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군대 정통성에 관한 비교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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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군대 정통성에 관한 비교연구
  • 이영준/베를린
  • 승인 2003.10.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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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농민(민중해방)군 정통성에 입각한 남∙북 군대형성에 관한 비교

1.들어가는 글
오늘날 제3세계 정치문제를 논하는데 있어서  군의 문제는 그 중요성이 점점 드러나고 있다. 더구나 한 민족이 두개의 막강한 군대를 갖고 있는 우리의 현실은 민중사관에 입각한 군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가질 것을 우리에게 더욱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중요성에 비추어 이 논문에서는
1.        갑오농민군이 형성된 역사적 배경과 그 전통을 조명하고
2.        그 이후 이어진 활빈당, 의병투쟁 및 항일무장투쟁의 역사적 경험에서 민중사적 교훈을 토출해 내고
3.        이를 바탕으로 8.15이후 남과 북에 건군된 국군과 인민군의 기본역량과 그 건군과정을 재조명해 보는데 목적이 있다.
자료수집에 해외란 어려움도 있고 시간적 여유도 충분치 못한데다 오직 의욕만을 갖고 글을 쓰고자 했더니 논리전개의 무리와 부족한 점이 너무 많이 나타났다.
많은 분들의 좋은 의견으로 미흡한 점을 함께 보충해 나갈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2. 군의 정통성
     2.1 정통성에 관하여
정통성이란 정치적 및 법학적 개념으로 라틴어의 Legitimus 를 어원으로 하여 일반적으로 정당성, 합법성으로 풀이되고 있으나 이 글에서는 유구한 역사적 과정에 형성된 우수한 전통을 계승발전시킨다는 뜻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아울러 군의 정통성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고자 했다.
본래 군대란 국가권력과  체제를 보호하기 위해 최선봉에 위치한 무장세력이기 때문에 중립적 군대란 있을 수 없다고 한다.
매개 민족군대는 역사적으로 형성발전되는 과정에서 당대의 자기사회가 갖고 있는 사회, 정치, 경제, 문화체계를 외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투쟁을 해 나간다.  군의 정통성이란 바로 이러한 외적과의 투쟁을 통하여 형성되며 그 정당성이 검증된다. 오직 군은 이런 전통성에 입각하였을 때만 역사적 시대의 민족적 임무를 충실히 해 나갈 수 있다.
때문에 민족적 군의 정통성을 정립한다는 것은
가)        민족적 자주권을 수호하기 위한 외적과의 투쟁과
나)        역사의 주체인 민중의 경제적, 문화적 삶을 유지 발전시키기 위한 객관적 조건 등을 외적으로부터 보호하여 민족사 발전에 긍정적으로 작용한 애국적이며, 민중적이며, 진보적인 유산들을 계승 발전시킨다는 것을 뜻한다고 하겠다.

     2.2 갑오농민(민중해방)군의 전통성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내걸고 관군과 외국 침략군과 타협없는 치열한 전투를 수행한 갑오민중해방군의 정통성은 봉건사회질서를 반대한 제 1 기 전진적 승리의 단계, 반외세의 전쟁으로 성격이 전환되 가던 제 2 기 전주화약이후 집강소 민중행정단계, 구국통일전선구축을 관군에게 제안했던 제 3 기 후퇴단계의 전  전투진행과정을 통해 일관되게 지켜온 민중을 바탕으로한 반봉건 반외세투쟁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갑오민중해방군의 정통성을 1) 정치적 이념,  2)군과 민중과의 관계, 3) 군과 외세와의 관계란 관점에서 간략하게 밝혀 보고자 한다.

가)        정치적 이념: 갑오민중해방군은 낡은 봉건사회질서를 타도하고 민중을 바탕으로한 현대적 민족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려고 했다. 이는 그들이 당시 전국에 뿌린 격문에 잘 나타나 있다.
나)        갑오민중해방군과 민중: 백산 전투를 계기로 수많은 전투를 격으면서 성장한 갑오민중해방군 은 갑오년 4월(음)에 들어와 황토현 장성 황룡천에서 관군을 격파, 위대한 민중혁명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는 바로 갑오민중해방군이 핍박받던 민중의 뜻에 따라 일어났고 그에 따라 성장했다는 산 증거라 하겠다.
다)        갑오민중해방군과 외국침략군: 갑오민중해방군은 민족자주성 수호의 기본표본으로 되었다. 이들은 민족의 자주권을 수호하기 위해 적인 이조관군에게까지 구국통일전선을 구축할 것을 제안했다. 물론 이 제안은 관군의 반대로 수포로 돌아가고 민중해방군은 막강한 현대적 무기로 무장된 일본침략자와 연합한 관군과의 치열한 전투에서 많은 희생자를 내고 큰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민중해방군의 애국적이고 민중적인 전통은 현대사를 살아가는 우리 민족의 피와 사상속에 민중민주주의의 선구자로써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위에서 밝혀 본바와 같이 갑오민중해방군의 기본 전통은 반봉건 반외세 민중민주주의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
이런 전통은 그간 많은 학자들에 의해 연구 발표되므로써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갑오민중해방전쟁이후 연연히 이어진 활빈당, 의병투쟁, 항일무장투쟁등 민중의 무장투쟁에 있어서 반봉건 반외세의 갑오민중해방군의 전통이 맥을 이어온 것은 외세에 의해 나라를 강점당하고 민족적 자주권을 상실했던 우리들에겐 불행중 다행이라 아니할 수 없다.

