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의 편지] 한국으로 영주귀국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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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의 편지] 한국으로 영주귀국하면서
  • 사할린 새고려신문
  • 승인 2007.10.03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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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름은 이미 세상을 떠나신 남편 원수원씨의 성을 따라 원기연(황기연, 1935년생)이라고 합니다. 부친 황덕부(1908년생)씨는 경상남도 찬원 출신인데 1942년 봄 어느 날 찬원에서 대구로 심부름 가는 도중에 일본놈들에게 붙잡혀 강제징용으로 당시 화태라고 불리우던 사할린으로 끌려왔습니다.

어머니 리명수(1915년생)씨는 아버지로부터 초청장을 받아 1942년 10월에 자녀 3명을 거느리고 아버지 계시는 곳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할린으로 올때 일본 와카나이에서 배를 타고 에스토루(우글레고르스크)부두에서 내렸는데 아버님이 저희들을 마중했습니다. 우리가 배에서 내린 것은 밤 10시쯤이었습니다. 거기에서 마차를 타고 토로(샤흐쵸르스크) 미쯔부시 탄광에 가서 탄광사무실에서 하루 밤을 자게 되었습니다.

그 이튿날 아버님은 저희들을 긴 판자집에 데려다놓고 일하러 떠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일하시던 현장은 미쯔부시 이치꼬 탄광이었습니다. 거기에서 잠자가면서 월요일 아침에 일나가시면 토요일 저녁에야 집으로 돌아오시군 했습니다. 그러나 월급은 받지 못했습니다.

물론 우리와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된 모든 한인들이 그러했지만 우리 가족이 겪은 어려움은 너무나 고통스러웠습니다. 먹을 것이 없고 배가 고파서… "아이들도 있고 먹고살아가기가 극히 어려운데 왜 월급을 주지 않는가?"하는 질문에 탄광지도부는 "당신들은 2년기한으로 징용왔으니 2년후에 한국으로 돌아 갈때 단번에 몽땅 돈을 받게 된다"고 하면서 아무 걱정 말고 부지런히 일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어머님은 그 당시 7살밖에 안 된 저에게 어린 동생 둘을 맡겨놓고 살아남기 위하여 아침 7시에 기차에 앉아 하마토로(샤흐쵸르스크)까지 다니면서 선탄장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세월은 흘러 2년이란 기한도 지났으나 탄광지도부는 돈 한푼도 일꾼들에게 물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다가 아버님은 1944년 8월에 이중징용으로 이번에는 사할린에서 일본 큐슈로, 하시마 탄광으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어머님은 울면서 우리 아버지가 이중징용으로 가시는 곳이 어떤 곳인가를 알아보려고 했지만 탄광지도부로부터 시작하여 아무도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누군가에게서 알게 되었는데 그에 의하면 우리 아버지가 이중징용된 곳은 물속에 있는 탄광이었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어머니는 통곡하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때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나의 어머니는 마지막 순간까지 남편의 소식을 기다리다가 별세하셨고 형제들도 아버님에 대한 그 어떤 소식도 듣지 못한채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남은 가족이 나 하나 뿐입니다. 이젠 나도 고령이 되었습니다. 죽기전에 우리 아버님이 모진 고통을 겪다가 돌아가신 그 현지에 가서 제사라도 한번 드리고 싶습니다. 나의 원한이 꼭 이루어지도록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바입니다. (루고워예에서 원기연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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