑스군을 시찰한 동안, 같은 시간에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에서는 대규모적인 친 드골운동이 벌어졌다. 주최 측의 주장에 따르면 100만에 가까운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위대한 프랑스와 드골을 외쳤다. 이날 드골은 곧바로 의회를 해산했다.
이날부터 68학생운동과 파업을 앞장세운 노동운동에 역풍이 불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혼란이 장기화되는 것을 반대했다. 시민들은 5월 학생운동의 요구는 이해했지만 그것이 정치적인 상황으로 전도되는 것은 원치 않았다.
  1968년 6월 23일과 30일에 총선거가 치러졌고, 드골의 지지세력인 공화국 민주연합은(Union des Democrates pour la Republique) 과반수를 넘는 의석을 차지하면서 승리했다.
그런데 드골은 같은 해인 1968년 가을 프랑스 사회의 구조적인 개혁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면서 개혁입법안 마련을 지시하고 이 개혁안을 국민투표에  붙일 것을 결심했다.
왜 국민투표일까? 이유는 드골의 6월 총선거 승리에 대한 부정적인 해석 때문이었다.  그는 총선거는 질서와 보수주의 노선이 자리를 지킨 것에 불과 할뿐 어떤 진전이나 개혁의 의지를 담아내지 못 한 것으로 평가했다. 드골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잉태한 68년 5월의 위기를 문명의 위기와 관련지어 인식했다.
그는 국가의 전복위협을 방지하면서 사회문제를 처방을 가져올 수 있는   구조들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만이 대안이라고 주장했다.
드골의 판단은 요즘 식으로 평가하면 사태를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한 나머지 이른바 오버한 것이다.
여하튼 드골은 5월 사태로 심각한 타격을 입은 것은 사실이다. 거기에다가 총선의 승리가 결코 자신의 승리가 아니라는데 조급함이 실린 것도 사실이다.
드골의 개혁안은 대학교육개혁, 상원과 지방자치제도의 개혁, 기업법의 개혁이었다. 이 개혁안은 협력적인 정신과 구도를 기반으로 계급투쟁적 사고와 구도를 대체해야한다는 이상아래 만들어졌지만, 국민들은 드골의 목표가 상원의 힘을 약화시키는데 있다고 이해할 뿐 다른 개혁법안의 중요성에 공감하지 않았다.
여론이 좀처럼 움직이지 않자, 드골은 국민투표에서 실패할 경우 사임할 수 있다고 내비치면서 국민들에 지지를 호소했다. 국민들은 망설였고,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드골은 2차대전당시 프랑스의 희망이었고 전쟁으로 상처 입은 프랑스의 자존심이었기 때문이다. 또 전후에 혼란을 거듭하던 정치를 일거에 정리하고 프랑스의 국력을 반석위에 올려놓은 독보적인 지도자였다.
그러나 투표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가진 중도 우파가 드골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국민들은 5월 위기를 통해서 등장한 합리적인 지도자 조르루 퐁삐두에 기대를 가졌다.
국민들은 장군을 선택하지 않았다. 시대가 바뀌고 있었다. 장군은 고향 꼴롱베로 돌아갔고 이듬해인 1970년 11월 9일 세상을 떠났다. 프랑스는 1969년 6월 조루즈 뽕삐두를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드골 장군과 드골 대통령이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존경받는 이유가 단지 국민투표에서 져서 깨끗하게 사임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진정한 보수주의자였고 진정한 민족주의자였기 때문이다.
2차대전 당시 나치에게 지배당한 프랑스는 자존심에 엄청난 상처를 입었다. 게다가 미국과 영국은 전후 세계질서를 개편하는 과정에서 프랑스를 소외시켰다. 드골은 프랑스의 상처받음 자존심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경제적으로 그리고 군사적으로 힘을 길렀다. 그리고 외교적으로는 미국의 노선에 반기를 들고 소련을 끌어들이면서 냉전의 세계질서 속에서 프랑스가 어느 한쪽에도 종속되지 않는 역학구도를 만들어나갔다. 그는 철저히 국익을 위하는 지도자였다.
그러나 그도 한 인간이기에 새로운 시대를 향해 몸부림치는 젊은 세대들의 도전을 따라갈 수 없었다. 드골이 바라보는 프랑스의 위대함은 개선문에서 꽁꼬드 광장에 이르는 샹젤리제 대로의 위엄과, 일목요연하고 절도 있는 박물관식 문화의 영화로움 이었는지도 모른다.
한 시대를 주도한 정책과 사상이 영원한 생명력을 갖는 것은 아니다. 성공은 이미 그 안에 자기 부정의 모순을 잉태하고 있다. 이 모순을 다시 발전과 성공의 단초로 만들어나가는 창조정신과 의지 그리고 용기를 담고 있는 사회를 우리는 동경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는 방황과 혼돈이 따르게 마련이다.  
드골 대통령의 사례가 교훈이 되어야하는 하는 대상은 재심인정국의 노무현 대통령이 아니다. 그 반대편에 있는 구시대의 정치세력들이다. 지금 역사변혁의 선봉에 서 있는 시력은 노무현이다.    
군사독재, 냉전이데올로기, 성장주의 이런 것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것들이다. 한국사회와 역사의 역동적인 저력을 믿는다면 사라져가는 과거의 것들과 함께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시대의 분들은 조선일보 편집국장 출신의 지도자와 함께 조용히 돌아가야 한다. 이미 사실상의 국회도 해산되었고 국민투표도 결과는 나와있다.
드골은 프랑스 사회와 역사의 역동적인 힘을 믿고 자신의 역할을 정리하고 조용히 고향으로 돌아갔다. 드골 장군는 프랑스와 프랑스의 역사를 위해 자기를 헌신한 지도자다. 나치에 항거해서 조국을 구하고, 나치에 협력한 세력들을 가차없이 토벌한 인물이다. 적당히 일제와 타협한 무리들과, 친일세력을 권력의 도구로 이용한 인간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지도자다.
조용히 돌아가서 침묵하기를 바란다 침묵하는 사람은 드골의 그림자 조차 밟을 수 없는 존재일지라도  최소한 수구냉전이니 꼴통이니 앞짱구니 하는 유치한 말을 듣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 역사의 역동성을 읽고 있는 DJ는 조용히 그리고 묵묵히 통일의 날을 기다리고 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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