3. 남과 북에 있어서 군대형성과정 및 그 기본역량

3.1         1945년 8.15이후 국내상황
민중사적 입장에서 볼때 이 시기는갑오민중해방군의 전통을 살리려는 민중적 민족자주세력과 반민족외세아부세력간의 치열한 투쟁의 시기였다.  이런 상황에 외세의 개입으로인해 반민족친외세파는 민주주의 신봉자로 되고 민중적 자주독립국가를 세우려던 반외세민족주의자들은 공산주의자로 낙인이 찍히어 강대국들의 동서냉전속에서 곤욕을 당하게되었다. 이러한 중엄한 시기에 외국군대가 점령한 조국의 남과 북에선 군대가 창설되기 위해 준비작업이 제각기 진행되었다.

당시 남과 북의 군대형성의 기본역량으로 등장한 무장 세력들의 출신을 구분해 보면:
1.        자의든 타의든 일본군에 적을 두었던 일본육사출신, 조선특별지원병, 조선철도특별지원병(학병), 징병출신
2.        인본괴뢰정권이었던 만주국에 적을 두었던 만군출신
3.        일제에 항거하고 조국의 독립쟁취를 위해 만주, 중국, 시베리아등지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했던 독립군,광복군, 중국인민해방군, 항일무장세력출신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참고:국방부발행, 한국전쟁사)
당시 갑오민중해방군의 정통성을 유지해온 무장세력의 지도급 인사들의 급선무는 자주적민족독립국가를 세우고 민중들의 새로운 삶을 위한 모든 조건들을 외적으로부터 보위하며 민족사의 새로운 장을 마련하는 것이였다. 이는 36년간 외적으로부터 민족적 수모와 경제적 착취를 당한 민족앞에 나선 단면과제로서 군인과 정치인의 과제가 따로 있을 수가 없었다.

3.2        국군의 창설과 그 기본역량

1945년 8.15이후 분단된 조국의 남쪽에선 우후죽순처럼 군사단체들이 등장한다. 그 단체들의 성격을 분석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가.        자주적으로 민족자주독립국가건설의 무장력이 되고저 했던 세력이 만든 단체,
나.        미군정의 협조를 받으며 자기들의 반민족적 속성을 위장하고 민주주의와 민족자주독립을 외친 친미파로 변신한 옛 친일파들이 만든 단체로 구분할 수 있다.

3.2.1        자주적으로 민족자주독립국가의 무장력이 되고자한 단체

자주적으로 민족자주독립국가의 무장력이 되고자한 단체들 가운데 가장 손꼽을 수 있는 단체는 조선국군준비대를 들 수 있다. 그 외에도 학병동맹등이 있다. 물론 학병동맹은 후에 분열이 된다.

3.2.2        미군정의 협조에 의해 유지된 무장단체

이응준등 친일장교출신들이 주동이 되어 창립한 조선임시군사위원회 치안대 총사령부등 많은 단체들이 있었으며 학병동맹도 분렬된 후에 학병단이란 이름으로 이 대열에 끼게되었다.  학병단은 미군정의 후원아래 학병동맹을 파괴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했으며 그 간부들은 후에 미군정이 창설한 군사영어학교에 입학하여 대한민국 국군창설에 큰 공헌을 한다.

3.2.3        남조선 국방경비대

당시 미군정에 대해 확실한 입장을 취하지 못한 광복군은 5개지대에 약 5천명의 병력을 갖고 있다가 8.15이후 약 20000명으로까지 증강되었으나 우리나라  남쪽에서 조직되는 군엔 큰 영향을 미치질 못했다. 그 이유는 미군정이 이들의 조직적으로 입국하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입국한 사람들 가운데는 이범석이와 같이 분단국가 건설에 충실했던 사람도 있다.

이처럼 미군정은 친일파들을 자기영향권에 흡수하면서 1945년 11월 13일 군정법령 제 28 호에 의해 국방사령부를 설치하고 그 안에 육군부와 해군부를 두어 장래 국군의 틀을 만들어 갔다.  미군정은 1945년 12월 5일에 국군 간부양성을 위해 군사영어학교를 창설했는데 이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사람은 친일파 이응준(일군출신)과 원용덕(만군출신)이였다. 광복군 출신들은 처음엔 친일파출신과 건군사업을 같이할 수 없다고 군사영어학교 입학을 이념적으로 거부했으나 몇몇 인사들은 개별적으로 입학을 했다. 이 군사학교 입학생에 대해 학병단 단원들이 „좌익“인가 아닌가 사상검사를 했다.

이처럽 당시 갑오민중해방군의 정통성에 따라 외세를 반대하던 군사단체들은 미군정 및 그 추종세력들에 의해 „좌익“ 혹은 „공산주의자“란 누명을 쓰게 되었으며 따라서 탄압을 당했다.
이런 정치적 상황아래서 미군정은 Bamboos계획에 따라 남조선국방경비대를 창설하고 미군정에 협조적인 단체들에겐 국방경비대에 편입을 시켰고 이에 반대해 갑오민중해방군의 정통성을 계승하려던 국군준비대등은 1946년 1월 9일 강제로 해산당했다. 국방경비대 대원을 모집함에 있어서 신원조회, 사상검사등을 철저히 검토해야 한다고 친일파 이응준은 미군정에 간곡히 청을 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친일파들과 일부 광복군출신들이 말한 „좌익“계열은 경비대에서 제외되고 일본군출신들이 바탕을 이룬 국군창설이 태동했다.

이런 과정을 거처 조선국방경비대가 1948년 8월 15일 조국 남쪽에서 대한민국이란 정권이 수립된 이후 국군으로 정식 발족을 보게됐다.

3.3        인민군 창군의 기본역량과 그 과정

조국 북쪽에서의 군대형성과정 자체는 외국군대의 점령하에서 이루어진 까닭에 남쪽의 그것과 비슷한 점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그 기본역량은 남에서의 그것과 대조적인 면을 보이고 있다. 국방부에서 발간한 „한국전쟁사“의 인민군 형성과정을 보면 군대형성의 기본역량은 일군이나 만군출신들은 아예 없고 주로 일제시 국내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한 사랍들, 중국, 만주, 시베리아 등지에서 항일무장투쟁을 한 사람들이 기본세력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8.15 초기 치안대 및 적위대를 편성하고 치안을 유지하다가 1945년 10월 12일 치스차코프대장의 명에 의해 해산되고 임시도인민위원회가 쏘련군 사령부와 협의하여 1945년 10월 12일에 보안대를 편성했다. 그 이후 1946년 1월 11일 인민군 창설의 기초가 되는 북조선 철도보안대가 조직됐다. 이어 1946년 2월 8일 민주개혁계획을 위한 정치간부양성이 목적인 평양학원이 창설되고 그 외에도 잇따라 수많은 간부양성기관이 설립됐다.

북에서도 이런 수많은 조직에서 양성된 간부 및 장병에게 1947년 5월 17일 일제히 계급장 수여식이 있었고 모든 조직이 인민집단군으로 재편되어 군체제로 되었으며 1948년 2월 8일에 위에서 언급한 간부양성기관에서 배출된 사람들, 항일무장투쟁조직출신, 중국인민해방군출신, 조선의용군출신들을 골간으로한 인민군창설이 정식으로 선포되었다.

인민군 제 5사단, 제 6 사단, 제 7 사단장병들은 순전히 동북의용군 및 중국인민해방군에서 조국의 해방을 위해 일제와 싸우던 군인들이었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많은 새로운 것을 시사해 주고 있다. 이는 조국 남쪽에서의 군의 형성 기본세력과 아주 대조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4.        맺음말

앞에서 간략하게 밝혀본 바와같이 1945년 8.15이후 우리나라에선 마땅히 갑오민중해방군이 추구했던 반봉건반외세의 정치이념을 실현시키기 위한 통일된 단일군대가 창설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외세에 의해 국토가 양단된 현실을 인정한 상황에서 서로 전통이 다른 세력을 기반으로 군대를 창설해야 했다는 점은 우리민족 전체에게 큰 불행이 아닐 수 없다.

건군당시는 외세에 의해 서로 전통이 틀린 세력을 기반으로 군대가 조직됐다 하더라도 민족화해와 조국통일이 민족지상과제로 제기된 1990년대엔 남과 북의 군대가 다함께 갑오민중해방군의 전통을 이어받는 자체내의 진정한 탈바꿈이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진정 남과 북의 장병들이 갑오민중해방군의 정통성을 계승하기 위해 서로 부등켜 안고 한겨레임을 확인할 때 100년전 일제 적탄에 흐트러졌던 갑오민중해방군의 피묻은 절규도, 민족해방투쟁에서 산화한 수많은 선열들의 원한도, 민족공동체영역에 화사한 꽃으로, 겨레의 가슴에 벅찬 희망으로 되살아나고 민족의 화해와  조국의 통일의 길은 한층더 가까이 닥아 오리라 믿는다.

1990년 1월 15일 서독에서  이 영 준

참고: 위의 글은 1990년 8월 2일-5일까지 일본 오사까에서 있었던 제3차조선학 국제학술토론회에서 발표했던 글이다.  자료의 부족한 관계로 국방부에서 편찬한 „한국전쟁사“만을 기본으로 참고하였다.
금년 제2차 이라크파병을 앞두고 사회여론이 분분하고 또 국군의 날을 기념하는 글들도 신문지상에 실리는 분위기라 늦은 감은 있어도 우리 국군과 북의 인민군의 전통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믿어 투고한다.
이 글에서 [갑오민중해방군]이라 부른 이유는 당시 농경사회시절 민중은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한 농민이였고 과학문명이 발달한 현대사회의 관점에서 볼때 현대적 의미의 민중이라 믿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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